역사의 디즈니랜드화, TV 생활사 박물관 [다모]

어디서 보았는지 가물거리지만 곱씹을수록 섬뜩한 이야기가 있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도무지 영문을 알길 없는 괴이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단다. 그 사건을 취재하러 온 방송국 기자가 한 동네 사는 마을 주민에게 물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졌겠냐고. 그랬더니 주민 왈, “글쎄요. 몇 년 안에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하지 않겠어요. 그럼 우리도 뭔 일이 났는지 알겠지요.” 그 주민은 아주 영특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우리 시대에 역사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고 쓰여지는지 정곡을 짚고 있다. 지금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굳이 애써 물을 필요가 없다. 하물며 내가 살기도 전에 벌어진 일들이 무슨 진실을 갖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조만간 대중문화가 먹기 좋고 보기 좋은 형태로 가공하여 방부처리된 패스트푸드처럼 내게 배달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대중문화는 역사가 어떤 이미지로 규정되고 소비되어야 할지 결정해주고 있다.

대박까지는 아니겠지만, [옥탑방 고양이]를 대신해 등장한 새 티비 드라마 [다모]가 뜰 기세이다. “퓨전 무협 사극”이라는 아리송한 간판을 달고 나온 이 드라마는 [와호장룡]의 유려한 와이어 액션을 본뜬 데다 유치찬란한 멜로적 요소와 수사극이라는 연속극의 얼개를 뒤죽박죽 뒤섞어 놓은 짬뽕 드라마이다. [다모]란 드라마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역사를 소비하는 포스트모던한 방식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혹한 신분차별의 사회에서 서얼 출신의 포청 관리와 역적을 꾀한 양반 가문 출신의 노비인 여주인공과 대동 세상을 꿈꾸는 어느 혁명아의 진부한 삼각관계가 이 드라마를 엮는 얼개이다. 조선시대 후기란 배경은 물론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 드라마를 즐겁게 소비하기 위해 시청자들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그저 분위기를 잡아주는 배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독특한 이야기의 장르가 언제나 현재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쓰여진 과거일 뿐이라지만 그 과거는 더 이상 무슨 의미심장한 역사의 법칙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현재가 무엇인지 재현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역사는 이미 그 역사를 전유할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잃은 지 오래이다. 국민적 정체성 아래 우리를 묶어주던 공통의 과거로서의 역사는 고작 공무원 시험에나 등장하는 국사일 뿐이다. 피억압 계급으로서의 민중의 역사는 탈근대의 낭만적 신화가 되어 대하무협지와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에서의 18일]을 읽으며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 머리를 싸매는 것은 바보짓이다. [나폴레옹과 조세핀 문화미술대전] 박람회에 가면 우리는 프랑스의 역사를 전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모]는 지금 우리가 역사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가장 잘 압축하고 있는 예일 것이다. 이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보며 역사라는 문자에 전율했던 386세대, 식민지반봉건이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냐를 놓고 단내를 뿜으며 논쟁했던 6월항쟁 세대의 역사와 매우 다른 것이다. 역사란 사회적으로 소비하는 이야기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생각해 보자면 둘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반공자유민주주의의 주술로부터 해방되는데 우리는 한 점의 사소한 역사적 지식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때의 역사 역시 물론 이야기인 것이다. 국가안전기획부가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같은 온건한 역사책을 빨갱이 책의 대표 선수로 낙인찍고 그토록 집요하게 금지한 것은 그 책의 이야기로서의 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역사학자들이 이야기로서의 역사란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탈근대 자본주의는 벌써 훨씬 앞서나가 있다.
탈근대 자본주의가 역사를 가리키기 위해 쓰는 가장 흔한 용어는 “문화콘텐츠”일 것이다. 역사는 자연사박물관과 문화축제, 테마 파크, 시뮬레이션 게임, 패키지 여행을 만들어내는 우리 시대의 훌륭한 문화상품이다. 우리는 허준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허준 의료박물관을 건립하여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릴 수도 있고, 허준의 간난에 찬 삶을 추념하며 그의 이름을 딴 약초 박람회를 열 수도 있을 것이며, 허준의 이름을 딴 브랜드 마케팅을 특허로 등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 지식 경제에서 역사도 역시 문화상품이며 콘텐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의 디즈니랜드화로부터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역사의 이야기가 폭증하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역사의 이야기로서의 빈곤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 이야기란 것은 굳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와 다른 라이프스타일의 한 종류로 상연되는 역사를 관전할 때, 그 역사는 알다시피 이야기가 아니라 침묵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이야기 안에서 소비되는 역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때의 역사란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지 않은 채 영원한 동일성의 순환이라는 질식할 듯한 침묵에 빠져든 역사이다. 역사가 이야기일 때 그것은 현재의 삶을 말하는 방식을 차별화한다는 뜻이다. 역사가 삶의 서사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서사란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이야기된다는 점에 있다. 이야기가 끊기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세헤라자데처럼 우리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포스트모던한 역사의 소비로부터 우리가 구제해야할 것이야말로 이야기로서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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