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팔이 혹은 물화된 정동: 감정과 체험의 유물론을 위하여 (2)


10 CC – I’m not in love

정동의 유물론을 위하여

정신분석학의 출발을 알린 히스테리 연구에서 안나 O는 결정적인 인물이다. 프로이트의 프로이트의 환자는 아니었지만 그와 함께 히스테리 연구를 집필했던 브로이어는 그녀를 몇 년간 진료한 적이 있었다. J. 브로이어, S. 프로이트, 히스테리 연구, 김미리혜 옮김, 열린책들, 2003.
그리고 그는 브로이어의 환자였던 그녀의 치료 사례를 통해 정신분석학의 결정적인 이론적 요소들을 구상할 수 있었다. 다양한 히스테리 증상에 시달리던 그녀는 브로이어와 대화를 나누며 증상이 멎는 체험을 겪게 되고 훗날 대화 치료(talking cure)라로 알려지게 될 개념을 선물해 주었다. 발작적인 기침, 손발의 마비, 격심한 두통. 그에 더해 환각을 경험하고 자신의 모국어인 독일어가 아니라 영어와 프랑스어로만 의사소통을 하는 등 그녀는 히스테리 증세로 오랜 동안 시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브로이어가 그녀를 찾아 대화를 나누면 그녀의 증상은 호전되었다. 그녀는 그런 경험이 마치 꽉 막힌 굴뚝이 청소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이를 ‘굴뚝 청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 하지현, 정신의학의 탄생: 광기를 합리로 바꾼 정신의학사의 결정적 순간, 해냄, 2016.

정신분석이론에서 히스테리가 차지했던 의의는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자유연상을 비롯한 정신분석의 치료 방법을 제공하였고 또한 훗날 라캉에 의해 보다 명료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타자의 욕망’, 욕망의 구조와 같은 이론적 개념을 예고하였다. D. Evans, An introductory dictionary of Lacanian psychoanalysis, London & New York: Routledge, 1996, pp. 79-80.

“베르타 파펜하임의 경우, 그녀는 증상을 치료하지 못했지만 다른 여성(another woman)이 되었다. 헌신적이면서 완강한 전투적 페미니스트. 그녀는 자신이 젊은 시절 겪었고 또 그녀를 신화로 만들었던 심리치료 과정에 대해 일언반구 없이 고아들과 반유태주의 피해자들을 위해 평생 봉사했다.
프로이트의 상속인들에 의해 성인전과 같이 추앙받은 안나 O는 학술적인 역사학 저술에서 베르타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사후에 다시 한 번 그녀의 실제 정체성을 회수함으로써 그녀는 그녀의 진정한 운명, 위대한 대의에 헌신함으로써 그녀의 실존에 의미를 부여했던 19세기말의 비극적 여인이란 운명을 재발견했다. 그러나 베르타는 여전히 브로이어와 프로이트가 환영했던 그 반항의 전설적 인물로 여전히 남아있다.”(강조는 인용자) E. Rudinesco, Why psychoanalysis?, R. Bowlby tran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1, pp. 15-6.

그런데 안나 O는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녀는 과연 치료되었는가. 우리는 이 사례를 오늘날의 정신의학에 의해 일반화된 치료 방식과 대조해 볼 수 있다. 방금 인용한 글에서 루디네스코는 정신분석학 이후의 정신의학을 침통하게 고발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안나 O의 사례’를 언급한다. 여기에서 루디네스코는 파펜하임의 치료의 실패와 그녀가 다른 여성이 되었음을 대조한다. 이는 오늘날의 정신의학, 그녀가 조회하고 있듯이 정신약리학에 의한 처방의 남용에 의한 ‘치료’와 전연 다른 것이다. 아마 안나 O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녀는 다른 여성은 되지 못할 것이다. 단지 그녀의 탁자 위에는 그녀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받은 약봉지가 수북이 쌓여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희끄무레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이것은 주체의 시대로부터 개인의 시대로 전환하였음을 고발하는 루디네스코의 비통한 서술을 증언하는 사례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치료되지 않았으나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파펜하임의 사례를 정치적 주체화의 사례로서 읽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치료된 사람에서 다른 여인이 된” 파펜하임의 사례는 부르주아적 가족의 욕망의 구속복을 벗어던지고 여성주의의 투사로 변신한 그녀의 주체화의 사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신을 찍어 누르는 감정의 압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지만 안나 O가 현재의 인물이라면 약물치료나 어쩌면 미래에 도래할 신경외과적인 처치를 통해 그러한 불쾌한 감정의 신경중추를 제거하고 안락한 기분에 휩싸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신경전달물질의 처방을 비롯한 일련의 의학적, 사회적, 경영관리적 테크놀로지가 어떻게 행복을 거대한 산업으로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발로는 다음의 글을 보라. 윌리엄 데이비스, 행복산업, 황성원 옮김, 동녘, 2015.; 대니얼 액스트, 자기 절제 사회. 구계원 옮김, 민음사, 2014.

자신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함으로써 자신의 고통과 증상을 제어하며 자신의 삶을 지속하는 주체와 만난다. 그것은 감정에 붙들린 채 또 그 감정에 의해서만 대상화될 수 있는 세계가 있음을 부인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돌파의 몸짓을 실천하는 주체이다. 신경증적인 증상은 감정적 체험 속에 자신과 세계의 불화를 내비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증상을 주관적 감정이나 신경계의 고장으로 객관화할 때 주체는 그 객관적 감정의 진단과 해석 속에 흡수된다. 다시 말하면 감정의 치유 속에서 주체는 더없이 객관화된다. 그런 점에서 감정을 자율화하고 그것을 세계의 알레고리로서 아니면 세계 자체의 배치이자 구성으로서 독해할 수 있다고 확신할 때 그것은 사물화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윌리엄스는 마르크스주의 문화연구의 개요를 구성하려는 야심적인 시도인 마르크스주의와 문학에서 유명한 ‘정서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s)’라는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실천적 의식은 거의 언제나 공식적인 의식(official consciousness)과는 구분되는 데, 이는 단순히 상대적인 자유나 통제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실천적 의식은 체험되고 있는 것으로 단순히 ‘사고된’ 것이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수용되고 생산된 고정된 형태들에 대한 실제적 대안이 침묵인 것은 아니다.; 또 부르주아 문화가 신화화해놓은 부재, 즉 무의식도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물질적 성격을 띠는 것이면서도 완전히 명료하고 규정지어진 교환물(exchange)로 되기에 앞서 맹아적 단계에 있는 일종의 정서 및 사고이다. 그러므로 이는 명료해지고 규정지어져 버린 것과 이것의 관계는 엄청나게 복잡하다.” R. Williams, Marxism and Literatur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7, pp. 130-1.(강조는 인용자)

여기에서 윌리엄스는 언어학적 전환 이후의 문학이론과 이데올로기 및 세계관 등의 개념에 붙들려 있는 즉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의식의 이론에 갇힌 문화이론을 비판하며 정서와 감정을 문화 분석의 대상으로서 규정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그는 정서와 감정, 정동을 의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주체화의 역동을 해명하는 결정적인 도구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절충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실천적 의식(practical consciousness)이란 개념을 고수하며 “사고와 대비되는 정서가 아니라 느껴진 사고이자 사고된 느낌”을 옹호한다. 이는 그가 “지배적인, 잔여적인, 부상하는” 문화로서 문화의 복합적인 역학을 분석하기 위해, 지배/종속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문화의 피규정성과 능동성을 함께 사유하기 위해, 제안하는 문화 분석의 핵심 부분이다. 그는 시제를 이용하며 체험 속에 용해된 현재의 사고를 가리키기는 현재진행형의 사고(thinking)와 체험을 털어내고 체험을 포위하고 한정하는 힘으로써 고정된, 즉 과거시제로서의 사고, 즉 사고된 것(thought)을 구분할 때, 그는 감정과 정동을 사고의 바깥이 아니라 사고의 내부에서 찾는다. 따라서 그가 정서의 구조라고 말하는 것은 항간의 오해처럼 의식의 바깥에서 문화를 분석하기를 강변하는 것이 아니다. 외려 그것은 부르주아적 문화 분석의 이분법인 개인 대 사회, 주관 대 객관 등을 넘어 문화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을 위한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제안이라 간주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윌리엄스는 일견 의외의 어법으로 헤겔주의적인 주장을 펼친다. 문학에서는 감수성(sensibility)이라 부르는 것, 즉 본능적이고 자생적인 감정이 아니라 연마되고 구성된 감정으로서의 감수성은 헤겔의 정치철학에서 인륜성(Sittlichkeit, civility)과 비교될 수 있다. F. Jameson, Morality versus Ethical Substance, Social Text No. 8, Winter, 1983-1984.

헤겔은 칸트 식의 초월적인 정언명령, 주관적 정념을 넘어선 무조건적인 의무로서의 윤리를 비판하며 도덕의 객관성, 물질성을 역설한다. 그것이 관습이나 예의 등에 체화되어 있는 도덕으로서의 윤리이다. 그런 점에서 인륜성은 추상적인 규칙의 체계로서의 법과도 다르고 주관적인 심리와도 다르다.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심리학으로부터 구별하여 헤겔의 사고와 연결하는 아도르노의 언급은 시사적이다. “헤겔이 특별한 것은 일반적인 것이고 일반적인 것은 특별한 것이라는 형식에서 가르쳤던 특별한 것과 일반적인 것의 변증법이 프로이트의 대단히 특별한 학문적 구도에서 동시에 심리학을 거스르면서 재발견되었다는 점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별적 개인의 심리학이 근거를 두고 있는 내적인 핵심이 그것 자체로 일반적인 것이라는 점에 프로이트가 부딪치게 되면서 이뤄진 재발견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내적인 핵심은 사회적인 연관관계의 – 물론 원시적인 방식의 연관관계입니다. – 확실한, 전적으로 일반적인 구조들, 그 내부에 개별존재들이 놓여 있는 구조들이라는 점에 프로이트가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Th. W. 아도르노, 사회학 강의, 문병호 옮김, 세창출판사, 2014, 252쪽.

이는 감수성이 마치 주관적 심리나 감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부과된 공허한 도덕적 가치와도 다른 것과 같다. 감수성으로서의 감정, 인륜성으로서의 감정은 오늘날 감정에서 직접적으로 세계의 배치를 연역하고 도출하는 접근과는 다른 것이다. 윌리엄스가 감정과 사고의 변증법을 통해 말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사유와 감정 어느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인륜성 혹은 감수성과 유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적대성을 조정하려는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정서의 구조는 뇌해부학이나 신경생리학을 통해 규명되는 객관적 사실은 아니다. 혹은 적대적인 사회관계로서의 자본주의의 사회적 배치를 감정의 변용(affection)으로부터 직접 투시하고자 하는 정동 이론가들이 생각하는 그 정동과도 다르다. 그것은 적대적 사회관계를 주체화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물질적 실천 그 자체이다. 그것은 예의, 습관을 비롯하여 다양한 물질적인 실천의 체계를 통해 실현된다. 감정은 사회적 삶을 분석함에 있어 불가결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자율적인 대상으로서 실체화하여서는 곤란하다. 감정은 사회의 직물을 이룬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율적인 사실이나 사태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삶의 규칙과 관습을 통해 물질화된다. 우울로 인한 자살을 막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편으로 동업조합적인 사회주의를 제안했던 뒤르켐이 자살론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_동방학회지에 기고한 글. 이 글은 진행 중인 글입니다. 인용은 가급적 삼가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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