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이후의 세대 – 청년세대는 어떻게 소멸하게 되었는가


Sonic Youth – Superstar

사회이론이 세대를 다루는 방식은 뜻밖으로 소박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한심하리만치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대란 것을 자연스런 사회적 사실로 여기고 각 세대의 정체성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것처럼 간주한다. 청년세대, 장년 세대, 노년 세대 등으로 분류하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연령이라는 눈금에 따라 다양하게 세대를 구분하고 그렇게 구분된 각 세대에 공통된 정체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세대의 사회학이란 것이 허술한 생각임을 간파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문화적 정체성으로서의 세대란 것, 즉 자신의 세대적 소속을 주어로서 삼으면서 “우리 세대는”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청년세대에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청년세대를 제외하면 나머지 세대들은 평범한 인구학적 사실들, 즉 연령, 건강, 학력, 소득 등의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딱히 자신 만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내세우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노인문화란 말은 어쩐지 어색하다. 노년 세대나 장년 세대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인구학적 지식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청년세대는 다르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다른 세대는 객관적 사실들의 세계인 반면 청년세대는 주관성을 가리킨다. 청년세대만이 자신을 하나의 세대로서 의식한다. 그들은 인구학적인 세대의 다양한 가짓수 가운데 하나, 즉 하나의 종(種)인 듯이 자신을 나타내지만 실은 그들은 세대 이상의 세대이다. 세대란 기표를 통해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오직 청년세대에게만 해당된다. 자신이 처한 삶의 온갖 문제를 세대라는 프리즘을 통해 조망하는 일은 청년세대를 빼곤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청년세대와 다른 세대 간의 비대칭성을 생각해보면 세대론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 이론이자 시점(視點)인지 깨달을 수 있다.
인구란 개념이 등장하면서 청년기라는 세대가 따로 분리되어 이해되어야 했다는 점은 짐작할 수 있겠지만 청년이란 낱말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의미를 거느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모레티는 부르주아사회의 초기에 청년이란 말이 차지하던 의미를 요령 좋게 짚어낸 바 있다. F. 모레티, 세상의 이치: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 성은애 옮김, 문학동네, 2005.

이 때 그의 관심은 성장소설 혹은 교양소설로 널리 알려진 소설 형식에서 등장하는 청년이다. 지금은 시들해졌거나 자취를 감춘 근대 소설 문학의 유명한 장르인 그 소설들은 청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그 때의 청년이란 인생사의 어떤 단계를 가리키는 인구학적 청년이 아니라 근대세계의 상징적인 형식으로서의 청년이다. 교양소설이 그려내는 문학 내적 존재로서의 청년이란 부르주아혁명 이후 등장하게 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화해시키는 인물로서의 청년이다.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은 개인의 삶에서는 자신의 욕망을 타협하며 결국 사회와 화해하는 삶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 말했듯이 모든 청년은 부르주아이다.

부모의 지위를 세습하는 자본주의 이전의 세계에의 인물에겐 청년이란 인물형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부르주아 사회에서 사정은 다르다. 그는 자유를 지니고 있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간다고 믿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고 기꺼이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여야 한다. 그리고 청년이란 세상이라는 문턱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를 두고 번민하는 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청년은 자신의 꿈과 현실적 생존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적 생존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임을 깨닫고 성숙해지며 어른이 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욕망과 꿈을 철부지의 미몽(迷夢)으로 흔쾌히 처분한다.

이처럼 부르주아 사회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이 부과한 운명에 따라 살아가야하는 자들의 타율성을 자신의 삶의 선택하는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성으로 둔갑시킨다. 그렇지만 그것은 상처를 남긴다. 성장소설이나 교양소설은 예외 없이 시큼한 우울을 우리에게 남긴다. 우리는 마침내 어른이 되기 위한 문턱을 넘어서지만 그것은 나의 자유를 양보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리고 성장 소설은 그러한 우울을 보상할 교훈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것은 성장을 위해 그리고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기꺼이 지불해야할 대가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청년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을 응축하면서 또 전치시키는 형상(figure)이다. 모레티는 그것을 성장소설이라는, 지금은 주춤하거나 사라진 문학 장르에서 읽어낸다. 결국 모레티가 말하는 청년이란 세대라기보다는 개인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에게서 청년은 일정한 연령대에 속한 사람들의 그룹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집단으로서의 청년은 없다. 오직 청년은 개인이라는 형태의 인물형(character)로서만 존재한다. 청년이란 이름이 알고 있는 인물은 오직 개인으로서의 인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청년세대가 유일하게 주관적인 세대라고 말하는 것은 반쯤만 옳은 생각일 수 있다. 20대의 한 젊은이가 자신의 방황과 번민을 청년이라는 연대기를 경유해 자신의 삶을 이해할 때 그는 오직 개인이라는 인물을 알 뿐이다. 청년세대란 용어는 세대란 말을 참조하지만 실은 그것은 개인/사회의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경험하는 주체를 가리키는 암호일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청년세대를 에워싼 숱한 논란은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청년세대란 말을 써먹을 수 없음을 알려준다. 적어도 오늘날 청년세대란 개념은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객관적인 삶의 조건 자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실업과 고용 불안,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삶의 상태는 청년세대를 가리키는 숱한 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비(非)청년세대는 객관적 사실에 속하지만 청년세대는 개인이라는 주관적인 인물의 비유로서 문화적 정체성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하는 부르주아사회의 상징적 형식이란 말은 무색해진다. 청년세대가 자신을 세대로서 인식할 때 그것이 가리키는 개인과 사회의 변증법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 펼쳐진다. 개인으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외부, 즉 사회라는 타율적인 힘을 긍정하거나 부인하는 청년기의 변증법, 개인 대 사회의 변증법은 오늘날 굴절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성숙’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개인화하는 것은 더 이상 아니다. 성숙은 금지되었고 모두들 청년세대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청년기가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는 우리 시대의 기이한 삶의 숙명을 떠올려봄으로써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철면피한 젊음을 향한 숭배는 청년기를 언젠가 종결되어야 하는 생애의 어느 모퉁이로 간주하길 거부한다. 청년은 이제 문화적 이상이 되었고 모든 이들이 청년을 모방하거나 추종한다. 유년기는 의존적이면서도 순진한 어린이 혹은 소년이라는 이미지와 짝을 이룬다. 반면 성인기의 인물상은 세계에 완전히 통합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그 자체(하이데거의 ‘보통사람 das Mann’이란 개념이 이에 가깝지 않을까)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인물 사이에서 불안하면서도 열정적인 삶을 가리키던 청년은 이제 더 이상 어떤 흥분된 일시적인 과도기가 아니다. 그것은 모두가 두루 추구해야할 문화적 가치로 등극한다. 100세 시대에 여전히 젊음을 누리고 살아가는 노인들이 있다며 허풍을 떠는 대중매체의 기사에 신물이 나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나이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젊음의 외모를 지키라는 광고는 오늘날의 젊음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것은 청년 혹은 젊음이란 것이 마땅히 모방하고 추구됭야 할 이상(理想)임과 동시에 성형된 젊음 혹은 심미화된 젊음 그 자체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정작 청년세대에게 자신의 젊음이란 무엇일까. ‘인공보철적인 캐릭터(prosthetic character)’로서의 젊음이 횡행하는 시기에 청년세대는 자신의 젊음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그것은 오늘날 청년세대의 정체성의 놀라운 역전(逆轉)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오늘날 청년은 실업, 빈곤, 친밀성에 대한 공포, 삶의 불안정성 등 수없이 다양한 사회적 사실로 납작하게 환원된다. 그들은 다른 세대가 젊음의 기표를 미적 가치이자 문화적 이상으로 흡혈귀처럼 전유할 때 정작 자신들의 젊음을 터무니없으리만치 건조한 사회적 사실들로 환원한다. 한 때 청년세대란 것이 세대의 일원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개인화하면서 동시에 사회화하는 실천을 가리키는 비유였다면 이제 청년은 더 이상 자신을 개인화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생존 조건 자체를 자신의 젊음과 동일시한다.

자본주의 세계에서의 내적 적대와 모순은 크게 두 가지의 양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계급적인 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 대 사회의 대립을 매개하는 개인의 내적 투쟁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전자를 다룬다면 정신분석학은 후자를 다룬다. 전자가 계급적인 갈등을 통해 자본주의의 질서/무질서를 밝힌다면 후자는 무의식적인 충동과 의식 사이의 갈등을 통해 개인화의 역동(dynamics)을 분석한다. 그리고 청년세대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책임은 뒤의 것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괴상한 논리를 목격한다. 그것은 계급 없는 계급적 갈등이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의 갈등으로 치환되는 것이다. 개인 대 사회의 대립을 떠맡고 이를 처리하는 사회적 과정을 비유하는 말이었던 청년세대는 이제 개인이 아니라 계급적 대립에 가까운 것을 떠맡는다. 그리고 바보가 아닌 한 청년세대의 정체성으로 알려진 그것은 청년 세대의 속성이 아니라 바로 ‘경제’ 문제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한편 개인화를 에워싼 격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당연 그렇지 않을 것이다. 개인화를 둘러싼 투쟁은 이제 청년세대에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모토는 바로 누구나 영원히 스스로를 개인화하라는 것이다. 이는 저 악명 높은 선언처럼 “사회 따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은 자신들의 삶을 둘러싼 모든 문제를 개인이 해결하여야 할 과업으로 떠넘긴다. 그것은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숙명이다. 빈곤은 개인의 재무관리의 문제이고 실업은 개인의 직무역량에 달려있으며 성차별은 자기주도적 리더십을 통해 극복하여야 한다는 등등으로 무한히 이어지는 개인화의 윤리는 허무맹랑하게도 맹위를 떨치며 모든 세대를 옥죈다. 안정적 노후를 위해 자기관리를 요구받는 노인이나 취업과 결혼을 위해 스펙을 키우도록 요구받는 청년이나 처한 사정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세대 이후의 세대의 세계에 접어들었다.

여기에서 부르주아적 개인의 이상을 시험받는 불안하면서도 성난 그러나 더없이 열정이면서도 우아한 청년 세대의 초상은 찾아볼 수 없다. 생물학적인 연령, 인구학적인 분포를 제외하면 더 이상 다른 세대와 다를 바 없는 세대인 청년 세대가 찾아왔다. 그러므로 세대갈등 혹은 세대투쟁은 농담이 아니라면 거짓이다. 그렇다고 계급투쟁이 세대투쟁으로 전치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피상적인 주장이다. 계급적 갈등은 인종이나 종교와 같은 숱한 정체성 사이의 갈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양극화와 불안정노동이 지배하는 세계에 접어든 후 우리는 세계 전역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인종적 증오와 무슬림혐오를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세대 갈등은 다른 것이다 개인의 내적 투쟁과 계급갈등의 변증법은 그렇게 쉽게 포개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년세대란 경제적 지위로 환원할 수 없는 개인-되기의 궤도가 놓인 곳이었다. 그러므로 청년세대 정체성이 소멸하는 것은 오늘날 개인화의 위기를 보여준다. 혐오와 증오, 음모와 편집증적인 환상이 오늘날 문화가 작동하는 연료가 되어버린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깊은 내면적 관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외부 세계의 맹렬한 압력을 자신의 내적 투쟁을 통해 전경화하고 또 극복하는 개인은 희귀해지고 있다. 자신의 내면 안에 사회적 세계를 옮겨놓고 모나드(monad)처럼 내적인 투쟁에서 사회적 모순을 처리하며 살아야 했던 개인은 이제 전적으로 사회화된 개인이 되어버린 듯 보인다. 개인은 사회가 마련해준 더 나은 인물이 되기 위한 처방을 소비하며 사회 속으로 더욱 끌려 들어간다. 개인의 내면적 갈등 속으로 들어온 사회의 내적 모순은 사라지고 개인은 사회의 ‘사례’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청년세대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다른 세대와 다를 바 없는 인구학적인 분류가 되어버린 연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청년세대가 사라지며 우리가 잃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섬세하고 사려 깊은 개인을 잃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개인의 결단과 용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던 정치적인 행위 역시 사라지게 만든다. 그 자리엔 자신을 곧 사회의 일원으로 대표할 수 있다고 믿는 개인 아닌 개인들로 범람한다. 그리고 이미 암시했듯 그런 개인은 개인이랄 것도 못 된다. 그런 점에서 ‘사회미학’이란 이름으로 지칭되곤 하는 동시대미술의 어떤 추세는 의심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회참여예술(socially engaged art), 참여와 협업, 관계미학, 공동체 등의 개념은 개인과 사회 사이에 ‘매개 없는’ 직접적인 관계를 가정한다. 물론 이는 여기에 제한될 수 없을 것이다. 탁월한 심미적인 개인이라는 환상도 구역질나는 것이지만 사회와 개인의 직접적인 일치 혹은 매개되지 않은 반영 관계를 가정하는 것 역시 겉보기와는 달리 보수적이다.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깊이 따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회적 적대와 개인의 내적 투쟁 속에서 어떻게 현상하고 체험되는지 무시한다. 그것은 자신이 부정하고자 하는 세상에 더욱 깊이 연루되도록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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