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이모티콘이다, 그래서 사진은 위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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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진은 그냥 ‘이모티콘’일지 모른다. 오늘날 사진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을 집계하고 드러낼 작정이라면, TV와 인터넷(특히 소셜미디어서비스 SNS)에 범람하는 사진의 화용론(pragmatics)을 떠올려보는 게 수순일 것이다. 이제 사진은 어떤 시간에 있었던 사물, 사태, 현실에 대한 광학적인 기록이 아닌 듯 보인다. 사진은 더 이상 지표(index)적인 언어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은, 바르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푼쿠툼의 푼크툼이다. 바트르의 요청처럼 사진을 사실을 재현하고 지시하는 언어 기호로 볼 것이 아니라 미적인 감응의 상징으로 보아야 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러는 중이다. 지겨우리만치 사진을 관람하는 이들의 체험 한 복판에 이런 좌우명은 새겨져 있다. 우리는 사진에서 무엇이 기록되었는지 끈기 있고 사려 깊게 관찰하고 바라보기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즉각적으로 어떤 감정이입(empathy)을 강요받는다. 사진은 무엇보다 눈물샘을 가격하여야 한다. 사진은 당장 분하고 괘씸한 심정을 자아내야 한다. 혹은 사진은 당장 흐뭇하고 따사로운 감정을 쥐어짜는 손짓이어야 한다.

국제구호기구의 기부 광고에서부터 상품 광고에 이르기까지 사진이 넘쳐나지만 그 사진들은 어디에서부터인가 심각하게 바뀌었다. 사진이 촬영한 대상이 아니라 사진 자체가 이제는 이렇게 말을 건넨다. “당신 앞에 당신이 어떤 감정적 반응을 보여야할지 요구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 어쩔 것인가.” 그런 점에서 사진은 점점 이모티콘을 닮아간다. 나는 장황하고 복잡하게 나의 상태를 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단지 하나의 이미지를 전송하면 끝이다. 이모티콘은 나의 현재 상태를 거두절미 전달한다. 기쁘다, 좋다, 슬프다, 화난다, 답답하다, 쑥스럽다, 역겹다, 안타깝다, 당혹스럽다…. 그것은 각각의 이모티콘을 통해 압축되고 전송된다. 사진에서 우리는 그러한 이모티콘과 같은 효험을 발견한다. 사진은 그것을 보는 이들이 취할 자동적인 감정-반응을 주문하고 또 사진 자체가 감정을 전송하는 한 없이 투명한 기호(sign)임을 과시한다. 사진은 무엇이 있었는지를 가리키기에 앞서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어떤 감정에 휩싸일지 주문한다. 그리고 우리는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리고 트위터에 사진을 링크한다. 거기에서 사진은 나의 감정을 비추는 거울이고 타인이 반응해야할 감정적 사태이다.

얼마 전 안산에 있는 경기도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던 <사월의 동행-세월호 희생자 추념전>엘 다녀왔다.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이 전시를 찾으며 나는 어렴풋이 사진 작품들을 볼 것임을 예상하였다. 기대보다 사진 아닌 다른 매체를 사용한 작품들이 많아보였다. 그러나 역시 이 전시를 압도한 것은 사진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오늘날 사진이 획득한 위력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현실을 감정으로 겪는다. 감정은 현실에 대한 주관적 반응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되었다. 어느 시사주간지가 세월호 참사를 묘사하며 가리켰듯, 그것은 ‘감정의 쓰나미’였다. 객관적 사고이기에 앞서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동원하도록 촉구하는 감정으로서의 현실이었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화면을 바라보며 우리는 아무런 손도 쓸 수 없는 채 ‘골든타임’을 넘긴 채 바다 속으로 잠겨든 여객선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 전시에서 말로만 듣던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의 사진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사진들은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은 단원고 학생들의 빈방과 유품에 대한 기록사진이다. 전시를 소개하는 책자는 “이 기록사진은 사회적 망각에 저항하여 희생자를 기억하고 사회적 연대를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 운동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416세월호 참사 기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기획되었으며, 이들과 동행하고자 했던 사진작가들에 의해서 촬영되었다”고 전한다. 나는 이 사진들 앞에서 창피하게도 속수무책으로 이를 악문 채 오열하였다. 그리고 전시를 보고 난 후 이 전시에 관한 감상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함께 전시를 본 학생들 역시 그 사진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본 사진들은 작은 차이들은 있었지만 대개 화면 안에 등장하는 대상들, 그러니까 침대, 책상, 성모마리아상, 애도의 뜻을 전하는 말들이 적힌 종이들, 옷걸이의 옷들,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사진들 따위를 거의 동일한 심도로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각 사진마다 또렷하게 하나씩 빽빽하게 도열한 그 세부적인 대상들을 빼놓지 않고 셈하듯 바라보아야 했다. 견디기 어려웠지만 마치 그에 저항하면 마땅히 짐져야할 윤리적 의무를 회피하는 것 같은 기분에 쫓기며. 또한 나는 그 사진들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여야 하는 많은 사진들이 강제하는 윤리적 압력의 연장선 위에 있다는 느낌 역시 떨치기 어려웠다. 오늘도 너저분한 ‘짤방’ 사진을 중계하는 사진들 사이에서, 우리가 반응해야 할 감정적인 현실을 제시하는 사진들과 마주함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사진은 현실을 지시하기에 앞서 우리가 분노하거나 증오하고 혹은 동정과 연민을 품어야할 이미지를 실어 나른다. 이스라엘의 사진이론가인 아주레이(A. Azoulay)는 영어로 그의 책을 번역, 출간한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사진이론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을 이루었다는,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그녀의 책의 제목은 <시민적 상상 Civic imagination>이다. 그녀는 사진이라는 광학적 이미지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고 답한다. 이는 사진을 관람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가 고독한 관람자에 머물지 않고 시민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한다. 그렇지만 나는 그 주장을 믿기 어렵다. 그녀가 강변하는 사진의 정치적 존재론은 단지 소망을 투영한 생각처럼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을까. 사진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의 세계를 해체한다. 그것은 각자가 농밀한 감정의 강도를 동원하며 반응해야 할 현실을 전할 뿐이지 않을까. 바야흐로 오늘날 사진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은, 사회를 사라지도록 한다. 이는 사진의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일 것이다.

_사진잡지 <포토닷>에 기고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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