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문 밖 안골

– N씨는 노무현이 탄핵 이후 곧잘 들러 유명해졌다는 안골이 저 안쪽에 있다고 가리켰다. 아직도 이 대명천지 서울에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동네라며. 그리고 효자동 사람들은 안골에서 나오는 채소가 오길 기다려 김장을 한다던가 그런 말도 덧붙였던 듯하다. 뒤안을 가리키는 그의 손길과 달리 나는 눈 앞의 창밖에 더 시큰했다. 북한산성의 흔적이 드문드문 늘어선 산자락을 따라 잘 생긴 70년대의 이층양옥집들이 보였다. 우습게도 삼각형 꼴의 다락방을 얹은 산장 풍의 양옥들. 회벽에 붉은 벽돌 색깔의 타일을 덕지덕지 바른, 그 을씨년스런 양옥들이 그곳에선 안성마춤같았다. 무엇보다 고요했고, 차분하여, 멎어버린 세상같았다. 그 풍경이 어찌나 좋던지 서울에서 제일 손맛이 좋다는 그 집 만두도 내겐 시큰둥했다. 이렇게 철렁한 풍경 하나가 눈에 붙으면 기분이 묘하다. 파노라마라고 부르는 시선, 보행자의 시선 혹은 탈 것에 조율되어 있는 눈길로 세상을 보다 어느 순간 靜物로 화한, 멎은 세상을 볼 때의 놀라움 때문일까. 한 해에 몇 장 이런 풍경을, 아니 풍경은 쏘다니는 자들이 찍어 놓은 눈 앞의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니 다른 무엇으로 칭해 마땅할 그 이미지들을, 마음 속에 접어 넣어야겠다. 두어해 전 겨울 장성 어느 마을의 논바닥의 풍경, 그것도 역시 이만치 훌륭했었지.
– 금요일 오후의 수업은 마감 때의 께른한 기분을 넘기기 어렵다. 그래서 수업하기 싫지않냐고 농을 건네며 수업을 시작하는데 아이들이 아우성이다. 놀러가잔다. 난 추워 바깥에 놀러 나가기 싫댔더니, 영화를 보러 가잔다. 뭘 볼테냐고 물었더니, 맙소사, 마파도란다. 니네들 취향 너무 후지다고 놀리며 수업을 하려다, 일전 본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생각나 이야기해 주었다. 한 녀석이 상기된 표정으로 오늘 예매를 했다 길래 스포일러가 되지 않게 시놉과 상관없는 곁가지 에피소드 몇 개를 들려주겠다고 말문을 뗐다.(듣던 중에 예매했다는 친구가 오늘 다른 영화 볼 테니 이야기 마저 다 해달라고 조른다. 물론 마다했다). 그리고 시작한 수업, 그게 아이들의 기분을 누그러뜨린 모양이다. 길이가 모자라 옷깃에서 자꾸 떨어지는 마이크를 바꾼다고 어디서 길이가 긴 마이크를 가지고 온 녀석도 있고, 캔 녹차를 사다가 주는 놈도 있다. 수업 끝나고 나오는 길에는 글 자주 보았다고 벙글벙글 웃으며 따뜻한 홍차 캔을 건네는 녀석도 있다. 이렇게 일순 친해지려는 아이들을 보면 미안하고 뭉클하다. 내게 뭘 배우자고 온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나와 사귀자고 오는 아이들이기도 한데, 난 사귀려는 노력은 별로 않는다.
– 그간 꾸준히 글을 쓰던 매체에서 청탁이 없길래 내심 짐작하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아차 그게 적중했다. 어렵게 보낸 메일에서 그래도 그 매체를 연명하고 싶다면서 외상으로 원고를 사겠다고 전해왔다. 창업할 즈음 곁에서 설레발치며 거들었던, 거래처라기보다는 내게는 늘 빚지거나 무안한 곳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무슨 희한한 직함을 달고 그곳이 문을 연 몇 달 동안 식객이 되어 몇 번 좋은 저녁도 얻어먹고, 같이 술자리도 했던 동네다. 6달 동안 매달 한 꼭지씩 원고를 보내주었으면 좋겠다 길래, 그러겠다고 넙죽 답장을 보냈다. 여유만 된다면야 더 많이 보내주고 싶다. 그간 몸서리치며 꽈서 쓴 글, 쉽게 즐겁게 써서 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흥하는 사람보다 기울거나 꺼져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왜 이렇게 칙칙해진 걸까. 다시 계속 낼 수 있을지 말지 의논하러 편집회의엘 가는 걸음이 영 무겁다. 책임지지 않고 권한만 누리는 편집위원 자리가 과분하다. 큰 전주를 찾아 저널을 살릴 능력도 없고 올망졸망한 광고를 따올 변변한 인맥도 내겐 없으니, 무능하다. 그러면서 그 저널에서 제 입심을 발휘할 생각이라면, 않는 게 낫다.
– 생계가 바닥을 치고 나서 혼비백산한 박군이 직장을 구했다. 어느 디자인 펌이라는데, 들어봐선 주류 본산인 듯 하다. 기회가 되고 도움이 될 듯 하다. 별다른 밑천이라곤 없고 오직 재능과 감각 뿐인 아이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인정일 것이다. 그걸 얻는 게 어쩌면 취업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 커서 출가하는 아이를 보는 듯 하여, 기분이 아삼하다. 슬슬 나도 채비를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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