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읽는다는 것: 앨런 세쿨러를 그리워하며

Allan Sekula , Noël Burch – The Forgotten Space

사진을 ‘읽는다’는 말은 가치가 하락한 지 오래이다. 한때 사진은 의미, 이데올로기, 신화, 코드 따위를 탑재한 이미지이자 텍스트였다. 그것은 읽기를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정되기 위해 우리 앞에는 ‘쓰인’ 사진이 놓여있어야 했다. 즉 어떤 의미를, 이데올로기를, 가짜 진실을, 허위적인 욕망을 기재하고 등록한 이미지로서 사진이 그들 앞에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뒷받침해주었던 것은 사진 자체이기도 했지만 그를 위해 불가분한 하나의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사진이라는 소우주 속에서도 사진이 자리하는 시대의 소인(消印)이 찍혀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연기처럼 흩어진 듯 보이는 갈등의 원리이다. 나는 갈등의 원리를 장소이든 시간이든 물질적 흔적이든 이미지이든 모든 것에 사회를 규정하는 지배와 갈등이 비쳐있고 또 조심스러운 눈길로 그것을 헤쳐 보면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는 뜻으로 읽는다. 그것은 대상의 편에 무늬처럼 새겨져있는 대립과 모순의 기호(記號)를 일컫는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존 버거나 롤랑 바르트 아니면 빅터 버긴, 앨런 세쿨라 같은 사진가이면서 비평가였던 이들은 모두 사진을 읽는다는 것에 열중했고, 바로 사진을 읽고 쓰는 것과 정치적인 행위를 한다는 것 사이에 튼튼한 다리를 놓았다. 물론 그 다리는 매우 오래 전 유실되었음은 물론이다. 며칠 전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인물이자 문고리3인방의 일원인 우병우 청와대 비서관이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를 찍은 사진 한 점이 논란이 되었다. “팔짱낀 채 웃으며 조사받는 우병우”란 사진이 그것이다. 이 사진은 조선일보의 객원 사진기자가 찍은 것이었다. 안하무인한 그의 성품을 벌거벗듯 보여준 그 사진은 마치 누군가 품속에서 꺼내 보이는 사진 같았다. 그만큼 그것은 피사체의 근처에 바싹 붙어 있다. 혹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먼발치에서 그 찰나의 이미지를 포획하기 위해 오랜 시간 매복하고 있다 마침내 사냥꾼처럼 피사체를 덮친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그 사진의 면목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여기저기에 있었고, 마침내 사진기자는 인터뷰를 통해 그 사진의 ‘비밀’을 말해주었다. 그는 “300여m 거리가 떨어진 곳에서”, “600mm 망원 렌즈”를 장착한 “캐논 1DX 카메라”에 “2배율 텔레컨버터를 끼우고 모노포드를 사용해 고배율 망원경을 틈틈히 사용해 가면서 조사실의 분위기를 살피며 5시간 동안 뻗치기를 하며 총 3번 우병우 전수석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고 밝혔다. 그 결과 그는 모두 9백 컷의 사진을 찍었고 그 가운데 1백여 컷 남짓을 건졌다고 했다. 그로서 우리는 그 사진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사진 읽기 이후의 사진 ‘보기’의 한 가지 징후를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중적이다. 먼저 사진은 더 이상 읽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진은 텍스트라기보다는 곧장 (사진 찍힌) 대상의 표정이 된다. 사진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세계의 한 조각을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의 프레임 안에 갇힌 채 제시되는 피사체와 그 배경 너머에 외부가 있음을 떠올리는 것, 자폐적인 표면을 넘어 너머의 세계를 암시하거나 비유하고 있다는 상상이나 충동을 길어내는 것은, 더 이상 사진을 보는 것에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사진은 사진이라는 동어반복은 사진으로부터 읽기를 가능케 하는 잠재적 세계를 제거하며 사진을 읽는다는 노고를 거절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진의 비밀을 풀기 위해 사진을 이미지의 세계의 편에서가 아니라 사진을 찍은 자의 편에 놓는다. 어떤 카메라로, 어디에서, 어떻게 찍었을까 하는 궁금증은 사진이 누리게 된 새로운 비밀이다. 물론 그런 비밀을 캐는 것이 아무 쓸모없는 짓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읽힐 이미지로 여기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진에 접근하는 몸짓은 놀랍게도 그런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에서도 나타난다. 얼결에 정기구독을 하게 된 어느 진보적 시사주간지는 판형도 크지만 사진잡지라고 여겨도 좋을 만큼 사진으로 가득 하다. 나는 그 사진들을 볼 때마다 어쩔 줄 모를 심정이 된다. 정치정세를 분석하고 사회운동이 나아갈 바를 밝히겠다는 글이나 노동자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고발하는 글마다 애꿎게 사진이 비집고 들어와 너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기사나 칼럼과 협력하는 텍스트의 일부라기보다는 그로부터 독립한 사진 자신임을 고집한다. 더욱 특이한 점은 잡지의 여러 면을 털어, 마치 유행하는 에세이영화(essay film)처럼, 사진들 자체가 에세이인 듯 많은 페이지를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난주에 도착한 호에는 담벼락 앞에 놓인 낡은 곰 인형, 담쟁이 덩굴 아래에 놓인 낡은 소화기, 반쯤 잘려나간 나이든 경찰관의 얼굴, 길바닥에 놓인 반쯤 먹다 만 복숭아 조각, 바닥에 버려진 시위용 찌라시, 벤치의 가로대 사이에 끼인 맥주 깡통, 뒷짐 진 채 선 갓 쓴 노인의 뒷모습 등이 서로 다른 사이즈로 페이지의 반면 혹은 지면 가득을 채우고 있다.

 

이 사진들은 무엇일까. 현실의 비판적 분석과 읽기를 위해 제작된 이 잡지에 실린 지나치다 싶으리만치 도열한 사진들을 보고 나는 또 가벼운 멀미를 느낀다. 이것은 읽기를 위한 텍스트라기보다는 어떤 분위기 혹은 기분으로서의 세계를 나타내는 것 아닐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객관적 세계를 읽는 주체의 이성이라는 구분에 저항하며, 주체도 객체도 아닌 것으로서의 세계를 말하기 위해 존재라는 개념을 고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따른다면 우리는 현실을 읽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stimmung, mood)로 체험한다. 그렇다면 사진은 분위기를 전달하는 힘의 전동벨트일까. 아마 오늘날 사진은 그런 합의에 이른 듯이 보인다. 사진은 세계에 대하여 말하기보다는 세계를 ‘열어-밝히는’ 존재의 기분을 전하려 애쓰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사진과 현실의 변증법을 존중하는 내게 그런 합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연히 서가에서 끄집어낸 책에서 세쿨러의 분위기 없는 그러나 명철한 사진을 읽으며, 세상을 떠난 그가 그립다.

_사진잡지 Vostock을 위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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