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슈얼리티의 다도해를 떠다니는 여객선의 승객들 – 퀴어 영화에 대한 어떤 생각


James Blake – Radio Silence

얼마 전 세상에 나온 소설가 임성순의 신작 자기 개발의 정석은 제법 허를 찌른다. 이 소설은 우연히 비뇨기과엘 들러 전립선치료를 받던 중 전립선 오르가즘의 신세계에 입문한 중년 남자 주인공의 삶을 비춘다. 주인공은 나이 마흔 여섯으로, “그곳이 대한민국 평균보다 조금 작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조금 나은, 중산층의 대체로 무난했던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만성전립선염을 치료받으러 간 그는 인생 최고의 굴욕을 겪는다. 버젓이 엉덩이를 깐 채 항문을 남의 손에 내어주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가 전립선마사지를 위해 처방받은 아네로스라는 신기한 도구에 눈을 뜬다. 그의 말을 빌자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기러기아빠인 그는 이제 변태와 게이라는 욕설이 주렁주렁 달린 게시판을 눈으로 밟으면서 “드라이 오르가즘”을 즐기는 신세계의 공동체에서 살아간다. 소설의 주인공은 멀쩡한 아니 이런 말이 가능하다면 순종 이성애자 중년 남성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자라는 페르소나를 압축하는 ‘아재’ 혹은 ‘개저씨’의 화신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서 그는 뜻밖의 인물로 거듭난다.

그는 법인카드의 힘을 빌려 1년에 고작 두어 번 구차하게 여자를 사고, 이 나라에서는 답이 안 나온다면서 냉큼 자식과 함께 캐나다로 떠난 처자식과 이별한 채 답이 없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삶의 선물은 전립선마사지를 통해 얻는 쾌감과 사정이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성적 좌표계를 압축한다. 그는 누구인가. 그가 항문을 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게이이자 변태라고 규탄받는다. 기능부전상태의 가족에서 하차한 쓸쓸한 독거 중년을 이성애자 남성으로 봐도 좋은 것일까. 이성애 정체성이란 것이야말로 바르고 좋은 것이라고 두둔할 때, 그것은 결혼과 가족을 위한 성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들먹이곤 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가족도 아내도 없다. 전립선 오르가즘 모임을 들락대는 이들이 돈독한 유대감을 과시할 때 이것은 성을 매개로 한 공동체 아닌가. 진정 그는 어디에 속하고 성의 지도(地圖) 어느 곳에 그의 자리는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2015년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마침내 동성결혼 합법화를 실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그 결정이 평등을 향한 여정에서 큰 발걸음을 내딛는 쾌거라고 자찬하였다. 이는 ‘오바마케어’라는 이름의 건강보험과 더불어 그가 거둔 초라한 성적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당선한 오바마는 2008년의 금융위기 직후 결국 월스트리트의 재상들을 불러들여 가진 자들의 부를 지키려 막대한 구제금융을 쏟아 부었다. ‘점령하라’로 촉발된 평등과 변화를 위한 싸움은 곧 극우 선동가들과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티파티’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는 평등을 위한 가장 중요한 결정에서 모든 것을 양보하고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문화전쟁으로 치환하는 미국의 해묵은 병폐를 해결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평등을 향한 큰 발걸음이라고 말한 그것은 평등을 위한 커다란 조치를 포기했던 실패와 무능을 가리려 동원된 자유주의적 가치의 자기위안용 반창고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마치 동성결혼이 대단한 도덕적인 재앙과 가족의 붕괴를 초래할 역병이라도 되는 양 극성스러운 기독교도들이 소동을 벌였다. 가족의 붕괴를 낳은 진짜 주범이 상시 구조조정과 해고를 자행하고 ‘각자도생’이야말로 인생의 철칙이 되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경제 질서가 아닌 듯이 말이다.

동성결혼 합법화를 둘러싼 변화는 물론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 정치와 문화에서의 중요한 변화와 상관이 있다. 결혼이란 제도이기도 하지만 윤리적 가치이기도 하다. 적어도 혼인이란 백년가약을 맺는 것이고 이는 헌신에 바탕한 장기적인 인간관계를 가리킨다. 그렇기에 동성애자, 특히 남성 동성애자를 둘러싼 혐오와 반감의 바닥에는 일회적 섹스를 밥 먹듯이 하고 사우나 같은 곳에서 공적인 섹스 공간에서 난잡한 성생활을 즐기는 자들이라는 확신이 도사리고 있다. 어느 한국 게이 영화 제목처럼 ‘원나잇 온리’와 출산을 위한 신성한 이성애적 동침(同寢)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므로 결혼을 할 수 있는 권리란 말에는 혼인 커플이 누리는 윤리적 영예를 수여받으려는 욕망이 새겨져 있다. 결혼은 합법적인 매춘이라는 한 세기 전의 급진적인 슬로건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던 때와는 한참이나 딴 세상이 된 셈이다. 물론 혼인 커플에게 보장된 다양한 사회적 권리가 있기에 혼인은 시민으로서 누려야 마땅할 권리를 누리겠다는 요구도 포함된다. 그러나 삶의 안정성을 지키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사회적 보장이 사라지고 파괴되는 세상에, 우리는 어느덧 이르렀다. 믿을 것은 가족 밖에 없다는 믿음이 스멀스멀 자리잡고 있을 때, 결혼할 권리란  수상쩍은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정황은 극장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젊은 세대들이 영화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이 통과제의처럼 여겨지던, 찰나와도 같은 1990년대가 도래했다. 때마침 앞 다투어 창간된 한국 영화잡지들은 “뉴 퀴어 시네마(new queer cinema)”란 이름을 단 영화들을 알렸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것은 실은 수신인 없는 편지였다. 그 영화를 나의 영화라고 자처하는 성소수자들은 아직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1960-70년대의 성혁명에 대한 반동처럼 에이즈위기가 들이닥치고 동성애자를 향한 증오와 학대가 극성을 이루는 상황에서 비롯된 미국의 젊은 성소수자 세대의 분노는 뉴 퀴어 시네마를 통해 분출하였고, 이들은 감독으로 혹은 문화행동가가 되어 영화제와 미술관 같은 곳을 누비고 다녔다. 토드 헤인즈 Todd Haynes의 <독약 Poison(1991)>, 탐 칼린 Tom Kalin의 <졸도 Swoon(1992)>, 제니 리빙스턴 Jennie Livingston의 <파리는 불타고 있다 Paris is Burning(1990)>, 구스 반 산트 Gus Van Sant의 <말라 노체 Mala Noche(1985)>, <아이다호(My Own Private Idaho(1991)>, 데릭 저먼 Derek Jarman의 <카라바지오 Caravaggio (1986)>, <에드워드2세 Edward II (1991)>, <블루 Blue (1993)>, 그레그 애러키의 <리빙 엔드 The Living End (1992)>, 료스케 하시구치 橋口亮輔의 <스무살의 미열 二十才の微熱 (1993)> <모래알처럼 渚のシンドバッド (1995)> 등이 모두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주눅 든 표정으로 관용과 인정을 호소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비타협적으로 고수하는 폭군이거나 절망적인 연쇄살인마, 호러영화의 괴물, 보헤미안적인 매춘 청년, 뉴욕 빈민가의 흑인 드랙퀸, 성난 HIV감염자들, ‘이지메’가 싫어 재봉틀을 들고 가출한 게이 소년이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호의적인 시선을 얻기 위해 구걸하지 않았고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로부터 기꺼이 탈출하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전 세대의 성혁명의 투사들이나 게이해방운동의 활동가들처럼 성에 그리 큰 가치를 두지도 않았다. 죽음을 낳는 페스트처럼 여겨지고 ‘안전 성교(safe sex)’라는 도덕적, 의학적 캠페인이 맹위를 떨치는 시기에 섹스는 문명을 돌파하는 자유와 관능의 약속일 수 없었다. 동성 간의 섹스가 매력적이었다면 이제 그것은 차라리 퇴폐적이기에 혹은 그것에 드리운 멜랑콜리한 죽음의 그림자 때문인 듯 보였다. 외려 그들의 더 큰 관심은 동성애자나 게이라는 정체성 자체였다. 남성 간의 혹은 여성 간의 친밀한 관계라고 말할 때, 그것은 대관절 어떤 젠더이며 그리고 그것은 과연 믿을만한 개념이자 분류인지 그들은 따지고 들었다. 동성애는 이성애란 정체성이 만들어진 순간 동시에 출현한다. 그렇기에 소수적 성정체성이란 이성애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와 함께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성정체성이란 집합에 속한 원소들로서 이성애와 동성애는 각각의 원소로 서로의 맞짝처럼 붙어있었다. 그즈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퀴어이론가 주디스 버틀러(J. Butler)의 젠더 트러블 Gender Trouble이란 책 제목처럼 그들은 성별이란 관념에 말썽을 부리고 싶어했다. 미심쩍기 짝이 없는 성별이란 개념이 결국 어떤 성별을 자신의 성 대상(sex object)으로 삼느냐에 따라 성을 식별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저 지나가는 유행으로 머물렀다. 호모콘(homocon)이라 불린 보수적 동성애자들에 의한 도덕적 캠페인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정상적인 시민으로서 동성애자되기를 요구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만들어낸 나쁜 게이들을 ‘왕따’시키고 좋은 게이 시민이 되어 이성애자와 함께 사는 대안을 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겐 성별이 뭐냐 성정체성이 뭐냐 따위를 묻는 건 괜히 스스로 복잡한 퍼즐 같은 질문을 만들고 푸는 데 골몰한 좌파 지식인들의 고약한 버릇일 뿐이었다. 좋은 게이 국민이 되기 위해 그들이 요구한 것은 결혼할 권리였다.

그리고 삽시간에 뉴 퀴어 시네마의 열기는 사라졌다. 그것이 제안했던 생각을 여전히 고수하는 이들은 아주 희귀하다. 이를테면 자비에 돌란 X. Dolan의 <탐앳더팜 (2013)>, 토드 헤인즈의 <캐롤 (2015)>,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A. Weerasethakul의 <열대병 (2004)>에서 <메콩호텔 (2012)>이나 아직도 개봉할 기회를 찾지 못한 채 대기하고 있는 알랭 기로디 A. Guiraudie의 <호수의 이방인 (2013)> 등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그 대신 새로운 퀴어영화들은 성장영화로 대표되는 독특한 레즈비언, 게이 장르 영화로 주류화되었다. 성소수자 관객들을 직접 겨냥한 이러한 대중영화들은, 한국이라면, 독립영화의 배급망을 통해서나 아니면 관객참여형 펀딩과 같은 제도의 도움을 빌어 최근 지속적으로 제작되어 왔다. 김조광수(<친구사이 (2009)>,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2012)>, <원나잇온리 (2014)> 등), 이송희일(<후회하지 않아 (2006)>, <백야 (2012)>, <야간비행 (2014)> 등), 백인규(<퀴어영화 캔디 (2014)>, <퀴어영화 나비 (2015)> 등)의 영화들은 바로 그런 사례에 해당될 것이다. 이 영화들은 성장영화의 공식인 성에 눈뜨는 체험과 성정체성의 자각을 교차시키는 예정된 서사, 제한된 허용치 안에서의 관능적인 성애 표현, 그리고 금지된 사랑에 몰두해야 하는 이들의 열정을 이상화하는 멜로드라마를 뒤섞으면서 게이 관객은 물론 미소년들의 사랑을 소비하는 “야오이(やおい)” 이성애자 여성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그렇지만 퀴어 영화를 구성하는 보다 큰 영역은 포르노그래피일 것이다. 세계화와 더불어 무엇보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퀴어 세계화(queer globalization)’이란 현상이 만들어졌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게이들이 송크란 축제에 맞춰 방콕에서 개최되는 대규모 댄스파티에 참여하거나 <허핑톤포스트>같은 신문에서 게이 섹션을 읽으며 세계 전역에서의 성소수자에 대한 기사를 탐독할 때 또는 아마존을 통해 해외의 퀴어이론 서적을 주문해 읽고 논문을 쓸 때, 성소수자는 ‘게토’와 같은 곳으로 밀려나면서 동시에 가장 발전된 정보와 이동의 네트워크에 참여한다. 그리고 성소수자들은 다양한 SNS를 이용하며서 혹은 토렌트 서비스를 통해 일본의 코트(Coat)나 브라보(Bravo), 미국의 콜트(Colt) 같은 브랜드의 포르노그라피를 소비한다. 이 때 우리는 앞서 본 전립선 오르가즘을 느끼며 살아가는 중년 이성애자 남성이 과연 어떤 성정체성인지 분류하기 난감한 것처럼 독특한 취향과 생활방식을 통해 살아가는 게이 남성이나 레즈비언 여성, 성전환자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가 모두 낯설고 또 친하다. 그들은 결혼할 권리를 주장하는 성소수자라는 가름막 뒤에서 삶을 연명한다. 그 어느 때보다 성을 둘러싼 확고한 윤리와 분류법이 자리잡아가는 듯이 보이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성을 둘러싼 항해를 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퀴어 영화는 그를 모른 체 하거나 혹은 그에 참여한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는지 아직 모른다.

_영화잡지 맥스무비의 청탁을 받고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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