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 스펙터클 그리고 이미지 ‘비판’

Beach House – Black Car

기억과 기념이 역사적인 의식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눈여겨 본 이들에겐 상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을 대신해 기억학(memory studies)이라는 학문이 부상한 것이나, 역사적 경험이 놓였던 자리에 트라우마, 국가폭력, 애도 등이 기세를 떨치는 것이나 모두 역사의 상실 혹은 패주를 가리키는 징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인 시간성을 의식하고 비판하는 것을 자신의 일차적인 소임인 줄 알았던 미술적 근대성 자체가 패주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예술, 그 가운데서도 시각예술은 처음부터 자신을 ‘모던’ 아트라고 명명하며 자신의 역사적 시간성을 모든 실천 속에 기입하는 기염을 토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동시대’, ‘당대’, ‘컨템포러리’ 예술같은 낱말로 슬며시 대체되었다. 이런 추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둘러싸고 여전히 분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지간한 합의가 있다면 그것은 미래라는 시간이나 유토피아적인 정치 기획을 둘러싼 적의,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회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카이브적인 실천 혹은 전시의 범람, 역사적 건축 유산을 기억의 경험을 상연하는 장소로 둔갑시키는 전시시설이나 제도의 성행 등은 어쨌거나 반(反)역사라고 불러도 좋을 추세에 모두 깊이 연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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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적이라기엔 한참 모자란 음모 다큐멘터리

사회진보연대라는 이름의 진보적 사회운동 단체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오늘보다>가 있다. 나는 그 잡지의 정기구독자이다. 배달된 지난 5월호를 보다 적잖이 놀랐다. 그 달치에 이례적이라 할 “여는 글”이 실렸던 탓이다. 편집자 노트쯤에 해당될 글에서 편집실장은 마침 개봉해 관심을 모은 어느 한 다큐멘터리를 상대한다. 그리고 그 작품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털어놓으며 그 작품이 의지하고 있는 음모론에 대한 이의를 적는다. 글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고의침몰설’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또 있다. 아직도 이 사건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몰과 구조 실패, 이후의 국가 탄압까지. 2014년 4월 16일 하루가 아니라 전후(前後) 몇 년에 걸친 이 참사의 과정을 우리는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침몰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으며, 그 의도를 감추기 위해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했다는 답은 너무나 쉬운 답이다. 음모론이 확산되고 있다면 그 배경에는 답을 쉽게 찾으려는 우리의 게으름과 무능도 있다. 이를 잊어서도 안 된다.” 박상은, 세월호에 대한 어떤 쉬운 답 <그날, 바다>, 오늘보다, 2018년 5월호, 1쪽.
어느 다큐멘터리 작품이 음모론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된다. 이는 흥미로운 사태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다큐멘터리가 처한 형세를 생각해보자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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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

Metronomy – The Look

어제 오랜 만에 다시 본 크리스 마커의 <태양 없이>에서, 다시 그 나고야 사내의 이야기가 다시 들렸다. 애인과 헤어지고 그 슬픔과 고통을 잊기 위해 나고야에 사는 그 사내는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고 그는 전자분야의 직장에서 제법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이듬해 봄 자살을 하고 만다. 그는 다른 모든 걸 견딜 수 있었지만 봄이란 낱말 만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커는 유럽인이 수사적인 형용사를 많이 쓰는 반면 일본인은 하이쿠에서 보듯이 낱말 그러니까 명사나 동사 같은 것에서 직접 어떤 정서적인 힘을 느끼고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요즘 유행하는 표현을 빌자면 말의 정동(affect)일 것이다. 봄. 그러나 그 말은 편의점에 붙은 광고에 적힌 <나, 이제 설레나 봄> 따위의 봄이란 낱말 앞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어느 말도 상품을 위한 인질이 되길 피할 수 없는 말들의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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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의 재미와 교훈

Itsuroh Shimoda – Everybody Anyone (1974)


자기-패러디로서의 퍼포먼스

1. 율리안 헤첼의 <베네팩토리>는 동시대 예술의 동시대성을 구성하는 미학적 원리를 추궁하고 풍자하는 코미디 퍼포먼스이다. 비록 관객들은 떠들썩하게 웃지 않았지만 말이다.

2. 헤첼은 자신의 렉처 모두에서 노골적으로 동시대성의 으뜸가는 미학적 원리인 <현존 presence>을 비웃으며 시작한다. 설치와 더불어 동시대 예술의 양대 장르로 부상한 퍼포먼스의 인기 뒤에서, 그는 현존(성)에 대한 애착을 발견하고 조롱한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재/현(re-presentation)의 비판으로서의 미술, 즉 반미학적 예술과 <동시대> 예술이 자신을 구분하는 결정적 간극이다.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의 냄새를 풍기는 그리고 그의 재현(표상) 비판으로서의 철학을 상기시키는 진정성, 직접성, 본래성, 고유성, 지금-여기-있음, 현존재, 함께-있음(Mit-Sein) 등등은 퍼포먼스가 애호하는 미학적 긍지이자 격률이다. 헤첼은 그것을 교활하면서도 신랄하게 비웃는다. 그의 작업이 사회사업가를 흉내내는 그저 그렇고 그런 작업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시큰둥하게 무대를 지켜보던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입안에서 가득 군침이 돌았다.(아브라모비치에 대한 야유는 얼마나 애교스럽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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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8.

Sufjan Stevens – Visions of Gideon

계속된 몸살로 옴짝달싹 못한 채 누워있다, 바람이라도 쐴 겸 영화를 보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다. 멜로라면 가장 거리가 멀 듯 뵈는 제자가 강추한 멜로란 것도 이 영화를 볼 의지를 북돋웠다. 오프닝 크레딧에 각본 제임스 아이보리를 확인했을 때, 나는 얼추 무엇을 볼지 예상할 듯한 확신이 들었다.(확인해보니 그는 이 영화의 각본으로 오스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보리 형제의 <모리스 Maurice>를 이미 보았던 이라면 이 영화에서 그것의 흔적을 뻑뻑하게 느꼈을 것이다. 어쨌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랑의 윤리에 천착하는 근년의 멜로 영화 가운데 제법 좋은 작품으로 기억될 장점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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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5.

어느 매체로부터 더 이상 글을 싣고 싶지 않다는 통화를 나누었다. 다음에 쓸 글의 주제를 뭐로 하면 좋을지 의논하려 말을 꺼냈다 말문이 막혔다. 망원사회과학연구실 멤버시죠? 누군가 외압을 넣었을 것이라는 참담한 상상은 하고 싶지 않다. 이미 다른 이는 문제를 제기해 자신이 활동하던 곳에서 물러난 바 있다. 유령계정을 만들어 익명으로 험구와 모욕적인 언사를 늘어 넣고 공유하기를 하는 짓도 우습다. 솔직히 모든 짓이 웃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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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테레사의 미니멀리스트 댄스를 2018년 봄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본다는 것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RE:ROSAS

– 미니멀리스트적인 조각으로 가득한 미술관을 떠나 안느 테레사의 공연을 보는 것은 레트로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 빈티지 소비에 참여하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을 들게 하는데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느 테레사의 무용사적 아카이빙 작업에, 그렇게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끈 무용 컴퍼니인 <로사스 댄스 로사스>가 몇 해 전 LG 아트센터에서 공연했을 때, 무용에 과문했던 나는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난생 처음 조우한 그녀의 퍼포먼스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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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그 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레트로 미니멀리즘의 쓸쓸한 재미

BEACH HOUSE – DARK SPRING

– 아트선재센터의 <포인트카운터포인트> 전시에 대한 간단한 메모

&lt;포인트카운터포인트>는 저 먼 나라의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리즘을 흉내내는데 열심인 동시대 포스트-조각에 익숙한 이들에겐, 향수를 불러일으킬만한 재미난 전시였을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조각 이후의 조각을 실행했던 미니멀리즘 혹은 그것의 원리에 동승한다. 미니멀리즘은 거의 모든 것이 조각과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칼 앙드레이든 로버트 모리스이든 리처드 세라이든 그들은 모두 조각 이후의 조각을 위해 애썼다. 미술사의 표준적인 서사는 형태나 오브제로서의 조각으로부터 순수한 공간적 지각의 경험이 미니멀리즘의 모두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표준적인 서술이 허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엔 더욱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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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18.

– 어쩌면 루카치의 재림일지도 모르겠다며 존경했던 모이시 포스톤 Moishe Postone이 오늘 영면했다. 심란하기 그지 없는 마음을 달래려 힘든 때면 찾아보던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뒤지다, <동년왕사>를 보던 중에 그의 부고를 들었다. 그는 20세기 후반 영어권에서 활동한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한 명임에 분명하다.  그의 제자였던 누군가가 메일로 자신의 새 블로그 내용을 알린 뒤였다. 그의 글을 전한다. 포스톤,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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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11.

BEACH HOUSE – LEMON GLOW

며칠 전 미투운동에 관해 쓴 글을 두고 많은 이들이 불만을 제기했다. 그 가운데 나에게 다시금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 것은 폭력 혹은 폭력성이란 쟁점이다. 나는 폭력 비판으로 모아지는 오늘날의 정치적 상상에 대하여 집요할 만큼 비판하여 왔던 편이다. 이는 폭력을 투명한 악으로 간주한 채 폭력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거하고 억제해야 할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접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폭력으로 경험되지 않는 구조적 폭력을 대신해 인격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을 폭력의 전부로 환원하는 발상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적대적인 구조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모든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되고 비난받는 것은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폭력은 필요하며 또 불가피할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을 차별화할 필요 때문이다. 모든 폭력은 나쁘다는 자유주의자의 협박에 맞서 악마에 대한 증오로서의 폭력과 적에 대한 대항으로서의 폭력을 나눌 수 있을까, 폭력이 겨누는 대상이 무엇으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폭력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주체는 테러리스트나 광적인 인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며 해방적인 주체 역시 소속되는 것 아닐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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