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의 우울은 내게로 옮겨집니다. – 렌 항 任航에게

Metronomy – The Upsetter

당신이 세상을 떠난 그날, 당신이 살던 기이한 세계, 아마 당신을 알고 지내던 이들이라면 모두 당신을 처음 조우하고 또 그 후에도 당신을 알기 위해 항상 찾던 곳인 디지털 가상공간에서, 나 역시 당신의 부음을 들었답니다. 먼저 페이스북에서 전 당신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하는 제 친구들의 잇단 피드를 보았지요. 일본에서 게이 포르노 배우기도 하고 퀴어 독립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이마이주미 씨(氏)는 당신의 사진집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고 당신의 영면을 기원했습니다. 지난 해 유명한 미술전문 출판사인 타셴(Taschen)에서 출판한 책이지요. 렌항, 당신의 이름 뒤에 R.I.P(Rest In Peace)이란 가까이하고 싶지 않는 낱말이 함께 짝을 이뤄,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제 시야에 출몰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다운 장례식과 당신다운 추모였겠지요. 저도 당신을 처음 해후한 것은 핀터레스트(Pinterest)인가 하는 인터넷의 소셜 미디어 채널 가운데 하나였지 싶어요. 당신의 이미지를 위한 아주 적절한 플랫폼이겠지요. 그리고 나 역시 언젠가부터 알게 된 텀블러(Tumblr)의 당신 페이지를 이따금 찾곤 합니다. 이제 그것은 영원히 업데이트되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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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코뮤니즘은 어떠신지요

KLEENEX – Nice

구소련의 흐루쇼프 시대에 이런 농담이 유행했다고 한다. 지난해 이름을 떨친 저 유명한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 못잖은 컴퓨터가 소련에서 개발되었던 모양이다. 인공지능 컴퓨터가 사회주의 나라에 왜? 물론 컴퓨터 없는 사회주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경제를 계획하고 조직하는 데 따르는 수많은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 데 필수적이다. 마침 스탈린주의 적폐에서 벗어나 인간적 사회주의를 꿈꾼 흐루쇼프는 그 대단한 인공지능 컴퓨터가 얼마나 대단히 똑똑한지 알아볼 작정으로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침침한 미래를 감출 요량으로 공상과학은 물론 미래학을 금지했던 스탈린과는 다른 그였지만, 그 역시 그리 앞서 나간 것은 아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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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경험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자오량의 <고소>에 관하여


赵亮-上訪 Petition

踏遍靑山, 問計人民
청산을 다니며 인민에게 계책을 묻는다.

계시와도 같은 영화들

얼마 전 중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조망하는 또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달리 19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한 사회참여적 독립 다큐멘터리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이 책의 저자인 댄 에드워즈(Dan Edwards)는, 서두에서 자신의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예기치 않은 계기를 술회한다. 그는 홍콩국제영화제의 프레스룸에서 작은 TV 화면으로 자오량(赵亮, Zhao Liang)의 다큐멘터리 작품 <고소(上访 Petition)>을 보았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본 이라면 누구나 뇌리에서 떨치지 못했을 한 고통스러운 장면을, 그 역시 마주했던 순간을 전한다. 그가 보았던 장면은 어느 노구의 고소인들이 자신을 쫓는 이들을 피해 달아나다 기차에 치여 온 몸이 산산조각 난 후의 모습이다. 그의 사체를 수습하기 위해 주변의 고소인들은 철로를 누비고, 철로에 끈적하게 붙어있는 그의 살점, 머리 조각을 찾아내다 결국 바닥에 뒹굴고 있던 손가락 하나를 주워든다. 몇 년간 중국 정부가 소유했던 월간 잡지에서 일하던 댄 에드워즈는 자신이 매일 북경의 거리를 오가며 감지했던 불편하고 음산한 느낌의 정체를 설명해주는 한 영화와 마주쳤다. 개혁과 개방 이후 무서운 기세로 발전하고 있는 중국, 그것도 수도인 북경의 거리를 거닐 때마다 곧잘 맞닥뜨려야 했던 남루한 행색의 겉도는 이들의 모습에서 그는 마치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소>는 번영하고 있는 표면의 현상 뒤앙에 놓인 중국 동시대적 상황의 숨겨진 구석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나의 중국 다큐멘터리 세계에 대한 열광과 몰두는 그 첫 상영을 통해 굳어졌다.” Dan Edwards, Independent Chinese Documentary: Alternative Visions, Alternative Publics, Edinburgh: Edinburgh University Press, 2015, p.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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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존재론적 전환이란 게 가능할까

RAT FILM (Theo Anthony dir.)

지난 십여 년간 동시대 철학을 급습하여 성가를 높이고 있는 존재론적 전환(ontological turn)은, 다큐멘터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런 물음은 너무 성급한 것일까. 혹은 비평이나 이론에 눈독을 들인 이들이나 즐겁게 곱씹을 주변적인 질문일까. 그것을 너무 뜬금없는 물음이라 치부하기엔 이미 주요 미술 전시를 석권한 작업들, 무엇보다 영상 작품들은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말해준다. 몇 해 전부터 영상 전시를 찾을 때면, 혹시 알아보지 못할 관람자들에게 충고라도 하듯이 자신이 존재론적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얻었음을 밝히는 작품과 마주칠 일이 잦아졌다. 이를테면 201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마주하게 된 영상작품 가운데 하나는 작품설명에서 작가 자신이 객체지향적 존재론(OOO: Object-Orietned Ontology)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버젓이 역설한다. 마리에 쾰백 이워슨(Marie Kølbæk Iversen)의 거울 치료(Mirror Therapy)란 작품이 바로 그런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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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정치적인 문자들

Jim O’Rourke – Simple Songs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인 2013년 겨울, 나는 어리둥절한 낯빛을 띤 그렇지만 또 조금은 스스로를 으쓱해 하는 듯한 희미한 웃음을 얼굴 가득 품은 제자들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언제 들어섰는지 모를 스케이트장이 시청 앞 광장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리 집회라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을 아이들을 거기로 불러낸 것은 얼마 전 고려대학교에 나붙은 대자보 때문이었다. 줄여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혹은 더 줄여 그저 “안녕들 하십니까”로 알려진 그 대자보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버린 세상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한 대학생이 붙인 것이었다. 2013년 12월 10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던 주현우란 학생은 대학 후문에 그 대자보를 붙였고 이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 신문은 이러한 뜨거운 반응과 대화를 두고 ‘안녕 세대’란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수상한 시절에 어떻게 우리가 안녕들 할 수 있을지 되뇌며 친구들에게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 묻는 이 대자보가 왜 그토록 큰 호응을 받았는지 그 연유를 짐작해 보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회학적인 분석, 그즈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세대론적인 담론을 가볍게 들먹이며 그들이 처한 고통과 비참이 그 발언에 전광석화처럼 반응하게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안녕들하십니까 만큼의 효과를 촉발하는데 이르지 못했는지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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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사실이 뭐 어때서


David Fenech ‎- D’Une Illogique Placable

‘대안적 사실’이란 낱말이 어쩌면 내년 즈음 대기업 시사 상식 시험 문제로 출제될지 모를 일이다. 잽싸게 시사상식사전에 오른 이 낱말은, 트럼프 대통령 이후의 세계에 대한 풍자화처럼 보인다. 사실을 둘러싼 증언이 경합을 벌일 때 달리 증언된 사실을 가리키고자 만들어졌다는 전문 법률 용어라는 대안적 사실이란 용어는 졸지에 흔치 않게 듣는 시대의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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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


Billy Bragg – The Internationale

“사회적 긴장관계들의 저 건너편에서 존재론적인 즉자존재로서 자신을 주장하는 한,
음악은 이데올로기이다.”

“그리고 우리는 절규한다. 혁명은 죽었다! 혁명 만세!”

노래하지 않는 역사

1980년대 후반, 종로나 영등포의 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들은 시위에 참여할 이들을 부르는 구호를 외치고 곧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근처에서 딴전 피우듯 눈길을 던지던 이들은 노래를 이어 부르며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와서 모여 함께 하나가 되자,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로 시작되는 <흔들리지 않게>이기 일쑤였다. 그 노래는 어쩌면 연행될지 모를 불안, 미리 누설된 정보로 들이닥칠 경찰에 대한 염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그 순간에도 계속되어야 할 투쟁에 대한 다짐을 전송하였다. 그것은 여기에 모인 그들의 노래였으며, 함께 할 미래의 누구와 함께 되는 하나를 예언하는 노래였으며, 놀라운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투쟁을 간청하는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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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와 사회”, 어게인


James Brown – It’s a Man’s World(Paris 1967)

“그의 노동은 경험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밀봉 처리되어 있다.
즉 그의 노동에서 연습은 그 권리를 상실했다.
놀이공원에서 다양한 놀이기구를 통해 표현되는 것은
비숙련공이 공장에서 받게 되는 기계적 훈련을 시험해 보는 것에 불과했다.
… 포의 텍스트는 야만성과 규율 사이의 진정한 상관관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묘사하는 행인들은 마치 기계장치에 적응되어 단지 자동적으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의 행동은 충격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이다. ‘서로 부딪힐 경우 사람들은 자기를 밀친 상대방에게 깊숙이 머리 숙여 인사했다.” W. 벤야민,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외, 김영옥, 황현산 옮김, 길, 2010, 218쪽.(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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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찮은 일일까? 잘은 모르겠다. 2017년이라는 한 해는 한국에서 문학 저널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숨 가쁘게 바뀐 해이다. 어떤 역사적인 풍파에도 끄떡없던, 아니 아랑곳하지 않던 문학잡지들이 거듭나거나 변신을 꾀하는 시늉을 했다. 세계의 문학은 릿토르 Littor라는 격월간지로 변신하였고, 문학과사회는 재 창간에 가까운 혁신을 꾀하였고, 문학동네는 새로운 편집진을 꾸림으로써 이전과 다른 문학 저널로 변신하고자 했음을 기별하였으며, 창작과비평은 제3문학이라는 자매지를 창간함으로써 어쨌든 새로운 문학저널리즘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부응하고 있음을 피력했다. 문학잡지를 챙겨보는 일이 시들해진 내게도 이런 동정이 알려질 정도라면 문학 저널리즘에 가까이 있는 이들에겐 큰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신의 풍경은 대중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진 일이라 그것을 달리 복기하는 짓은 불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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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만들어내는 민주주의

다카다 와타루(高田渡)-자위대에 들어갑시다 自衛隊に入ろう
반전포크송,  1969 포크캠프(フォークキャンプ)

출구조사가 발표되면 본격적으로 시작될 개표 방송을 즐기자며 친구들과 먹고 쓰러질 만큼 넉넉히 술을 사고 안주를 골랐다. 그렇지만 출구조사가 발표되고 후보들의 동정을 전하는 화면을 보면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기분이 눅눅해지는 눈치가 완연했다. 심드렁하게 몇 마디를 하고는 다들 딴전을 피우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를 거들며 따분한 기분에 술만 홀짝였다. 그토록 괴물 같은 정치집단이 몇 달 먼저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정신 건강 상 좋은 일었다. 그러나 딱히 유쾌한 일이 일어난 척 시늉할 필요도 없었다. 눈치껏 술자리는 일찍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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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빈더처럼 a la Fassbinder

Fox and His Friends (1975) – Rainer Werner Fassbinder

<폭스와 그의 친구들 Faustrecht Der Freiheit>은 파스빈더 스스로 우둔한 프롤레타리아 게이 주인공 역을 맡아 연기하고 또 감독했던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아하고 세련된 중간계급 게이가 복권당첨으로 벼락부자가 된 게이를 등쳐먹고 버리는, 어쩌면 신파적인 게이 멜로이다. 할리우드의 멜로 황제인 더글라스 서크를 사숙했던 파스빈더의 작품 가운데, 아마 이 영화는 가장 신랄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파스빈더 식으로 살겠다고 재차 다짐한다. 그래서 “파스빈더처럼 à la Fassbinder”이다. 그는 계급과 사랑, 섹스, 섹슈얼리티를 파고드는 갈등과 불화, 적대를 탐색한다. 단 정체성에 대한 지루한 농담은 거기엔 없다. 소수자로서의 자기동일성을 단언하기에 바쁜 오늘날의 정체성 정치를 쳐다보자면 비동일성을 만드는 대립에 골몰하는 파스빈더의 영화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냉정한 야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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