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느 테레사의 미니멀리스트 댄스를 2018년 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RE:ROSAS

– 미니멀리스트적인 조각으로 가득한 미술관을 떠나 안느 테레사의 공연을 보는 것은 레트로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 빈티지 소비에 참여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들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느 테레사의 무용사적 아카이빙 작업에, 그렇게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끈 무용 컴퍼니인 <로사스 댄스 로사스>가 몇 해 전 LG 아트센터에서 공연했을 때, 무용에 과문했던 나는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난생 처음 조우한 그녀의 퍼포먼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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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레트로 미니멀리즘의 쓸쓸한 재미

BEACH HOUSE – DARK SPRING

– 아트선재센터의 <포인트카운터포인트> 전시에 대한 간단한 메모

&lt;포인트카운터포인트>는 저 먼 나라의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을 흉내내는데 열심인 동시대 포스트-조각에 익숙한 이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재미난 전시였을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조각 이후의 조각을 실행했던 미니멀리즘 혹은 그것의 원리에 동승한다. 미니멀리즘은 거의 모든 것이 조각과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칼 앙드레이든 로버트 모리스이든 리처드 세라이든 그들은 모두 조각 이후의 조각을 위해 애썼다. 미술사의 표준적인 서사는 형태나 오브제로서의 조각으로부터 순수한 공간적 지각의 경험이 미니멀리즘의 모두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표준적인 서술이 허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엔 더욱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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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18.

– 어쩌면 루카치의 재림일지도 모르겠다며 존경했던 모이시 포스톤 Moishe Postone이 오늘 영면했다. 심란하기 그지 없는 마음을 달래려 힘든 때면 찾아보던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뒤지다, <동년왕사>를 보던 중에 그의 부고를 들었다. 그는 20세기 후반 영어권에서 활동한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한 명임에 분명하다.  그의 제자였던 누군가가 메일로 자신의 새 블로그 내용을 알린 뒤였다. 그의 글을 전한다. 포스톤,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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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11.

BEACH HOUSE – LEMON GLOW

며칠 전 미투운동에 관해 쓴 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나에게 다시금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 것은 폭력 혹은 폭력성이란 쟁점이다. 나는 폭력 비판으로 모아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에 대하여 집요할 만큼 비판하여 왔던 편이다. 이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폭력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접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폭력으로 경험되지 않는 구조적 폭력을 대신해 인격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폭력의 전부로 환원하는 발상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적대적인 구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모든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되고 비난받는 것은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폭력은 필요하며 또 불가피할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을 차별화할 필요 때문이다.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자유주의자의 협박에 맞서 악마에 대한 증오로서의 폭력과 적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폭력을 나눌 수 있을까, 폭력이 겨누는 대상이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폭력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주체는 테러리스트나 광적인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해방적인 주체 역시 소속되는 것 아닐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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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연구> “68 운동” 50주년 특집

 

2018년은 1968년의 ‘운동’의 뜨거운 폭발로부터 50년째 되는 해이다. 이미 유럽에서는 68 운동을 둘러싼 열띤 논쟁과 그를 결산하려는 시도들이 계속되어 왔다. 68 운동은 현대사의 연구의 중요한 주제로 자리잡았고 또 이를 다룬 책들도 다수 소개되고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68 운동은 여전히 새로운 기억을 촉구하며 그것이 남긴 유산과 과제를 재평가하도록 이끌고 있다. 68운동은 ‘신좌파’의 출현, ‘네오-마르크스주의’의 등장, 새로운 사회운동의 대두 등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68운동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와 정치제도에 대한 비판과 거부을 주도했던 프로그램인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정치에 각별한 의미가 있다. 68운동은 그것을 비판하고 개조하고자 한 시도들이 다투어 각축을 벌인 역사적 실험의 무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68운동은 자본주의 비판을 사고하고자 하는 이론적 실천이나 정치적 기획에 있어 피할 수 없는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68운동의 혼란스러운 성격은 또 다른 접근을 허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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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과 불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세계

Maximum Joy – Stretch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 사이의 오랜 불화가 종결되었다는 징후는 그들이 모두 악이란 개념을 향해 줄달음쳤다는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의 지적 인플레이션은 조지 부시의 악명 높은 ‘악의 축’ 선언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물론 그것은 동어반복에 가까운 진부한 말장난이다. 테러지원국을 지칭하고자 창안된 개념인 악의 축은 이미 테러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적인 적을 악의 울타리 안에 놓기 때문이다. 테러는 폭력이란 비유를 통해 정치적 행위를 선제적으로 윤리화한다. 윤리적 악당으로서의 적이란 시점은, 지구화 이후 미국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국가들을 가리키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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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사 이후의 유토피아적 기억 – <옥토버>의 분투(奮鬪)

 

독일관념론의 위대한 유산이 죽은 개 취급을 당하게 된지 오래지만, 그 유산 목록 가운데 가장 철저하게 추궁을 당하고 금지당한 관념은 보편사(universal history) 혹은 세계사일 것이다. 근대철학 자체와 같은 것으로 알려진 계몽적인 이성이나 데카르트적 주체를 구원하거나 그것의 죄를 경감하려는 철학적인 시도들은 제법 시끌벅적하게 시도된 편이다. 그러나 보편사란 개념만큼은 눈곱만큼도 구제받지 못한 채 새로운 이론적 기소자들을 충원하여 왔다. 얼마 전부터는 탈식민주의적인 저술가들이 그 대열에 합류해 헤겔적 보편사를 심문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하곤 했다. 모두 보편사란 개념을 향한 적의로 똘똘 뭉쳐있는 듯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니다. 비록 많은 단서를 단 조건 하에서이지만 수전 벅-모스는 그의 도발적인 논문을 확장한 신작 헤겔, 아이티, 보편사에서 보편사란 녹슨 개념을 숫돌에서 벼리는 도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직 파문당한 관념인 보편사란 관념이 조만간 귀환할 것인지 여부는 불투명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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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로지스틱스의 도시, 자카르타와 방콕

물류 자본주의 이후의 도시

얼마 전 우연찮게 세계에서 가장 교통 체증이 심한 두 도시를 잇달아 찾을 기회가 있었다. 두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교통 체증이 심한 도시 순위에서 1-2등을 두고 다투는 도시이다.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태국의 방콕. 나의 여정은 태국의 방콕을 경유해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로 다시 그 곳에서 반둥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반둥이었다. 그곳은 1955년 반둥회담이 열렸던 역사적인 도시이다. 나는 수카르노, 네루, 낫세르, 주은래와 같은 이름들을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는, 비동맹운동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자 제3세계라는 프로젝트가 발진한 그곳에 대한 야릇하고 조바심 나는 애착을 품고 있었다. 벼르던 그 도시를 찾겠다는 꿈을 이번 겨울엔 이룰 작정이었다. 음력 설 연휴를 앞둔 어느 날 나는 서둘러 짐을 꾸렸다. 막상 도착한 반둥에서 나를 제압한 것은, 반둥의 아시아-아프리카 거리의 아르데코 풍의 유사 식민지적 건물들과 그 사이에서 초라하게 뙤약볕을 견디고 있던 아시아-아프리카 회담이 열린 곳을 재단장한 박물관만은 아니었다. 이 도시들의 끔찍한 인프라가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이미 나는 그곳을 찾기 전 인도네시아 현대사에 관한 책을 여럿 읽었고, 무엇보다 인도네시아 도시의 참혹한 생활 환경을 두고 쏟아진 개탄과 저주, 고발에 익숙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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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

Norman McLaren – Pen Point Percussion

좌파세력을 후려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접두어로 21세기 한국의 정치적 형세를 상징하는 낱말이다. 종북은 종북 좌파 세력이라는 발언 형태로 등장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북이란 좌파를 가리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이를테면 과거에 유행했던 용공 좌파란 말을 동시대 버전으로 업데이트한 것이 종북 좌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좌파 내부에서 종북으로 지칭되는 정치세력을 견제하고 비판하기 위해 좌파 세력 스스로 만들어낸 말임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80년대의 급진적인 정치운동을 이끈 주된 세력인 민중민주파와 민족해방파 가운데 민족해방파의 일부를 가리키고자 사용된 종북이란 용어는 훗날 통합진보당의 해산과 그 정당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정치가들과 활동가들의 구속과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종북은 극우 보수세력이 자신과 대립하는 정치세력을 지칭하기 위해 주문처럼 사용하는 낱말이다. 또한 현실에 좌절을 느끼며, 말로만 변화를 부르짖을 뿐 아무런 이렇다 할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환멸 하는 ‘일베’ 류의 낙오자적 청년집단이 즐겨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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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잃은 세계의 기억 : 임흥순의 작업에 관한 메모

Damon & Naomi – Song to the Siren

사례로서의 임흥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영국의 철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는 제법 오랜 동안 철학의 무대에서 물러나 있던 관념, 역사철학을 다시 끄집어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행했던 강의 노트와 이른 죽음으로 미처 출판되지 못한 원고를 모은 책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이 저작은 20세기 역사학을 뒷받침하는 기초적 관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 책은 오늘날 더 이상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그의 기억에 대한 적대 때문이다. 그의 생각에서 가장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사변을 꼽자면 이런 것일지 모른다.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반성이다. 왜냐하면 반성이란 사고행동에 대한 사고이며 모든 역사적 사고는 언제나 그러한 사고라는 것을 이미 보아왔다. … 이 문제는 기억이나 지각에 대한 역사가 성립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 R. G. 콜링우드, 서양사학사: 역사에 대한 위대한 생각들, 김봉호 옮김, 탐구당, 2017, 4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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