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섹스여 안녕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상해 옮김, 문학 동네, 2004년 5월)은 “진한” 소설이다. 야하다거나 난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11분] 안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섹스와 오르가즘, 그리고 접촉과 만남은 너무나 평범해지고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11분]의 주인공인 마리아 역시 욕망의 비밀을 깨닫기 수많은 섹스지침서들을 읽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현명한 여자였기에 그 책들이 모두 공허하거나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야하기만 뿐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복잡하기만 할 뿐 선명하고 단순한 그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리아가 알려주는 뜨겁고 걸쭉하고 부드럽고 몽롱한 감정의 세계에 접근하려면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을 읽기 전에 그에 관해 겁내거나 우물거릴 필요가 없다. 마리아는 난관에 처한 사람들의 곤경과 불안을 성실하게 기록하고 또한 진단해주기 때문이다. [11분]의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을 너무나 잘 알려준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것에도 다 이유는 있다. [11분]은 유럽의 섹스를 향한 아니 서구의 자본주의가 처분한 섹스에 관한 풍자이며 또한 치료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내게있어 [11분]은 위기에 처한 섹스를 구해내려는 즐겁고 기름진 시도이다.
[컬티즌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우리는 그간 냉소와 환멸에 가득 찬 시선으로 섹스를 바라보는 많은 소설을 읽었다(대개 그 소설은 유럽의 소설이다. 마리아의 모험과 성숙이 펼쳐지는 스위스의 제네바는 바로 그 유럽의 축소판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먼저 섹스는 죽었다고 선언하는 소설들이 있었다. 이런 소설들은 섹스 안에 사회가 금지했던 어떤 숨은 희열, 비밀스런 삶의 에너지가 있다고 믿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깨달았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토록 과대평가된 섹스, 그토록 숭배 받는 섹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섹스 너머의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 그 안에는 인간에게 부착된 불필요한 에너지의 원인인 성욕의 스위치를 끄려는 사람들도 있고 섹스에서 다시 순정한 사랑으로 되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섹스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섹스란 포르노와 수많은 섹스 파티, 그리고 섹스관광을 통해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섹스일 뿐이라고 말하는 소설을 읽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섹스중독자, 음험한 원조교제의 달인, 방콕과 마닐라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배불뚝이 유럽인들, 카마수트라와 타오이즘의 방중술에 현혹된 미국인들을 만났지만 그 안에서 섹스란 너무나 볼품없고 지루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파울로 코엘료는 기적처럼 평범해지고 진부해진 섹스를 다시금 신비한 과거의 자리로 돌려보낸다. 이제 섹스에 관해 더 이상 알 것이 없다고 믿게 된 지금 [11분]은 그것은 전부 잘못 안 것이며 또한 그것은 섹스와 관계없는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11분]은 섹스란 과학자들의 세부적인 처방으로 완성될 수 없는 것이고, 더 자주 많이 길게 한다고 해서 더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절제를 통해 더 훌륭한 섹스를 만끽할 수 있다는 식의 익숙한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브라질의 시골처녀 마리아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몸을 팔고 한 남자를 사랑하며 겪은 휘황한 체험을 통해 겨우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는 남국의 정열 풍의 클럽에서 일하는 창녀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영국에서 혹은 아랍과 일본에서 온 남자들은 오직 그것을 찾기 위해 온다. 그것이란 물론 섹스이며, 마리아가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기준 가격 3백 프랑에 평균 11분 걸리는 오르가즘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섹스를 찾는 가엾고 불안하며 초조해 하는 남자들이 진짜 찾고있는 것은 다른 데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마리아를 찾은 남자들은 모두 자신의 환상 속에 있는 궁극적인 결핍, 자신을 온전히 제 것이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섹스에 매달린다. 그것은 3백 프랑을 치르고 호텔 방에서 응분의 교성을 들으며 정상 체위 혹은 포르노에서 배운 체위로 치러지는 11분의 거래일 뿐이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그렇게 냉정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이 11분 안에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안타까워하며 그녀 스스로 그것이 또한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마리아는 바로 그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미끼 혹은 베일에 불과한 섹스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것이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일깨우고 싶어한다.
마리아는 모험심이 강하고 총명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줄 아는 여자이다. 그녀는 잘못 쓴 계약서에 끌려 삼바 춤을 추는 댄서로 팔려왔고 스스로 그곳을 박차고 나와 베른가라는 제네바의 홍등가로 달려간 여자이다. 그녀는 먹고살아야 했고,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아직 자신에게 도착하지 않은 사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녀는 많으면 하루에 세 번 남자들과 자며 돈을 벌고 브라질에 돌아가 농장을 경영할 꿈을 꾸고 남자들의 숨겨진 욕망과 꿈을 더 잘 듣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우리가 섹스에 관한 유럽 소설에서 언제나 만났던 그 사람, 랄프 하르트를 만난다. 그는 두 번 결혼을 했으며 언제나 나쁘지 않은 사랑을 나누었던 그리고 원하는 만큼 실컷 섹스를 할 수 있었던 남자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다고 믿었으며 또한 섹스에 지쳐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리아를 만났다. 랄프의 멋진 표현을 빌자면 둘은 “의식의 포옹”을 나누었고, 마리아의 표현을 빌자면 “잔이 넘치듯이” 하는 섹스, “나는 사랑이고 음악”인 섹스를 했다. 그 사이에 마리아는 어느 부유한 영국인의 꾀임에 빠져 고통을 맛보며 쾌락을 찾는 유럽식 섹스까지 모든 섹스를 섭렵하였다. 그러나 마리아가 주유했던 모든 섹스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것은 천국이었다. 나는 땅이었고, 산이었고, 호랑이였고, 호수로 흘러드는 강이었고, 바다가 되는 호수였다”. 그것이 마리아가 찾은 섹스였다.
마리아는 유럽의 섹스에 현혹되기 싫었다. 자신의 노이로제를 감추기 위해 허겁지겁 매달리던 유럽 사람들의 섹스와 그녀는 작별하려고 했다. 그녀가 자유 속에서 맛보던 사랑, 그녀가 당당히 발견하고 가꾸었던 성스러운 섹스를 잃지 않기 위해 그녀는 제네바를 떠나 브라질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전날 그는 랄프와 사랑을 나누며 마리아는 그 섹스에 도착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사랑, 자신의 섹스를 지키기 위하여, 랄프와 헤어져야만 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잔인하다. 그리고 그건 너무 유럽적이다. 마리아는 브라질 비행기로 바꿔 타는 파리의 공항에서 랄프와 다시 만난다. 물론 파올로 코엘료의 말처럼,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끝난 영화 이후에 우리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듯이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다른 이야기를 발명해야 하듯이 소설은 끝난다. 마리아는 놀랍게도 사랑을 완성했으며, 섹스에게 아직도 훌륭한 권한이 남아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11분]은 그런 점에서 허무맹랑한 교훈 소설이다. 아직도 섹스에게 오르가즘이 남아있음을 일깨워주는 엽색 소설에 우리는 깔려죽을 판이다. 그렇지만 [11분]은 그 소설들 곁에서 모든 삶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필요가 없는 섹스, 섹스가 제 자신의 모습으로 즐겁게 간지럼을 피는 섹스가 있음을 알려준다.

너무나 짜증스럽군..

–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지지글을 발표한 이후 끼리끼리의 비판과 그에 대한 반론 이후 나는 또 우울해졌다. 역시 나는 논쟁이 지겹다. 논쟁이 공론장을 만들고 그로부터 보다 좋은 합리성을 만들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우습다. 논쟁에 참여하는 주체는 언제나 하나의 문법 안에서 순환하는 가여운 쥐이다. 지배의 담론이나 허위의 지식은 반박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효가 되거나 잊혀진다. 부디, 논쟁에 끼어들지 말자. 그것은 그를 즐기는 이들에게 맡겨도 될 일이다.
– 여성주체의 입장을 게이남성지식인은 절대 알 수 없다는 투의 언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독특한 유사페미니즘적 윤리는 이제 짜증스럽다 못해 지겹기까지 하다. 그런 류의 주장, 자신의 체험에 대해 투명한 주체라는 가정은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옳음을 위한 원리로 내세운다. 그것은 여성을 제외한 모든 주체, 나아가 여성의 핍진한 체험으로부터 소외된 주체를 비난하는. 본질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염증과 경멸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그것과 다른 페미니즘 사이의 분열을 경계하고 언제나 전전긍긍한다. 안타깝다 못해 우울하다. 여성의 본연의 체험이란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남성적 담론은 언제나 여성의 자기인식의 조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여성은 불가능한 주체라는 것, 그런 입장에서 남근주의적인 세계에 싸우는 입장을 발명하는 것이 여성의 “입장”이라는 것 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설문조사와 참여관찰과 보고와 폭로와 고백 속에서 여성주체의 잊혀진 목소리, 배제된 권리를 주장하는, 거의 판박이같은 언어의 인플레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여성의 권리는 여성의 체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언어화하도록 종용하며 그 주체를 길들이는 체계의 힘으로부터 유도되는 것 아닐까. 여성의 체험은 정말 근본적으로 번역될 수 없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차라리 김정란처럼 어떤 신비한 그 무엇에 여성은 있다고 알 수 없는 그것에 정박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것에 가닿으려는 꾸준한 욕망의 충동을 부추김으로써 그것에 관한 대화의 길을 발명해야하는 것 아닐까.
– 남자가 모르는 여자의 무엇 따위의 제목을 단, 갖가지 책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여성 자조지침서의 저자들이나 남자들을 위한 조언서의 저자들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들이 성공하는 여성을 위해, 좀 더 여자와 통하기 위해 들려주는 여성 이야기의 여성은 과연 누구인가.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그들은 아주 평범한 상식을 알려주는 것 아닐까. 그들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남성의 타자라는 여성의 위치 안에서만 자신의 체험을 해석하는 주체일 뿐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여성의 체험이자 주체성이라면?
– 정상인으로서의 게이, 자신이 게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느끼는 게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자유주의적 게이시민권운동에 나는 깊은 환멸감을 갖고 있다. 나는 그들이 변태로서, 도착자로서 자신을 상연하는 수많은 “안전한” 의례(SM, 강간 등)를 만들어놓고, 우리 시대의 도덕적인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비난과 공격에 정확히 대응하는 그것을 즐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자신의 모욕을 즐긴다. 그를 긍지있는 성욕의 주체로 인정하며 즐기는 섹스도 있는가? 더티하지 않은 섹스? 그것은 불가능한 환상이다.
– 사르트르 왈, 타인은 지옥이다.
– 랭보 왈, 나는 타인이다.
– 그들은 지나치게 민감했던 것일까, 아니면 타인을 모두 자신의 욕망, 자신의 나르시시즘적인 이미지 안에 투영하려고 했던 비겁한 자들이었을까.
– 내일의 강의를 위해 다시 읽는 계급론 그리고 오늘 읽었던 침울한 기사들. 분배를 강조하는 빨갱이에 의하여 점령당한 정부와 의회를 규탄하는 조선일보의 끔찍한 사설, 죽음의 근거리에 놓인 빈곤을 재생산하는 노숙자들의 삶을 폭로하는 한겨레의 기사, 타워팰리스에 입주하는 동서로부터 비웃음을 당한 덕윤이 엄마의 이야기, 신용불량자가 400만에 육박했다는 비보… 오늘도 버텼다는 것이 용하다.

지식노동자 – 탈근대자본주의 시대의 주체성과 비판이론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압축 재현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약호는 단연 “지식노동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식노동자를 현 단계 자본주의의 노동자의 역사적 종(種)으로 개념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유경쟁자본주의 단계의 산업노동자와 독점자본주의단계의 대중노동자같은 유형으로 탈근대자본주의의 지식노동자를 분류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니다. “지식기반경제” 혹은 “신경제”의 노동자로서 지식노동자는 전 단계의 노동자와 전연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기술적 구성이나 노동과정의 조직, 그리고 노동하는 주체를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형태가 역사적 단계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노동자란 노동자의 사회적 현실을 표상하는 개념이 더 이상 아니라는 점에서 특유하다. 지식노동자는 길드나 동업조합의 장인, 포드주의적 노동자와 더 이상 유사하지 않다. 지식노동자는 비노동주체와 구분될 수 없다는 점에서, 노동의 세계와 노동이 없는 세계가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의 생애단계와 노동으로 입장하고 노동에서 은퇴하는 생애단계의 간격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유령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네그리와 하트가 푸코의 개념을 빌어 이야기했던 노동의 생정치(biopolitics)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 멀리가지 않도록 하자. “신지식인 운동”으로, “평생학습체제”로, “학습혁명”으로, “국가인적자원개발계획” 등으로, 지식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기획은 우리 주변에 이미 정착하였고 또한 가동 중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노동자는 일관생산라인이라는 직접적인 생산과정, 공장과 사무실이라는 특정한 공간의 배치, 출퇴근 시간과 테일러주의적인 시간동작연구로 상징되는 신체의 통제와 더 이상 상관없다. 노동자를 개별적인 신체로 규정하고 그를 표준과 규범에 따라 통제하고 조정하는 포드주의적인 훈육으로부터 지식노동자는 벗어나 있다. 개별적인 신체로서의 노동자는 이제 집합적인 신체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명의 노동자의 묶음이란 뜻에서의 집합적 신체가 아님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가상사회에서의 정보와 지식의 (재)생산을 말할 때의 “집단지성”처럼 그것은 개별 신체, 지성, 감각의 집행이나 연장이 아니다. 일관생산라인에서 린 생산으로, 팀제로 변화된 탈근대적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는 개별적인 신체로서 성과를 발휘하고 생산성의 지표에 의해 측정되고, 동기와 보상의 체계 안에 귀속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일반적인 노동력 안으로 사라진 채 측정될 수 없는 순수한 추상적인 힘으로 등록된다. 이는 거꾸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신경제의 “부”의 담론의 핵심은 재산이 아니라 자산(asset)일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물질적 결과로서의 생산물이 아니라 법인기업이 가진 것으로 예측되는 잠재적인 능력 흔히 자산가치이다. 따라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보유하고 있는 현물과 수익이 아니라 자산을 통해 자본을 평가하는 유령적인 등가(等價)의 세계에 익숙해 있다. 물론 그 유령의 세계는 나스닥과 코스닥, 증권거래소이다. 아마존닷컴과 벅스뮤직의 주식가치와 월마트나 삼성전자의 주식가치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미스테리가 아니다. 아마존닷컴의 자산가치는 아마존닷컴의 수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마존닷컴의 자산가치는 곧 그것의 잠재성일 뿐이다.
신경제 이데올로그의 주문같은 말처럼 “유한한 물적 자원에서 무한한 지식의 힘”으로 자본의 힘이 변화되었다면, 이는 노동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노동 역시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과받는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노동자 없는 노동의 세계를 가리키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이란 용어일 것이다. “인적 자원 개발”, “인적 자본” 등의 개념은 한 명의 구체적인 심리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나, 직장에 다니는 나, 월급을 받고 연금과 보험을 내는 나와 같은 뜻에서의 노동자 역시 잔존한다. 그렇지만 지식기반경제는 지식(그것은 신경제의 이데올로그들에 따라 다중지능, 창의성, 탁월성,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 EQ, NQ 등 다양하게 정의되고 세밀화된다)이라는 역량을 요구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신체와 지성 안에 포함되어있는 실체로서의 능력도 아니고 또한 노동자가 판매하며 보상되는 소유물도 아니다. 다시 푸코를 끌어들이자면 그것은 삶(life)이며 생능력(biopower)이다. 투입되는 노동력을 이미 예상하고 규정하는 생산수단(이를테면 미싱은 재봉사, 선반은 선반공과 같은 식으로)과 달리 지식기반경제의 생산은 이미 형식화되고 표준화된 노동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적 자원이란 개념은 따라서 경직된 직업 교육과 숙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실행하고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을 개선하고 향상하는 노동력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인적자원은 평생학습을 요구하며, 노동하는 주체의 지속적인 자기계발을 강요한다.
한편 노동자는 언제나 해체와 이동을 함으로써 변신한다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혹은 변화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 자본의 가속화된 순환에 따라 그 스스로 끊임없이 변형되어야 한다. 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마 최근 끊임없이 회자되는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의 전환”이라는 담론일 것이다. 지속적인 직업 이동, 동일한 직무와 직종 안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다른 직업으로의 이동을 수반한 노동자의 이동은, 노동을 통한 자기(self)의 구성을 파산시킨다. 일의 여정(旅程)을 통해 자기의 생애를 재현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 자리에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에 사로잡힌다. 평생직장과 철밥통의 세계를 대신하여 이태백, 사오정이라는 유연화된 노동자가 들어설 때, 그것은 불안과 위험 속에 내동댕이쳐진 노동자의 물질적 생존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혁신하고 관리하며 향상시켜야하는 기업가적 주체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들은 리더십 프로그램과 자기계발 세미나, “아침형” 습관의 중독자, “메모의 기술”의 달인, 자기표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하는 주체에게 단순히 새로운 노동 기율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성과, 더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점에서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은 관료적으로 조직된 조직 체계에서 즉 외부로부터 오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에게 던져진 최대의 명령인 “자기주도”가 알려주듯이 “자기를 돌보는” 에토스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에토스는 노동하는 주체가 공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던 상징적 동일시의 형식(당연히 이에 해당하는 고전적인 개념은 당파성,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의식, 의사소통적 합리성 등이다)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노동은 있지만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는 사라지고 있고,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물질적인 제도와 기관(정당, 노동조합, 클럽, 신문, 출판사 등)은 위축되거나 무력해지고 있다. 노동자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기업가(the entrepreneur)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력경로를 관리하고 다중경력을 체득하며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향상시키는 주체이다. 물론 이를 가장 잘 요약하는 것은 신경제의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그인 톰 피터스의 “나-브랜드”일 것이다. 그에게 삶이 어떻게 의미작용의 코드와 사회적 재생산의 네트워크에 의해 규정되는가를 묻는 것은 진부한 일이다. 나의 삶은 일종의 프로젝트이며, 나는 무엇보다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의 변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를 익히며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투명한 자기의식적 주체와 작별을 고하는 것은 적어도 비판적 학계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정신이 잊고 있었던 것은 그러한 변화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정의하는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힘들의 장이었다는 것이다. 통속적인 경영학 서적에서 데리다가 신경제의 지식경영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디지털정보자본주의를 선구한 예언가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들먹이는 것은 차라리 참신하다 할 일이다. 젠체하는 마케팅서적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튀스”와 “문화자본”을 인용하는 것은 이미 관례가 되다시피 하였다. 물론 그 자체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다. 담론의 소비를 지식인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르크스 역시 월스트리트의 철학자로 둔갑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가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분석하고 정의하는 일은 정치적인 개입이다. 그런 점에서 탈근대자본주의의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일은 근대성과의 단절 혹은 극복이 아니다. 외려 필요한 것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둘러싼 적대적인 논쟁의 공간을 창출하고 참여하는 일이다. 지식노동자라는 탈근대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우리는 그 자리에 컴컴한 공백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이는 슬프고도 참담한 일이다.
– 연세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패러디는 무효다


패러디는 법 앞의 몸짓이다. 법이 없다면 패러디도 없다. 패러디는 의미작용을 규제하고 조직하는 상징적 질서로서의 법을 항상 전제한다. 그렇지만 탈근대자본주의의 표준적인 에토스는 법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삭제하는 데 있다. 법은 없거나 무력한 공식적인 규칙과 협약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부재하는 초월적인 기의로서 법은 없다. 우리에겐 자의적이며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소소한 규칙이 있을 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패러디는 무효다. 법이 없다는 데 패러디가 서 있을 자리 역시 없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패러디는, 필경 다음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먼저 없는 법, 사라지고 있는 법을 환상 속에 설립하고 존속시킴으로써, 법의 부재가 초래하는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상상된 법. 다른 하나는 탈중심화된 세계임을 선선히 인정하며 약한 법, 혹은 실용적인 협약과 법령으로 탈신화화된 법.
패러디의 ‘명가’ “딴지일보”를 생각해보자. 딴지일보의 패러디가 주는 쾌락은 무엇보다 법을 ‘구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쾌락 아닐까. 딴지일보에서 우리가 느끼는 쾌감은 법의 허위성, 편파성을 감지한 탓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없는 법의 존재를 허구적으로 상연함으로써 얻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환상의 쾌감 아닐까. 딴지일보를 읽으면서 흘리는 웃음과 흥분은 권위적이고, 관료적이며, 가부장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상징 체계를 비판하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연유한다. “딴지일보”의 패러디는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으로서, 우리의 심리적인 사고를 규정하는 법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번 총선과정에서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인터뷰 기사는 그런 패러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예컨대 그는 고상하고 위엄있는 공적인 장면의 주체를 세속적이고 실제적인 이해에 오염된 인물로 격하시키고, 예의 딴지체로 그들을 묘사한다. 따라서 “DJ보다 이쁜 한화갑”이거나 “선수들과 잔 적이 없는 홍준표” 식의 표현은 공적인 정치적 주체(직업적인 정치가란 뜻에서가 아니라 “정치”라는 상징적 장을 규정하고 집행하는 상징적 주체라는 점에서의 정치가)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속물스런 이기적인 개인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렇지만 패러디의 풍자성 그리고 그것에 결부된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효력은 이젠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이는 패러디의 풍자와 정반대되는 태도, 즉 맹목적인 신화적 이데올로기와 패러디 사이의 거리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한나라당의 총선 반전은 당대표인 박근혜가 국모의 딸이자 박애주의자 영부인의 딸로서 신화적인 이미지를 획득한데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박근혜를 “반공규율자본주의”를 이끈 파시스트의 딸이 아니라 신비한 모성적 여성으로 신화화한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무지가 아니다. 박근혜의 이데올로기적 위장과 딴지일보의 탈이데올로기적인 풍자라는 구분은 옳지 않다. 공적인 법의 세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정치를 규정하고 좌우하는 것은 여론조사와 토크쇼, 정치인의 이력과 소소한 사생활, 그의 인간적 자질과 매력 따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딴지일보의 패러디와 박근혜의 이데올로기적인 신화화는 모두 동일한 형식적 절차에 의존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공적인 정치적 주체를 세속적인 이해에 오염된 개인으로 풍자함으로써 허구적으로 이미 법이 있었던 것처럼 상상하는 것과 자의적인 상상으로 선택한 정치적 주체를 숭고한 법의 화신으로 신화화함으로써 법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소소한 형식적인 차이에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정치 그 자체이다. 이 때의 정치란 자유주의적 정치학에서 말하는 선거와 투표, 법치, 언론의 자유라는 외적인 정치적 장치와 그것이 재현(대변)한다고 가정하는 현실 사이의 관계가 모호해져 버린 정치이다. 아마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적인 특성을 지적하자면 바로 이러한 정치의 재현적인 특성이 사라져버리고 정치적 행위 자체가 정치를 구조화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최근 인플레를 이루고 있는, 포스트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거버넌스” 개념이 유행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거버넌스란 국가의 통치가 아닌 지역사회와 개인의 선택과 참여에 의한 통치로의 변화를 가리킨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따위는 곧 정치를 규제하는 일반적인 이상이 없는 정치의 세계, 곧 정치가 사라지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개인들과 지역사회만이 있을 뿐임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법은 국가인권위원회, 노사정위원회, 청소년보호위원회 등등의 다양한 위원회와 시민단체와 여성단체의 수많은 입법 투쟁을 통해 공급되는 다양한 사회적 협약과 공식적인 규제 따위로 축소된다. 물론 법은 없고 선택을 하는 개인과 지역사회, 비정부기구 등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러디란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자율적인 주체의 환상을 공급하고, 상징적인 질서를 풍자함으로써 법을 극복하며 자유를 실천한다는, 순응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로 전락하여 버린다. 재차 말하지만 패러디는 무효다. 적어도 탈근대자본주의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비판은 법의 비판이란 형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환상을 비판하는 형식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전주 行…

– 전주엘 다녀왔다. 유쾌하지 못한 이유로 전주영화제를 떠난 후 내내 그곳을 가기가 어려웠다. 이젠 시간도 흘렀고 다른 낯의 사람들로 채워져 쉽게 걸음할 수 있다 여겼다. 그 전 내가 차지했던 지위에 가늠할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비를 붙을만큼의 기력도 없으니, 이젠 그저 영화나 보고 식당이나 기웃대는 가벼운 여행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내게 그곳과 어떤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들을 피하자는 작정대로 낮은 포복으로 움직여 다녔고, 사람이 모일 만한 곳이면 피하려 애썼다. 덕분에 맘 주름질 일 없이 3박4일, 전주행을 했다.
– 이렇다 할 좋은 영화를 건지지 못해 아쉬웠다. 장유웬의 신작 <녹차>는 아주 실망이었고, 개방개혁 시대에 문혁의 그늘을 규탄하고 처치하려던 한 명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그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괴물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어떻게 전락하는지 보는 듯 했다. 그에게서는 더이상 중국도 없고, 자유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도 없었다. 아르노 데스플레셍의 <파수꾼>이 그나마 건진 수작이라면 수작일까.
– 카롤린느 샹페띠에라는 촬영감독의 작품이란 이유로 선정된 그의 작품은 고전적인 카프카적인 세계였고, 드물게 인물에 관한 영화였다(모든 영화는 인물을 다루지만 그것은 캐릭터이지 인물은 아니다. 스토리를 상연하는 배역과 불가사의하리만치 충일한 한 인물을 재현하는 영화는 다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인물을 다룬 영화는 많이 희귀해졌다. 이를테면 나는 데칼로그는 인물에 관한 영화라고 본다. 아니 키에슬로프스키의 모든 영화는 그저 인물에 관한 영화라고 본다). 한시도 한 인물의 낯을 떠나지 않는 영화를 만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데스플레셍은 냉전의 종식과 평화라는 세계의 표면 뒤에서 어떤 공식적인 제도와 권위로부터 그의 자유가 면제된 한 인물 – 역설적으로 그는 자유를 선택한 인물이다 – 과 그의 죽음을 쫓는 한 법의학도의 병적인 집착을 쫓는다. 영화는 아버지가 외교관이었으며 독일에서 성장한 프랑스 청년인 법의학도 마티아스의 파리행을 쫓는다. 마티아스는 프랑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외교부의 관리라는 자로부터 불법입국자란 혐의를 받고 곤욕을 치른 후 파리에 도착한다. 끔찍하고 영문모를 사건에 시달렸던 그가 파리에 도착한 후 열어본 가방에는 괴이한 사람의 머리 하나가 들어있다. 마티아스는 이 영문모를 머리의 신원을 추적하려 발버둥치고, 그는 그가 구 소련에서 살았던 인물이며 수마트라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 프랑스의 외교부 안에는 구 소련에서 자유를 택한 과학자를 몰래 서방세계로 빼내 그가 가진 첨단의 과학적 지식을 얻어내는, 일종의 인신매매 비즈니스 팀이 있다. 그들은 소련의 한 인물을 프랑스로 빼내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자유의 영지로 배당된 수마트라에서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자유에 저항을 했고 살해를 당한다. 그리고 그의 친형이었던 프랑스인은 그의 동생의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외교부에 안에서 투쟁을 벌이다 지금은 미치광이이자 반역자로 몰려 추방을 당하게 된다는 신세가 된다. 마티아스에게 머리를 넘긴 인물은 바로 그였다.
– 그러나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마티아스의 윤리적인 얼굴이다. 음모적인 비밀경찰과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인물이란 설정은 흔한 것이고, 그렇게 보자면 이야기의 얼개는 매우 진부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시시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그런 이야기에 실린 서스펜스를 쫓는 것이 아니라 거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듯 보이는 한 미지의 인물을 향한 그의 집착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국가권력의 뒤안에서 희생당한 한 인물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려는 자의 도덕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자신을 뒤쫓는 저항할 수 없는 윤리적인 요구이다. 그는 마치 그것이 없다면 그의 삶이 무너질 것처럼 그것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의 안티고네적인 모습이 숭고하기는커녕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하게 보이기만 한다.

– 알랭 기로디의 신작 장편인 <용자에겐 쉴 곳이 없다 No Rest for the Brave>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오래된 꿈 That Old Dream That Moves>(일전 나는 이 작품을 “쿨 타임”이란 영어 제목으로 봤던 듯 하다. 로테르담이었던가..)을 다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특히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단편들 역시 만났다. 그러나 아마 그는 매우 난삽한 이력을 가진 감독인 듯 하다. 그의 단편들 가운데 <그것들의 힘>은 적잖이 실망스런 치졸한 작품이었다. 다른 단편 둘은 재치가 있었고, 특히 그가 미장센을 조직하는 능력에 있어 매우 탁월하며, 특히 사운드에 관한 한 금욕적이고 또한 이미지와 대사 사이에 소박하지만 그러나 사려깊은 연관을 부여하는 재주를 지녔음을 알려주었다. 다시 본 <오래된 꿈>은 파스빈더의 <팍스와 그의 친구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도 그와 동년배일 울리히 사이들이나 미하엘 하네케 혹은 로베르 귀에드기엥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정묘한 사회적 사실주의나 노동계급 출신 게이의 삶에 관한 치밀한 재현은 무조건적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 <영화보다 낯선>이란 프로그램을 섭렵하지 못한 것은 후회할 일이다. 조나스 메카스나 론 라이스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나지 못한 것은 분명 후회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화를 보기 위해 생계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 아이작 줄리앙의 근작을 보지 못한 것 역시 안타깝고 분하다. 그렇지만 마침 상영일정에 포함된 패트릭 킬러의 작품들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는 탈근대적인 도시인 영국에 관한 일종의 “도시의 교향곡” 풍의 영화를 만들려는 듯 했다. 그는 어느 산보객을 내세우며 런던이란 도시를 주유하고 도시의 풍경과 산보객의 파노라마적인 시선을 제시하려 애쓰지만 그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그저 그 영화는 수다스럽게 기억과 체취가 사라진 도시에 대한 한탄만을 늘어놓고 새로운 도시에서 배양되는 지각의 세계를 근거 없이 혹은 막연하게 축복한다. 그는 너무 책을 많이 읽었거나 아니면 남에게 지루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듯 하다.
– 끌로딘 에이지크만과 기 피만의 실험영화는 볼 만 했지만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그들은 영화와 사진의 연관을 대신하여 영화와 회화의 관계에 주목하는 실험영화 감독들 같았다. 그들은 이미지의 환영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진으로서의 영화와 이미지의 정동적(affective) 능력을 강조하는 회화로서의 영화 가운데 후자의 편에 서있음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시도했던 영화의 이미지의 회화적 성격 – 이 말은 이제 우스운 말이 될 것이다 -을 향한 집요한 관심은 디지털 영화 이후의 시대엔 매우 진부한 물음이다. 아마 많은 이들은 그들이 카메라를 통해 시도했던 수많은 이미지의 회화적 변조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중인화와 빛과 색채의 다양한 변용을 통해 보여준 이미지들은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 사이에서는 이미 식상한 것이거나 흔한 것이다.
– 전주에서 체재하는 어제, 내겐 귀빠진 날이었다. 후배 녀석이 케익과 선물을 준비해 날 감격케 하였다. 동석했던 전주의 토박이 게이들도 내게 후한 축하를 베풀어주었다. 산란해진 마음을 빗질하기 위해 갔던 여행이기도 했던 터라, 그들의 우연한 호의가 날 가격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칸 영화제로 가게되었다는 소식이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한국 영화의 개가라고 뿌듯해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문득 최근 이혼을 선언한 어느 개그 우먼 생각에 마음이 신산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는 데 정작 현실에서 여자는 남자의 동네북이기 때문이다. 사실무근이라고 남편은 주장한다지만, 사람들은 얼굴과 이름을 제일로 여기는 여자 연예인이 그런 결단을 내렸을 정도면 여염 여성들은 오죽 했겠는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를 가정 내 폭력을 보여주는 흔하고 뻔한 또 하나의 사례로 치부해서는 안될 듯 하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확대되고 또한 실제로 가장이 되기도 하면서 남자들이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자들이 이런 왜소해진 지위를 인정하기 힘들어하고 그에 따른 심리적 반동으로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게되었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일리가 없지 않다. 이미 많은 가족의 경제적 재생산 형태가 남성 가장의 임금 소득에 의존해 있지 않다. 남자들이 벌어다 준 돈으로 살림하는 여자라는 공식은 현실에서는 사라졌는데, 남자들의 뇌리에는 아직 깊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최근 높아지는 이혼율에 제동을 거는 방편으로 정부는 이혼 부부들이 반드시 의무적으로 상담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소통하며 지내는 연습을 시킨 후에 결혼할 자격을 주는 결혼인증제를 도입하자고까지 제안한다. 손쉽게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적어도 이혼이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방편인 한 그것은 결혼을 좀 더 민주화하는 장치가 된다. 그렇지만 이혼을 선택할 자유가 보장된다고 결혼이 민주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뇌리에 박힌 기억에 매달린 채 달리 살자는 요구가 곧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여기는 한, 결혼은 다시 폭력에 말려들 것이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남자의 지위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평등을 요구하는 주장을 이렇게 곡해하는 것은 결혼뿐이 아니다 최근 의회로 진출한 민노당의 평등의 요구를 부유층의 재산을 뺏는 짓이라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평등의 에토스에 무감각하다. 상생이란 말이 인플레를 일으키는데 정작 평등의 상생은 안 보인다. 왜 일까.
<서울경제신문 칼럼에 쓴 글>

2004. 4. 23.

– 왜 이렇게 마음이 수상한지 모르겠다. 중독되거나 몰입되거나 하는 이상항진상태에서 살았던 몇 해 동안의 삶의 여독인가. 문득 며칠전 글을 읽다 생각난 것이 떠오른다. 요즘 한참 자기강화, 자긍심 따위를 떠들어대고 장려하는 사회적 변화를 살피다가 의존증후가 미국인의 최대의 악폐라는 이야기를 접했다. 곰곰이 살피니 비단 미국의 일만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심지어 나 역시 그런 의존증후에 시달린다는 확신이 든다.
– 알콜중독인 남편에게 시달리면서도 더욱 그에게 매달리는 아내들을 두고 의존 증후라고 한단다. 제 정신으로 보면 제게 이로운 것이 뭔지를 헤아릴 줄 모르고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이들에게 자주 떠넘기는 비난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긍심도 부족하고 자기를 강화시키려는 의지도 빈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난 그런 “자긍심과 자기강화에의 의지”를 탈근대적인 자아를 조성하는 또다른 권력에의 의지의 변종이라고 본다. 차라리 난 그런 사람들을 모질지 못한 사람이라고 위로할 것이다.
– 의존증후는 사실 자신의 피해와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는 왜곡된 희생이 아니라 어떤 윤리적 선택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복종하려는 욕망은 지배의 결과를 계산하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지배가 있어 복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자신이 고안해 낸 덫에 타인을 지배의 위치에서 자리잡도록 꾀어내는 것은 아닐까. 매를 맞으면서 함께 사려는 강한 욕망을 굽히지 않는 것, 그것이 거래하는 무엇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내어야 옳지 않을까.

–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던 소설의 어느 귀퉁이에서 뻔한 말 한토막에 정신이 욱신거렸다. “속 깊은 대화”라는 글귀였는데, 그게 돌부리처럼 눈에 채였다. 그리고 혼자 속 깊은…속 깊은….을 뇌였다. 내가 언제 누구와 속깊은 대화를 나눴었지… 가물하기도 하려니와 숫제 전혀 내 생애에 그런 일은 없었던 듯한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몹시 슬펐다.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자 임태훈을 석방하라

또 한 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가 감옥에 갇혀 재판 중에 있다. 그는 성공회대학교 엔지오대학원에 재학 중인 평범한 청년이다. 그 역시 여느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와 같이 자신의 윤리적 신념과 결단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자라는 점에서 다른 병역거부자들과 다르다. 최근 그는 자신이 증거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음에도 구속 결정을 내린 당국의 판결에 항의해 25일 남짓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하였다. 초췌한 모습으로 재판정에 출두한 그의 모습을 본 그의 벗들은 모두 안타까운 심정을 누를 길 없었다.
그의 이름은 임태훈이다. 그는 한때 동성애자인권연대의 활동가로서 동성애자의 인권 현실을 바꾸기 위한 투쟁에 헌신하였고 현재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회원으로서 역시 동성애자의 사회적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투쟁에 진력하여 왔다. 또 그는 성공회대학교 엔지오대학원에 진학하여 동성애자 에이즈 감염자의 문제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최근의 탄핵 정국을 둘러싼 소란에 파묻혀 그의 고독한 양심적인 병역거부는 세인의 관심에서 벗어난 채 벌어지고 있다. 같은 동성애자로서 그리고 그의 선배이자 벗으로서 나는 그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그가 벌이는 싸움이 고독하지만은 않음을 알리기 위해 이 지면에 글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였음을 밝혔다. 아울러 현재의 병역제도 안에 포함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을 폐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군복무에 적합한 적성을 확인하고 검증한다는 명분에서 이뤄지는 설문에서 성전환자를 비정상으로 규정하고 이에 해당되는 이를 군복무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것을 비판하였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군복무는 남성에게 중요한 권리로 인식돼 왔다. 근년 논란이 되었던 군가산점 제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군복무는 곧 남성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서 인정받고 대우받도록 하는 중요한 권리의 제도였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군복무의 권리에서 배제된 성적 소수자는 취업은 물론 공직에서의 활동에 심각한 차별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미 비공식적으로 동성애자임을 밝힌 많은 동성애자들이 일종의 심리적 이상으로 판정되어 여러 굴욕적인 대우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처지에 비추어볼 때 그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군복무를 거부한 것과 군복무를 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 그리고 군복무 중에 있는 성적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전혀 어긋난 일이 아니다. 그는 인권운동가로서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군복무를 거부한 것이다. 또한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서 그는 군복무가 한국사회에서 성인 남성으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고 통합되는 중요한 통로임을 주지하고 있다. 따라서 군복무가 곧 성적인 소수자를 차별하는 중요한 사회적 제도임을 고발하고 비난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양심적인 병역거부자에 머물지 않고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떳떳이 밝힌 채 한국의 병역제도의 반인권성을 문제삼고 있다. 나는 이미 커밍아웃한 동성애자로서 한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이 얼마나 대단한 실존적인 결단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또한 그것이 단순히 윤리적인 용기로서 치하받기에 앞서 또한 동성애자 사회가 형성되기 위한 필수적이고 피할 수 없는 행위임을 잘 알고 있다.
커밍아웃은 동성애자들이 침묵에서 벗어나 서로를 지원하고 결속시키는 중요한 사회적 활동의 출발점이다.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들어 커밍아웃을 반대하는 기류가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한 명의 개인적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살 권리라면 비겁하고 또한 옹졸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이 속한 크고 작은 사회에 자신이 성적 소수자임을 알리는 일은 그 사회의 모든 곳에 스며 있는 이성애적인 규범과 질서를 새롭게 조명하도록 이끈다. 결국 커밍아웃은 동성애자가 자신의 거역할 수 없는 삶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속한 사회에 차이를 일깨우고 변화를 촉구하는 싸움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그가 굳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양심적 병역거부에 참여한 것은 나를 포함한 성적 소수자에게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임태훈의 투쟁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의 외로운 싸움의 벗이 될 것을 자청한다. 또한 그의 조속한 석방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더불어 군대 안에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적 소수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받으며 복무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소수적 성정체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이 차별과 모욕을 받지 않은 채 병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복무 기준과 교육이 이뤄질 것을 요구한다. 다시 한번 밝힌다. 동성애자로서 그리고 평화주의자로서 나는 임태훈씨의 투쟁을 지지한다.
서동진/문화평론가
http://www.hani.co.kr/section-001062000/2004/04/001062000200404071925151.html

나는 동성애자이므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나는 게이 남성으로서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 그것은 보다 나은 삶을 향한 나의 꿈이 개인적인 소망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게이라는 나의 정체성이 나의 개인적인 욕망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동성애자는 가부장적인 자본주의 사회가 등장하며 만들어진 역사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는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고 극복하려는 진보적인 전망과 가치에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사회는 이성애적 가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유일한 친밀한 인간관계로 만들었다. 노동의 가치를 분배하는 제도는 언제나 이성애 가족과 결혼이었으며, 그것에 의해 우리는 삶을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탓에 이성애자와 구별되는 다른 모든 성의 주체는 차별과 적대의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이성애 중심적인 자본주의사회를 극복하려는 꿈을 함께 꾸는 벗으로서 민주노동당을 선택한다. 물론 우리는 한국 사회를 비롯하여 많은 부유한 자본주의 사회들이, 다양성을 떠들며 동성애자들을 사회에 포용하는 시늉을 보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나아가 높은 소득을 누리며 가족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세련된 삶을 산다고 동성애자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조차 한다. 그렇지만 동성애자를 일러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개척자로 칭찬한다고 해서 성적 소수자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작해야 부유한 일부 남성 동성애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려니와 거기서 가리키는 동성애자란 소비자로서의 동성애자이지 노동자이자 시민으로서의 동성애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별과 불평등을 극복하는 올곧은 노력을 통해서만 성적 소수자의 삶 역시 변화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점에서 더욱 나는 민주노동당을 신뢰하며 이번 총선에서도 그들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나는 민주노동당이야말로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초래한 모든 착취와 불평등을 해결하고 또한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 금융 위기 이후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삶의 고통에 직면해 있다. 빈곤은 심화되어 가고 있고, 실업은 늘어만 가고 있으며, 교육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서비스는 기업화되어가고 있다. 규제완화와 유연고용, 자기계발과 국제경쟁력을 내세우며 정부와 자본은 우리에게 위협을 일삼고 있다.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의 꿈은 멀어지고 있고 미국의 독단적인 패권주의에 종속된 채 더러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이 모든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바꾸어 가는데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가장 미더운 대안일 것으로 믿는다.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신체 없는 기관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신체 없는 기관 – 신체의 재현과 그 위기


재현의 위기 그렇다면….
<아침형 인간>이란 자기계발서가 최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기계발서의 유행은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명민한 사회학자라면 이러한 자기지침서(self-help manual) 혹은 자기계발서의 유행을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사회의 사회적 증상(social symptom)으로 진단하고 그것을 분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사회학 혹은 문화이론으로부터 이러한 자기계발서에 대한 분석이 적잖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학자들이 자기지침서를 분석의 대상으로 정의할 때 주로 의지하는 개념은 “자아(self)”이다. “재귀적 근대성(reflexive modernity)”이란 개념으로 후기 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분석하는 앤서니 기든스의 입장 역시 자아 정체성이란 개념의 둘레를 맴돈다. 후기 근대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그의 저작의 제목은 <근대성과 자기정체성>이었다.
그가 말하는 후기 근대의 “성숙한 자아”란 재귀적 근대성의 체계 안에 놓여 있다. 재귀적 근대성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식은 근대화는 곧 탈전통화라는 것이다. 탈전통화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규정하는 일반적인 규범을 합리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옮겨놓는다. 줄여 말하자면 이는 ‘감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하여’, 전통이나 미신과 같은 억견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앤서니 기든스는 탈전통화라고 불리우는 근대성의 영향은 정치나 경제와 같은 공식적인 사회적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탈전통화의 논리는 이제 일상적인 삶의 영역으로까지 흘러들어 미만해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우리는 몸에 관한 의료과학의 공식적 지식의 일의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대체의학을 선택한다, 우리는 친밀성의 유일한 합법적인 형식인 이성애적인 결혼을 상대화하고 있으며 다양한 대안적인 가족을 인정하고 있다 운운).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후기 근대이고 성숙한 근대성이다. 이제 탈전통화라는 근대의 비판적 해석학은 바야흐로 결혼과 가족관계, 그리고 사랑이라는 친밀성의 영역까지 침투하고 있다. 그러나 기든스가 예상하는 후기 근대의 성숙한 주체의 모습은 혹시 그 반대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 아닐까. “감히” 자신의 정체성과 자유를 개척하는 성숙한 근대적 주체의 재귀성은 거꾸로 뒤집혀져 우리의 삶을 옥죄는 “금지 없는 명령”이 된 것이 아닐까.
– 문학과 경계 봄 호에 기고한 글의 도입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