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씨에게

아웃팅반대 캠페인을 고통에 대한 저항이란 평범한 의미에서 놓고 보자면 그건 당연하고 또한 정당한 일입니다. 그것을 비판한다고 그러므로 아웃팅에 따른 고통을 외면한다고 떠드는 것은 무례하고 또한 유치한 비난입니다. 그러나 아웃팅을 겪어 고통을 겪는 사람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과 아웃팅을 당하지 않고 제 스스로 홀로 있을 수 있는 권리(이것이 저 유명한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커밍아웃을 자기결정의 권리란 이름으로 곡해하는 것은 웃긴 일입니다. 커밍아웃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삶이 사회적으로 결정되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회사나 학교에서 내가 레즈비언이요 고백하는 것을 커밍아웃이라고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커밍아웃을 권리의 취득을 위한 불가피한 조건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서구사회와 달리 한국사회에서 커밍아웃은 권리의 취득과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는 동성 섹스 파트너와 거리낌없이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지난 10년간 거의 신속하게 실현되었습니다. 따라서 커밍아웃이란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삶이 천하거나 나쁜 것이 아님을 인정받으려는 사적인 윤리적인 선택에 가깝습니다. 만약 지금 성장하고 있는 젊은 세대의 레즈비언, 게이들이 장기적인 동거의 관계를 당연시하고, 직장과 학교, 공적 제도에서 자신들의 성정체성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권리의 침해에 저항할 경우 커밍아웃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럴 가능성에 반신반의합니다. 어쨌거나 현재로서는 커밍아웃이란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문제입니다. 굳이 하는 사람은 적어도 한국의 레즈비언, 게이들 사이에선 조금은 불편하고 거북한 사람으로 취급당합니다. 커밍아웃한 사람을 대단히 치하하고 용기있다고 주장하는 리버럴한 이성애자들의 말을 들으면 더욱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한국사회에서 커밍아웃은 자신의 삶이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사적인 선택 대개 윤리적인 울림을 갖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협소한 의미에서 이해와 욕구의 실현이란 뜻에서 권리란 면에서 보자면 한국 사회에서 레즈비언, 게이의 권리란 문제는 사실 불가능하거나 요원한 의제입니다. 따라서 권리의 운동이란 틀에서 성소수자 운동을 바라볼 경우 많은 레즈비언 게이 운동가들이 결국 권리와 피해의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그 탓에 핫라인을 만들어 피해자 상담을 한다거나 아니면 아웃팅에 반대 캠페인을 한다거나 그도 아니면 난데없이 아무도 관심없는 결혼 권리 운동을 제기하고 나선다거나 하는 식의 거의 울며겨자먹기 식의 운동이 난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니네 뭐 해줄까 묻는 권리의 수혜자로부터 우리는 내가 무엇 불행한게 뭐 있지 캐물어보아야 하는 측은한 처지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권리란 개념으로 주장될 수 있는 현실을 한국의 레즈비언, 게이들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실을 만들어내더라도 그것은 미국 사회와 같은 양극적인 흐름으로 나뉘게 되겠지요. 결혼할 권리를 주장하는 보수적인 게이 운동가와 문화적 시민권을 주장하는 급진적인 게이 운동가, 그러나 전자의 경우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전연 손대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한심하고 또한 반동적이지만, 후자의 경우엔 자신의 급진성을 게이, 레즈비언의 특수한 문화적 정체성의 유지와 보호에 한정한다는 점에서 퇴행적입니다. 섹스 패닉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우리는 이성애규범성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이성애적 규범에 의해 간섭당하지 않게 하겠다는 식의 주장에 머물러 버립니다. 80년대 이후 이른바 퀴어 이론이란 것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동요를 볼 때 저는 이런 우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것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던 저로서는 매우 실망하는 셈이지요.
한편 저는 이런 흐름이 비단 성소수자 운동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소수자 운동을 피해자의 권리의 운동, 이해관심의 실현의 운동으로 바라보는 독특한 정치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실 그런 욕구와 이해의 권리로서의 운동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그런 운동이 운동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을 유지하는 것도 운동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정지를 위한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한편 이는 제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바라보는 수많은 인도주의적인 운동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더 많은 인도주의적인 단체의 자선과 기부, 사회봉사보다 외채의 탕감, 세계시장으로부터 탈퇴할 권리의 인정, 호혜적인 무역 제도의 보장같은 정치적인 투쟁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주노동자의 권리란 말에서 듣는 역겨움도 그런 것이지요. 이주노동자운동을 소수자의 인권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온갖 실용적인 이유를 들어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라는 주체가 아니라 소수자라는 주체로서의 거푸집을 씌워 그들의 예외적인 지위를 규정하고 돌보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권리를 진정으로 권리를 박탈하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바 있는 “권리를 가질 권리”가 그들에겐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한 그들의 권리란 사실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을 지닌 자가 제한한 특수한 삶의 내용 안에서 살도록 한정한 그 한계 안에서 소극적이고 최소한의 권리입니다. 죄수들은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할 권리를 갖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감옥을 나갈 권리는 없습니다. 그들은 권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한계 안에서 더 나은 이해를 실현할 권리를 가질 뿐이지요. 죄라는 것을 감금, 관리, 통제, 교정 등의 복잡한 제도와 연결시키는 체제를 비판할 무제한적인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의 시민의 권리는 무제한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겐 자신의 권리를 규정하는 틀을 규정하고 선택할 권리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결국 예속당할 권리일 뿐입니다. 더 복잡하게 말하자면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불행히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권의 지위에 의해 매개됩니다. 따라서 범법자, 정신병자,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등이 소수자라 정의되는 이유는 그들이 시민권적인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경제적인 권리는 곧 정치적인 권리를 둘러싼 투쟁입니다. 아니 모든 권리를 둘러싼 투쟁은 정치적인 투쟁입니다. 결혼의 권리를 둘러싼 투쟁에서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 나타나는 기묘한 차이가 나날이 넓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의 권리는 성과 시민권을 매개하는 사회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저 유명한 부락민(즉 죽은 생물을 다루는 사람들인 백정같은 사람들)처럼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지위는 일종의 부락민에 가깝습니다. 불가촉 천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권리의 틀이란 면에서 보자면 둘은 형식적으로 같은 지위를 차지합니다. 그런 그렇다치고 부락민들을 놓고 생각해 봅시다. 부락민들은 어떻게 투쟁해야 할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부락민들은 다른 시민들이 누리는 만큼의 이해와 욕구를 실현할 권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또한 쓰여지지 않은 규칙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죽음과 삶 그리고 권리를 매개하는 상징적인 규칙을 해체하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후자는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면 후자는 죽음과 삶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는 복잡한 사회적 삶의 관습과 규칙을 흔드는 일이고 그것은 부락민뿐 아니라 “정상인”의 삶의 질서까지 뒤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말장난을 하자면 부락민의 생사의 문제의 퀴어입니다. 레즈비언, 게이가 성의 문제의 퀴어라면 말입니다.
성과 시민권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갖습니다. 이를테면 간통을 한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자녀를 가진 미혼 여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낙태를 하는 여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근대 자본주의사회에서 극렬한 논쟁과 대립을 불러일으킨 문제였습니다. 미국의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시민권 운동은 알다시피 흑인과 여성의 운동이고 후자는 무엇보다 낙태의 권리를 둘러싼 투쟁을 통해 하나의 결절점을 형성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런 문제들은 매우 안타까운 방식으로 풀리고 있습니다. 성과 시민권을 매개하는 고리(저는 이것이 굳이 가부장제라면 가부장제라고 생각합니다)를 끊어내고자 노력했던 기존의 운동은 알다시피 거의 주변화되고 있습니다. 저는 맑스주의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의 주장이 바로 성모순이냐 계급모순이냐는 식의 계산을 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성과 시민권의 문제를 매개하는 근대 자본주의사회를 해체하려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궤도에서 벗어나 최근의 많은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에게서 제가 느끼는 불편함은 성과 시민권의 매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성과 시민권이 더욱 매개되게 하는 즉 여성으로서의 권리와 남성으로서의 권리로 구분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성의 권리 대 남성의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권리 대 시민의 권리가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제가 게이, 레즈비언의 권리 대 이성애자의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게이, 레즈비언의 권리 대 시민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론 그럼 여성의 독특한 경험과 신체성은 중성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현재의 악순환에 빠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백인 중산층 여성의 여성과 흑인 노동계급 여성의 여성이 다르다는 식의 주장으로 끊임없이 주장하는 것은 정말이지 배부른 주장일 뿐입니다. 일전 어느 페미니스트 후배와 술을 마시며 울적하게 이야기하였던 한국의 일부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의 트랜스나 혼종성에 관한 주장에 느끼는 제 불편과 혐오 역시 그런 것이었습니다. 고정성과 영토성에서 벗어나 트랜스하라, 보편적인 정체성의 신화를 타도하고 혼종성을 긍정하라는 주장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멋있게 들립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항상 권리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란 점을 그들은 인정하길 꺼려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혼종성, 트랜스 따위의 것이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보편성을 통해 보증된다는 것을 망각하지요. 미국의 캘리포니아의 볕좋은 대학 캠퍼스에서 타자성과 혼종성, 트랜스를 떠들며 온갖 탈식민주의를 주장하고 자국의 민족영화에 관하여 떠드는 모습은 곧 이주할 권리, 표현할 권리, 심지어 낯선 문화를 소비할 권리 등에 의해 항상 꿰매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권리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과연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블랑카”를 두고 트랜스, 혼종성, 타자성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수많은 블랑카들이 이주노동자 단속반과 탈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추적당하는 모습은 매우 우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체 게바라가 그들의 타자성을 느끼고 탈식민지식인처럼 행세했다면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그들은 그들과 일체화되려고 노력했고 그것이 그들의 타자성을 존중하는 가장 성숙한 태도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저의 건방일까요.
쓰다보니 너무 장황하고 두서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못다한 말들은 많습니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성폭력 운동과 성매매 단속에 관한 현재의 진행방식에 깊은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성매매가 이젠 불법을 저지르는 쾌락까지 더해졌으며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성매매 단속을 해봤자 역시 성을 둘러싼 교환은 계속된다는 태도를 즐기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는 알량한 냉소주의를 보여주는 이성애자 남성의 지지까지 업음으로써 성매매는 더욱 굳건히 정착했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도 비수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제가 여성-레즈비언 주체와 게이-남성 주체로서의 성별적인 차이가 아니라 성별화시킬 수 없는 차이의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적인 통계에서 나오는 식의 그런 종적인 차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실체화된 여성으로서의 본성으로서의 차이도 아닌, 그런 차이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어쓸 시간이 열려있으므로 안심할 수 있습니다.
날이 다시 쌀쌀하고 바람도 냉랭합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자아 만세?!

– 박군의 귀띰을 받고 그런가보다 하다가 녀석이 제가 읽다만 걸 가져다준다는 걸 잊었다기에 직접 사서 읽어보았다. 오랜 만에 읽은 <씨네21>이었다. 편집장이 또 바뀌었다는 것, 컬처잼을 보강한다는 것 등을 알 수 있었고 잘 아는 필자들이 역시 그렇고 그런 지루한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씨네21을 읽은 것은 순전히 미래의 감독이란 특집 때문이었다.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감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자신에게만 소속된 인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씨네21이 알린 미래의 감독들 가운데 다수를 나는 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소개했고 그 때문에 마치 그들이 “나의 감독”인 것처럼 여기는, 정말이지 촌스럽고 오만방자한 착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외면하거나 아니면 무심히 여겼던 이들을 원망했었다. 그러니 이제 소원풀이한 셈이다. 아, 다들 그를 사랑하고 지지하는구나?!
– 이를테면 나는 태국 출신의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을 발견하고 그에게 엄청난 지지를 보냈었다. 그를 영화제에서 상영하기로 결단함은 물론 그의 영화제에서의 수상을 은근히 밀었고 결국 그가 수상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치 감독인 듯이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몇년 뒤 칸느로 갔고 그는 이제 모든 비평가들이 사랑하는 감독이 되었다. 지난해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그의 작품이 상영되었을 때 나는 결국 그를 잊지 못하고 그를 찾았고 역시 즐거운 기분에 휩싸였다.
– 그런데 가장 애매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르헨티나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미영화에 대한 나의 뒤늦은 발견을 애통해하며 로테르담에서 그들을 어떻게든 초대하겠다는 일념으로 발버둥칠 때 나는 조금 유치한 사명같은 느낌으로 매달렸던 듯 하다. 리산드로 알론소Lisandro Alonso의 <자유>나 – 나는 그를 거의 지속(duration)의 영화 감독이라고 여겼다. 그는 헐리우드적인 시지각의 해독제였던 것처럼 보였다 – 아드리안 캐타노의 <볼리비아>는 내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화제에서 그들은 외면을 당하거나 무시를 당했고 나 역시 슬프고 비통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미래의 감독으로 인정받는다. 행복하다고 해야할까 비열하다고 분노해야할까. 결국 문제는 칸느이고 국제비평계의 낙점인 걸까.
– 르쿠레시아 마르텔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로랑 깡테와 로베르 기데기엥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로랑 깡테의 사회주의에 못지않게 게디기엥 식의 사회주의 역시 지지한다. 비가 내린 뒤의 런던 어느 아트시네마극장에서 그의 <조용한 마을>을 보면서 나는 제법 울거나 심란했던 듯 하다. 은퇴한 노부부처럼 보이는 영국의 백인 커플과 그 영화를 보고 난 주섬주섬 영국의 시네마테크나 아트시네마에 관한 자료들을 사고선 근처의 커피숍에 가서 한참을 뜨거운 감상에 젖어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무슨 일이 있어도 영화제에서 소개하기로 맘 먹었다. 그는 지금 전지구적 자본주의를 영화에서 고발하는 가장 탁월한 감독임에 분명하였다.
– 영화제에서 손을 뗀 연후 나는 거의 동시대의 영화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시사회에 발을 끊은지 오래이며 개봉작은 전연 보지 않는다. 보려고 맘 먹은 것도 의욕만큼 걸음하지 않는다. 외려 낡은 영화들을 다시 보곤 한다. 그런데 문득 새로운 영화들을 발견하고 축복하는 일이 얼마나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일을 에워싼 번잡한 간섭과 허드렛일들이 싫었지만 진정 새로운 영화를 욕망하고 있었던 듯 하다.
– 자신의 글을 둘러싼 시비를 지켜보는 일은 곤혹스럽다. 난 글을 둘러싼 논쟁에서 글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자아의 풍경을 보게 된다. 마침 유명한 미국의 보수적인 사회학자인 로버트 벨라의 <미국인의 사고와 관습>을 읽다보니 그런 생각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미국의 개인주의의 융성을 살피고 표현적인 자아가 소명과 책임, 공동체를 대신하게 된 사회의 병리를 진단한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와 공리적 개인주의 사이의 미국적 논쟁(나는 신자유주의를 이런 윤리적인 논쟁으로 각색하는 방식이 곧 미국적인 것이라 본다)에서 벗어나 그의 글을 읽으면 수긍가는 대목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나의 주된 관심이 자기책임, 자기주도, 자기의존 등의 최근의 자본주의적인 노동윤리인지라 그런 대목을 눈여겨 보긴 했지만 공동체에서 라이프스타일 집단으로의 전환이라든가 하는 몇 군데의 지적은 흥미로운 것이었다. 미국의 사회학 전통이 이런 것일까. 화이트의 <조직인간>이나 래쉬의 <나르시시즘의 문화>, 밸의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은 모두 희귀한 사회학 분야의 미국 베스트셀러였다. 그 책들은 모두 개인주의를 예찬하거나 비난한다.
– 여튼 나는 우리 시대의 글쓰기를 둘러싼 이런 표현적인 자아에의 몰입이 우려스럽고 또한 지겹다. 나는 생각하고 표현하기 앞서 생각하도록 강제받고 표현하도록 압력을 받는다. 내가 놓인 자리는 나의 의견의 자리라기보다는 그 의견이 제시되어야하는 공간과 맥락의 자리이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의 표현이 아니라 나의 자유를 숨막히게 하는 타율적인 명령에 대한 수동적인 저항이다. 글이 행위인 것은 바로 이런 거부에 있을 것이다. 왜 내가 그렇게 생각하여야 하는 것인가…운운의 대듦.
– 어제 한바탕 손님을 치렀다. 딴에는 한상을 차렸고 다들 포만하여 즐겁게 놀았다. 헐레벌떡 장을 보고 음식을 장만하여 그들을 먹였다. 그런 일이 즐겁다. 어제 내놓았던 음식들은 그들의 나이 탓에 푸짐한 한식이었다. 표고버석 가래떡 볶음, 문어와 새우 다시마쌈, 돼지고기 브로콜리 볶음, 들깨 두부 구이, 그리고 우엉참나물밥 등등. 그 덕에 냉장고가 거덜났고 술병이 한 상자 분량 쌓였다.
– 박군이 이상한 소릴 한다. 진짜 혼자 있고 싶냐고 묻는다. 그런 물음은 혼자 있고 싶냐를 묻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런가에 있는 터라 답하기 애매하다. 혼자 있고 싶은 건 “지금은 일할 게 많으니 날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에서부터 “아아, 난 제 혼자 돌보는 삶이 제격이야”에 이르기까지 기분과 변덕, 반성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그러니 진짜를 답하기엔 애매하다. 그러나 기분과 변덕은 진짜가 아닐 테고 그렇다고 불만과 불편에서 비롯된 혼자 살테다의 각오를 진짜로 보기에는 그렇다. 충분한 것이 아니다. 그 답을 속시원하게 해주지 못한 채 비슷한 이야기를 얼버무렸더니 또한 당신은 그렇게 살아도 된다, 내심 나도 그런 걸 원했으며 …어쩌구 하는 반복적인 규탄과 호언장담이 이어진다. 그리곤 투정 몇 마디 더하곤 가서 잠을 잔다. 오늘은 한끼만 먹었는데 괜찮을까?…난 다시금 이런 걱정을 하고 만다. 또 언제나 둘이 있다. 둘을 하나로 떼어내기가 쉽지 않다. 불편을 무릅쓰고 하나를 위해 애쓰는 것이다.
– 그런데, 왜 이렇게 수상하게 비가 오는 걸까. 창밖을 보기가 섬뜩하다. 너무 우울해진다.

임태훈을 후원하는 모임을 제안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어있는 우리의 벗, 임태훈씨의 1심 재판이 끝났습니다. 지난 5월 15일 세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이하며 우리는 아직도 서울구치소에 갇힌 수인의 신세에 놓인 임태훈 씨를 상기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최근 많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의 재판 과정에서 나타난 불구속 수사, 보석 허가, 재판 유보 등의 흐름과는 달리 재판부의 “독특한” 재량과 판단에 의해, 실형 1년6개월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에 그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고 동성애자의 군대 내에서의 차별을 폐지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번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임태훈 씨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뜻을 한데 모으고자 합니다. 다행히 최근 서울 남부지방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 3명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헌법이 보장하는 제 권리와 합치하는 것임을 뒷받침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임태훈씨의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가 보여준 인권을 향한 참담한 인식에 대한 실망에서 벗어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 그의 평화를 향한 충정과 양심적인 결단이 보다 깊이 존중받고 그의 조속한 석방을 포함한 전향적인 판결이 이뤄지길 기대하여 봅니다. 이에 우리는 임태훈씨가 지난 재판 과정에서 겪었던 부당하고 모멸적인 대우를 지적하고 아울러 다음의 재판 과정에서 우리가 품은 기대와 희망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임태훈씨는 최후 진술과정에서 병역거부자 구속수사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던 중 판사의 제지에 의하여 최후진술이 중단되는 폭력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또한 재판부는 심리 과정에서 병역거부라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려야 했던 배경이었던 인권운동가로서의 전력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우리를 실망케 하였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 임태훈 씨의 전력에 관한 기록에 충분히 제시되었던 그의 인권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참고하지 않은 채, 그에게 “무슨 인권활동을 했느냐”, “국제사면위원회는 어떤 단체이냐”는 등의 납득키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는 재판부의 성실한 심리의 태도를 의심케 할 뿐 아니라 피고인 임태훈씨의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를 품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재판의 경과를 지켜보며 임태훈 씨의 동성애자로서의 소수적 성정체성에 관련된 편견이 재판부의 심리 및 판결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인정하기 어려운 의혹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은 헌법의 근본적인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인권의 규범에 위반된다는 것이 널리 인정받고 있는 지금, 재판 과정에서 임태훈 씨의 군대 내에서의 동성애자 차별에 대한 항의와 비판은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그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에 관한 언급과 검토를 기피함으로써 동성애자로서의 그의 특수한 지위와 입장을 무시하였습니다. 임태훈씨의 동성애자 정체성은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결단하게 하였던 중요한 이유이자 근거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그의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하는 노력을 거부함으로써 매우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알다시피 현재의 병역법은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된 상황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병역법은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상태이고 그 위헌성 여부가 아직 판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연유로 현재까지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많은 재판이 최종 판결을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로 연기하여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임태훈씨의 경우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달리 구속 수사를 받음은 물론 보석 조치까지 거부당함으로써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최근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재판부의 무죄 판결은 항소심에서 보다 전향적인 결론이 나타나길 기대하는 우리의 희망에 작은 용기를 더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임태훈씨의 예정된 항소심에서 재판부의 전향적인 접근을 기대합니다. 물론 양심적인 결단을 내린 그에게 어떤 증거 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재판부는 마땅히 보석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재판부가 그의 양심적 결단을 존중하고 평화와 인권을 향한 그의 충정을 이해하는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는 군복무에 따르는 노역과 수고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살상의 전쟁을 거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임태훈씨가 대체복무제의 도입과 개선을 한결같이 주장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체 병역 의무 이행 대상자 가운데 60%정도만이 현역병으로 복무하고, 나머지 40%는 병역특례 등 기타의 방법으로 병역을 이행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 복무가 곧 안보불안을 야기한다는 식의 주장이 전연 근거 없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안보와 반공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인권을 서슴없이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을 질식시켰던 과거의 군사독재 시대의 논리로 병역 의무의 이행을 재단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한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결단임과 더불어 안보와 국가적 이익이란 이름으로 국민을 억압적으로 지배하고 훈육시켰던 구 시대의 마지막 잔재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친근한 벗, 임태훈 씨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결단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의 조속한 석방과 군대 내에서의 어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사라질 때까지 힘차게 투쟁할 것을 다짐합니다. 아울러 그의 처지에 공감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참여와 지지를 기대합니다.
2004. 5. 24.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자 임태훈을 지지하는 동성애자들의 모임
(서동진, 중전, 달래, 승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칸 영화제로 가게되었다는 소식이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한국 영화의 개가라고 뿌듯해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문득 최근 이혼을 선언한 어느 개그 우먼 생각에 마음이 신산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는 데 정작 현실에서 여자는 남자의 동네북이기 때문이다. 사실무근이라고 남편은 주장한다지만, 사람들은 얼굴과 이름을 제일로 여기는 여자 연예인이 그런 결단을 내렸을 정도면 여염 여성들은 오죽 했겠는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를 가정 내 폭력을 보여주는 흔하고 뻔한 또 하나의 사례로 치부해서는 안될 듯 하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확대되고 또한 실제로 가장이 되기도 하면서 남자들이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자들이 이런 왜소해진 지위를 인정하기 힘들어하고 그에 따른 심리적 반동으로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게되었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일리가 없지 않다. 이미 많은 가족의 경제적 재생산 형태가 남성 가장의 임금 소득에 의존해 있지 않다. 남자들이 벌어다 준 돈으로 살림하는 여자라는 공식은 현실에서는 사라졌는데, 남자들의 뇌리에는 아직 깊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최근 높아지는 이혼율에 제동을 거는 방편으로 정부는 이혼 부부들이 반드시 의무적으로 상담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소통하며 지내는 연습을 시킨 후에 결혼할 자격을 주는 결혼인증제를 도입하자고까지 제안한다. 손쉽게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적어도 이혼이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방편인 한 그것은 결혼을 좀 더 민주화하는 장치가 된다. 그렇지만 이혼을 선택할 자유가 보장된다고 결혼이 민주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뇌리에 박힌 기억에 매달린 채 달리 살자는 요구가 곧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여기는 한, 결혼은 다시 폭력에 말려들 것이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남자의 지위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평등을 요구하는 주장을 이렇게 곡해하는 것은 결혼뿐이 아니다 최근 의회로 진출한 민노당의 평등의 요구를 부유층의 재산을 뺏는 짓이라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평등의 에토스에 무감각하다. 상생이란 말이 인플레를 일으키는데 정작 평등의 상생은 안 보인다. 왜 일까.
<서울경제신문 칼럼에 쓴 글>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자 임태훈을 석방하라

또 한 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갇혀 재판 중에 있다. 그는 성공회대학교 엔지오대학원에 재학 중인 평범한 청년이다. 그 역시 여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와 같이 자신의 윤리적 신념과 결단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라는 점에서 다른 병역거부자들과 다르다. 최근 그는 자신이 증거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음에도 구속 결정을 내린 당국의 판결에 항의해 25일 남짓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였다. 초췌한 모습으로 재판정에 출두한 그의 모습을 본 그의 벗들은 모두 안타까운 심정을 누를 길 없었다.
그의 이름은 임태훈이다. 그는 한때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활동가로서 동성애자의 인권 현실을 바꾸기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고 현재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회원으로서 역시 동성애자의 사회적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 진력하여 왔다. 또 그는 성공회대학교 엔지오대학원에 진학하여 동성애자 에이즈 감염자의 문제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최근의 탄핵 정국을 둘러싼 소란에 파묻혀 그의 고독한 양심적인 병역거부는 세인의 관심에서 벗어난 채 벌어지고 있다. 같은 동성애자로서 그리고 그의 선배이자 벗으로서 나는 그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그가 벌이는 싸움이 고독하지만은 않음을 알리기 위해 이 지면에 글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였음을 밝혔다. 아울러 현재의 병역제도 안에 포함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군복무에 적합한 적성을 확인하고 검증한다는 명분에서 이뤄지는 설문에서 성전환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이에 해당되는 이를 군복무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군복무는 남성에게 중요한 권리로 인식돼 왔다. 근년 논란이 되었던 군가산점 제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군복무는 곧 남성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인정받고 대우받도록 하는 중요한 권리의 제도였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군복무의 권리에서 배제된 성적 소수자는 취업은 물론 공직에서의 활동에 심각한 차별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미 비공식적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힌 많은 동성애자들이 일종의 심리적 이상으로 판정되어 여러 굴욕적인 대우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처지에 비추어볼 때 그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군복무를 거부한 것과 군복무를 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 그리고 군복무 중에 있는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전혀 어긋난 일이 아니다. 그는 인권운동가로서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군복무를 거부한 것이다. 또한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서 그는 군복무가 한국사회에서 성인 남성으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고 통합되는 중요한 통로임을 주지하고 있다. 따라서 군복무가 곧 성적인 소수자를 차별하는 중요한 사회적 제도임을 고발하고 비난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양심적인 병역거부자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떳떳이 밝힌 채 한국의 병역제도의 반인권성을 문제삼고 있다. 나는 이미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서 한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이 얼마나 대단한 실존적인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이 단순히 윤리적인 용기로서 치하받기에 앞서 또한 동성애자 사회가 형성되기 위한 필수적이고 피할 수 없는 행위임을 잘 알고 있다.
커밍아웃은 동성애자들이 침묵에서 벗어나 서로를 지원하고 결속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들어 커밍아웃을 반대하는 기류가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한 명의 개인적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살 권리라면 비겁하고 또한 옹졸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크고 작은 사회에 자신이 성적 소수자임을 알리는 일은 그 사회의 모든 곳에 스며 있는 이성애적인 규범과 질서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이끈다. 결국 커밍아웃은 동성애자가 자신의 거역할 수 없는 삶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에 차이를 일깨우고 변화를 촉구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굳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참여한 것은 나를 포함한 성적 소수자에게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임태훈의 투쟁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의 외로운 싸움의 벗이 될 것을 자청한다. 또한 그의 조속한 석방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더불어 군대 안에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받으며 복무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소수적 성정체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차별과 모욕을 받지 않은 채 병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복무 기준과 교육이 이뤄질 것을 요구한다. 다시 한번 밝힌다. 동성애자로서 그리고 평화주의자로서 나는 임태훈씨의 투쟁을 지지한다.
서동진/문화평론가
http://www.hani.co.kr/section-001062000/2004/04/001062000200404071925151.html

나는 동성애자이므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나는 게이 남성으로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그것은 보다 나은 삶을 향한 나의 꿈이 개인적인 소망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게이라는 나의 정체성이 나의 개인적인 욕망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동성애자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하며 만들어진 역사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는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진보적인 전망과 가치에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사회는 이성애적 가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친밀한 인간관계로 만들었다. 노동의 가치를 분배하는 제도는 언제나 이성애 가족과 결혼이었으며, 그것에 의해 우리는 삶을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탓에 이성애자와 구별되는 다른 모든 성의 주체는 차별과 적대의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이성애 중심적인 자본주의사회를 극복하려는 꿈을 함께 꾸는 벗으로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한다. 물론 우리는 한국 사회를 비롯하여 많은 부유한 자본주의 사회들이, 다양성을 떠들며 동성애자들을 사회에 포용하는 시늉을 보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나아가 높은 소득을 누리며 가족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세련된 삶을 산다고 동성애자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조차 한다. 그렇지만 동성애자를 일러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개척자로 칭찬한다고 해서 성적 소수자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작해야 부유한 일부 남성 동성애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려니와 거기서 가리키는 동성애자란 소비자로서의 동성애자이지 노동자이자 시민으로서의 동성애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는 올곧은 노력을 통해서만 성적 소수자의 삶 역시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점에서 더욱 나는 민주노동당을 신뢰하며 이번 총선에서도 그들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이야말로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모든 착취와 불평등을 해결하고 또한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금융 위기 이후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삶의 고통에 직면해 있다. 빈곤은 심화되어 가고 있고, 실업은 늘어만 가고 있으며, 교육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서비스는 기업화되어가고 있다. 규제완화와 유연고용, 자기계발과 국제경쟁력을 내세우며 정부와 자본은 우리에게 위협을 일삼고 있다.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의 꿈은 멀어지고 있고 미국의 독단적인 패권주의에 종속된 채 더러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바꾸어 가는데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가장 미더운 대안일 것으로 믿는다.

메트로섹슈얼, 마초 이미지에서 탈출한 포스트모던 영웅들에 대한 유감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죄다 게이”라며 절망하던 이성애자 여성들에게 나날이 희소식(?)이 찾아들고 있다. 이성애자 남성들이 한층 변신하고 있다지 않은가. 게이 웹사이트에 가면 쉬이 찾아볼 수 있는 “상대 찾기” 광고. “좋아하는 타입-일반틱한 남자(일반이란 이성애자 남성, 이반이란 동성애자 남성을 각각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는 “straight acting gay”. 그러나 “이반틱한 이성애자 남자”를 쫓는 이성애자 여성을 위해 준비된 새로운 남성성의 “트렌드”가 목하 확산 중이다. 심지어 이성애자(straight)와 게이(gay)를 합성한 스트레이(the Strays)란 신조어도 나왔단다. 즉 “gay-acting-straight men”이다. 우리말로 “이반틱한 일반 남자”? 이제 게이처럼 사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믿는 이성애자 남성들이 뜨고 있다.

요 얼마간 국내 일간지들이 다투어 “화장하는 남자”들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다. 반신반의하며 컬러 로션을 내놓았다 대박을 터뜨렸다는 어느 화장품 회사의 성공담이나, 수능이 끝난 여고생을 대상으로 한 화장 강좌가 이제 남고생들에게 확대되고 있다는 이야기나, 강남의 쿨한 바나 클럽을 전전하며 직장인을 대상으로 스킨 케어와 메이크업 강좌를 하고 고객을 확보하는 새로운 마케팅이 재미를 본다는 소식은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에 등장한다. 어느 일간지의 설문조사는 아예 한국의 이성애자 여성들에게 네 가지의 남성 유형을 제시하고 선택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선택 대상에는 “짙은 화장을 한 남자”, “알 듯 말 듯 화장을 한 남자”, “그냥 평범한 단정한 남자”, “터프한 남자” 등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 가운데 수위는? “알 듯 말 듯 화장을 한 남자”였다.
얼마 전부터 우리 시대의 가장 쿨한 성문화의 트렌드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이다. 데이빗 베컴과 안정환은 아마 가장 유명한 메트로섹슈얼의 아이콘일 것이다. 스파이스걸즈 출신의 아내 “포시 스파이스”의 메니큐어를 칠하고, 꽁지머리를 묶고, 치마를 걸치는 베컴의 이미지는 더 이상 거북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그것은 쿨할 뿐이다. 안정환? 역시 그의 수려하고 세련된 외모는 질투의 대상이다. 그의 헤어스타일, 피부, 의상 등은 이성애자 남자들이 질시하는 대상이다. 빌 클린턴, 브래드 피트, 자니 뎁, 마키 마크 월버그, 조지 클루니, 주드 로, 이완 맥그리거 등등. 이 모든 스타들의 공통점은 한가지, 바로 메트로섹슈얼이란 점이다.
그 희한한 용어를 발명한 문화평론가 마크 심슨이 정의하는 메트로섹슈얼은 이렇다. “대도시에 살거나 일하며 가처분 소득이 많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GQ]같은 패션잡지나 아니면 게이 바에서 볼 수 있었지만 1990년대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음” 운운. 결국 메트로섹슈얼은 남녀 구분이 더 이상 의무와 규범의 압력에 짓눌린 곳에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성형외과와 다이어트 카운슬러와 헬스클럽, 패션 잡지, 인테리어, 요리 등등. 이 모든 곳에서 남성은 있고, 그들은 남성성을 변화무쌍한 라이프스타일로 변조할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 메트로섹슈얼은 이성애적 남성성의 규범,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마초”적인 남성의 이미지로부터 탈출한 포스트모던 영웅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녀유별의 절대적 주술에서 헤어난 이 쿨한 남성들을 쌍수 들어 환영할 것인가.
메트로섹슈얼은 우리 시대의 성별의 정치학을 라이프스타일의 정치학으로 전락시키는, 신종 퇴행의 전략이다. 부드럽고 세련되며 분방한 “젠더의 예술가”인 메트로섹슈얼이 자신의 남성성을 적극적으로 반성한다지만, 그들이 반성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반성하는 위치 자체의 남성이라는 규정이다. 자신의 남성성을 반성하는 그 남성의 위치란 대관절 무엇인가. 물론 그 위치는 “그것은 네 남성성을 마음껏 변형시켜라. 하지만 그것이 바로 네 남성의 주체성 안에서 이뤄지도록 하라”는 명령에서 영원히 거울 반사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캔 맥주를 훌쩍거리며 프로야구 경기나 즐기고, 헤진 청바지에 싸구려 골프 셔츠를 걸친 채 방바닥을 뒹구는 마초적인 이성애자 남성보다 훨씬 “교활한” 남성이다.
진부한 이성애자 남성은 적어도 자신의 남성이란 성별적 주체성을 “타율적 명령”으로 인식하는 건전한 판단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자신의 남성적 주체성이 바로 자신의 선택으로부터 벗어난 외부로터의 강제이며, 사회적 명령임을 간파하고 있다. 그러나 메트로섹슈얼에게 남성/여성이란 오직 우리가 마음껏 스스로의 연출을 통해 “각색”할 수 있고, 쇼핑을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이며, 상품적 스펙터클이다. 잘 나가는 모든 마케팅 서적은 21세기의 새로운 “트렌드”를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트렌드 예측의 노스트라다무스이자 21세기 소비자본주의의 선지자라는 페이스 팝콘은 21세기의 “트렌드”는 “여성적 사고”이자 “남성해방”이라고 주장한다.
역시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메트로섹슈얼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고, 여성리더십, 여성적 가치의 활용은 경제학, 경영학의 핵심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물론 우리는 놀라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포스트모던한 “계몽적 각성” 혹은 얼빠진 착란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참회는 시작되었다. “얼마나 우리는 어리석었는가. 바로 가부장제가 바로 “트렌드”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토록 육중하게 우리를 짓누르던 성별이 바로 “라이프스타일”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니.“ 결국 메트로섹슈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자연스러운 절대적 한계로 강요하고, 남성과 여성이란 언제나 우리의 삶이 기원하는 근원적인 기반으로 종용하는 성별의 테크놀로지이란 것이다. 메트로섹슈얼? 아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쾌적하게 우리를 찜쪄먹는 성의 보수적 이데올로그일 뿐이다. 결국 그들은 ”리트로섹슈얼(retrosexual)“이다.

위안부 누드, 강간 환상 그리고 식민주의의 섹슈얼리티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그것의 공식명칭은 종군위안부 테마영상집이었다 한다)로 북새통이다. 식민의 역사를 다시 기억해보자는 진지한 발로에서 위안부 누드를 기획했다는 제작사 측의 주장은, 참으로 가소롭고 기상천외한 설레발이다. 이런 졸렬한 변명을 할 생각이었으면 그냥 함구하고 있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안부 누드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이들의 태도 역시 이들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위안부 누드를 만든 이들은 위안부 여성들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을지 모를 은밀한 성적인 환상을 천연덕스럽게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해했거나 무식했던 점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다들 즐기고 있다”는 순진한 사실만을 알고 있었지 “아무도 즐기지 않는 척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어제 나는 친구 누나를 따먹었다”는 식의 흔해빠진 저질스런 음란한 낙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다루고 말았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물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옆집에 사는 친구 누나를 따먹었다는 식의 화장실 낙서와 위안부 여성들의 성적인 재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둘 모두 은밀한 강간 환상의 틀을 통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위안부 여성들이 식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위안부 여성들의 체험을 집요하게 성으로부터 떼어놓으려 애써왔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체험을 상징화하는 유일하게 허용된 방식은 “식민지 백성”이다. 이는 그녀들이 겪은 고통의 핵심적인 원인이 강간이라는 사실을 삭제하는 것이다. 이는 전시에 강간을 당한 여성들의 체험을 인종적 폭력과 식민적인 지배의 결과로 환원하려는 (보스니아나 르완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남성의 역사적 법정의 논리이다. 설령 그녀들이 겪은 강간의 체험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간당한 여성의 분노가 아니라 자기 여자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힘없는 남자들의 무력과 자괴를 위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 오랜 세월 숨죽여 살다가 마침내 ‘커밍아웃’을 하였을 때 그녀들을 그토록 침묵하게 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것은 그녀들이 전시에 강간을 당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누드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신대 할머니들을 식민지 백성이 아니라 성적인 대상으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를 기억하는 남성 주체의 입장 안에 강간당한 여성의 자리는 없거나 부정된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이이거나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다. 그렇지만 민족의 역사가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강간당한 여성으로서의 체험을 소외시키고 식민지 백성으로 상징화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위안부 여성들의 강간의 체험을 완벽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된 채 긍정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위안부 누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억압된 채 즐겨지고 있던 남성적 환상이다. 위안부 누드는 위안부 여성(혹은 성의 희생을 강요당한 역사 속의 여성들)에게 투입되어 있는 은밀한 성적인 환상을 그만 어이없이 누설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위안부 누드는 괜찮다는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정반대로 위안부 누드는 강간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적인 기억마저 소모하고 있기에 더욱 위악하고 또한 폭력적이다. 위안부 누드는 역사적 기억을 강간 환상의 무대 안에서 소비한다. 그 자리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은밀히 즐기고 있었음에 분명한 성적인 파트너, 마조히스틱한 여성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때의 위안부 여성은 재국주의적 전쟁에 징발당한 채 성적인 보상을 제공해야 했던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집행하는 “나의” 상상적인 여성일 뿐이다. 이는 강간이나 성희롱을 자행한 남자들에게서 흔히 듣는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그는 왜 그녀가 그것이 싫었다면 왜 감히 저항하고 부정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놓인 권력관계를 보지 못한 채 오직 욕망의 대면만으로 그 상황을 각색한다. 성폭력과 강간을 저지른 남자들의 집요한 환상은 언제나 그녀도 분명히 즐겼다는 것이다.
이는 위안부 누드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리고 위안부 누드의 비참함은 바로 이런 성적 환상을 위해 전시 강간이라는 비극적 진실을 망각한다는데 있다. 위안부 누드는 위안부 여성의 체험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우고 있다. 어떻게 감히 “어머니 조국”을 능욕하느냐고 위안부 누드를 비난할 때 그 주장은 식민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식민의 역사 안에 놓인 위안부 여성의 체험에 숨어있는 성을 떼어내고 아울러 자신의 몰역사적인 강간 환상을 유지하려는 몸짓에 가깝다. 위안부 누드는 식민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강간 환상을 이용한 싸구려 포르노일 뿐이다. 그것은 식민적 역사와 전시의 강간을 자신의 환상의 무대 안의 간단한 장치로 소비하려 했을 뿐이다. 따라서 위안부 누드의 평범하고 순진한 의도가 격렬한 거부에 좌절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강간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견지되어야만 하는 “망각의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성적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우리는 상대의 욕망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욕망의 무대가 되는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현실을 가능한 모른 척해야 한다. 그래야 그 환상은 달콤하고 뜨거워진다. 그러나 위안부 누드는 시퍼렇게 살아있는, 결코 그것을 무덤까지 비밀로 지킨 채 가지고 가지 않겠다는 강간당한 여성의 분노와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안부 누드가 실패한 것도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체험을 진술하고 증언하는 여성 앞에서 남성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만 위안부 여성은 결코 자신의 체험을 역사화하지 못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주체가 민족인 한 그것이 기억하는 여성은 어머니나 누이 뿐이다. 민족-역사의 환상과 강간 환상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다. 물론 그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온당한 방식일 수 없고 또한 위안부 여성을 기억하는 올바른 방식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위안부 누드를 비난하는 것은 그것을 은밀히 즐기는 자들의 허울좋은 농담일 뿐이다.

게이 결혼의 ‘권리’라는 미망

영국의 경제주간지 에서 커버스토리로 미국 대선의 게이 결혼에 관련된 이슈를 다뤘다. 선거에 임박하면서 민주당의 대선주자를 둘러싼 뜨거운 소란만큼이나 보수당의 표챙기기를 위한 데마고기도 역시 파상처럼 벌어진다. 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분할이 게이 결혼이란 이슈를 통해 제기되고 또한 실현될까. 게이의 결혼 권리를 둘러싸고 마치 그것이 중요한 이슈인양 게이정치학이 개입하는 것은 왜 잘못일까. 게이 결혼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쟁점이 아니다. 그것은 친밀성을 탈이성애화시키려는 게이 정치학의 급진적인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씨빌유니언과 포괄적인 사회적 권리로서의 결혼 그리고 가정적 동반자관계(domestic partnership) 사이의 관계를 둘러싸고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것을 한국에 빗대어본다면? 게이 호주권? 세대주로서의 권리? ….
The case for gay marriage
Feb 26th 2004
It rests on equality, liberty and even society

SO AT last it is official: George Bush is in favour of unequal rights, big-government intrusiveness and federal power rather than devolution to the states. That is the implication of his announcement this week that he will support efforts to pass a constitutional amendment in America banning gay marriage. Some have sought to explain this action away simply as cynical politics, an effort to motivate his core conservative supporters to turn out to vote for him in November or to put his likely “Massachusetts liberal” opponent, John Kerry, in an awkward spot. Yet to call for a constitutional amendment is such a difficult, drastic and draconian move that cynicism is too weak an explanation. No, it must be worse than that: Mr Bush must actually believe in what he is doing.
Mr Bush says that he is acting to protect “the most fundamental institution of civilisation” from what he sees as “activist judges” who in Massachusetts early this month confirmed an earlier ruling that banning gay marriage is contrary to their state constitution. The city of San Francisco, gay capital of America, has been issuing thousands of marriage licences to homosexual couples, in apparent contradiction to state and even federal laws. It can only be a matter of time before this issue arrives at the federal Supreme Court. And those “activist judges”, who, by the way, gave Mr Bush his job in 2000, might well take the same view of the federal constitution as their Massachusetts equivalents did of their state code: that the constitution demands equality of treatment. Last June, in Lawrence v Texas, they ruled that state anti-sodomy laws violated the constitutional right of adults to choose how to conduct their private lives with regard to sex, saying further that “the Court’s obligation is to define the liberty of all, not to mandate its own moral code”. That obligation could well lead the justices to uphold the right of gays to marry.

Let them wed
That idea remains shocking to many people. So far, only two countries—Belgium and the Netherlands—have given full legal status to same-sex unions, though Canada has backed the idea in principle and others have conferred almost-equal rights on such partnerships. The sight of homosexual men and women having wedding days just like those enjoyed for thousands of years by heterosexuals is unsettling, just as, for some people, is the sight of them holding hands or kissing. When The Economist first argued in favour of legalising gay marriage eight years ago (“Let them wed”, January 6th 1996) it shocked many of our readers, though fewer than it would have shocked eight years earlier and more than it will shock today. That is why we argued that such a radical change should not be pushed along precipitously. But nor should it be blocked precipitously.
The case for allowing gays to marry begins with equality, pure and simple. Why should one set of loving, consenting adults be denied a right that other such adults have and which, if exercised, will do no damage to anyone else? Not just because they have always lacked that right in the past, for sure: until the late 1960s, in some American states it was illegal for black adults to marry white ones, but precious few would defend that ban now on grounds that it was “traditional”. Another argument is rooted in semantics: marriage is the union of a man and a woman, and so cannot be extended to same-sex couples. They may live together and love one another, but cannot, on this argument, be “married”. But that is to dodge the real question—why not?—and to obscure the real nature of marriage, which is a binding commitment, at once legal, social and personal, between two people to take on special obligations to one another. If homosexuals want to make such marital commitments to one another, and to society, then why should they be prevented from doing so while other adults, equivalent in all other ways, are allowed to do so?

Civil unions are not enough
The reason, according to Mr Bush, is that this would damage an important social institution. Yet the reverse is surely true. Gays want to marry precisely because they see marriage as important: they want the symbolism that marriage brings, the extra sense of obligation and commitment, as well as the social recognition. Allowing gays to marry would, if anything, add to social stability, for it would increase the number of couples that take on real, rather than simply passing, commitments. The weakening of marriage has been heterosexuals’ doing, not gays’, for it is their infidelity, divorce rates and single-parent families that have wrought social damage.
But marriage is about children, say some: to which the answer is, it often is, but not always, and permitting gay marriage would not alter that. Or it is a religious act, say others: to which the answer is, yes, you may believe that, but if so it is no business of the state to impose a religious choice. Indeed, in America the constitution expressly bans the involvement of the state in religious matters, so it would be especially outrageous if the constitution were now to be used for religious ends.
The importance of marriage for society’s general health and stability also explains why the commonly mooted alternative to gay marriage—a so-called civil union—is not enough. Vermont has created this notion, of a legally registered contract between a couple that cannot, however, be called a “marriage”. Some European countries, by legislating for equal legal rights for gay partnerships, have moved in the same direction (Britain is contemplating just such a move, and even the opposition Conservative leader, Michael Howard, says he would support it). Some gays think it would be better to limit their ambitions to that, rather than seeking full social equality, for fear of provoking a backlash—of the sort perhaps epitomised by Mr Bush this week.
Yet that would be both wrong in principle and damaging for society. Marriage, as it is commonly viewed in society, is more than just a legal contract. Moreover, to establish something short of real marriage for some adults would tend to undermine the notion for all. Why shouldn’t everyone, in time, downgrade to civil unions? Now that really would threaten a fundamental institution of civilis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