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훈을 후원하는 모임을 제안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이유로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어있는 우리의 벗, 임태훈씨의 1심 재판이 끝났습니다. 지난 5월 15일 세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이하며 우리는 아직도 서울구치소에 갇힌 수인의 신세에 놓인 임태훈 씨를 상기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최근 많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의 재판 과정에서 나타난 불구속 수사, 보석 허가, 재판 유보 등의 흐름과는 달리 재판부의 “독특한” 재량과 판단에 의해, 실형 1년6개월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에 그의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고 동성애자의 군대 내에서의 차별을 폐지하는데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번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임태훈 씨를 지지하고 후원하는 뜻을 한데 모으고자 합니다. 다행히 최근 서울 남부지방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 3명에게 무죄판결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헌법이 보장하는 제 권리와 합치하는 것임을 뒷받침하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임태훈씨의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가 보여준 인권을 향한 참담한 인식에 대한 실망에서 벗어나 이후 재판 과정에서 그의 평화를 향한 충정과 양심적인 결단이 보다 깊이 존중받고 그의 조속한 석방을 포함한 전향적인 판결이 이뤄지길 기대하여 봅니다. 이에 우리는 임태훈씨가 지난 재판 과정에서 겪었던 부당하고 모멸적인 대우를 지적하고 아울러 다음의 재판 과정에서 우리가 품은 기대와 희망을 밝히고자 합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임태훈씨는 최후 진술과정에서 병역거부자 구속수사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던 중 판사의 제지에 의하여 최후진술이 중단되는 폭력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또한 재판부는 심리 과정에서 병역거부라는 고통스러운 결단을 내려야 했던 배경이었던 인권운동가로서의 전력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우리를 실망케 하였습니다. 재판부는 피고인 임태훈 씨의 전력에 관한 기록에 충분히 제시되었던 그의 인권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참고하지 않은 채, 그에게 “무슨 인권활동을 했느냐”, “국제사면위원회는 어떤 단체이냐”는 등의 납득키 어려운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는 재판부의 성실한 심리의 태도를 의심케 할 뿐 아니라 피고인 임태훈씨의 동성애자 인권운동가로서의 삶을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를 품게 합니다.
우리는 이런 재판의 경과를 지켜보며 임태훈 씨의 동성애자로서의 소수적 성정체성에 관련된 편견이 재판부의 심리 및 판결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인정하기 어려운 의혹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은 헌법의 근본적인 정신에 위배될 뿐 아니라 인권의 규범에 위반된다는 것이 널리 인정받고 있는 지금, 재판 과정에서 임태훈 씨의 군대 내에서의 동성애자 차별에 대한 항의와 비판은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 과정에서 재판부는 그의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에 관한 언급과 검토를 기피함으로써 동성애자로서의 그의 특수한 지위와 입장을 무시하였습니다. 임태훈씨의 동성애자 정체성은 양심적인 병역거부를 결단하게 하였던 중요한 이유이자 근거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는 그의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자 하는 노력을 거부함으로써 매우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알다시피 현재의 병역법은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된 상황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병역법은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인 상태이고 그 위헌성 여부가 아직 판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 연유로 현재까지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많은 재판이 최종 판결을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로 연기하여 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임태훈씨의 경우 다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들과 달리 구속 수사를 받음은 물론 보석 조치까지 거부당함으로써 심각한 인권 침해를 겪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최근의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재판부의 무죄 판결은 항소심에서 보다 전향적인 결론이 나타나길 기대하는 우리의 희망에 작은 용기를 더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임태훈씨의 예정된 항소심에서 재판부의 전향적인 접근을 기대합니다. 물론 양심적인 결단을 내린 그에게 어떤 증거 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음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재판부는 마땅히 보석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재판부가 그의 양심적 결단을 존중하고 평화와 인권을 향한 그의 충정을 이해하는 결단을 내리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는 군복무에 따르는 노역과 수고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살상의 전쟁을 거부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는 임태훈씨가 대체복무제의 도입과 개선을 한결같이 주장하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체 병역 의무 이행 대상자 가운데 60%정도만이 현역병으로 복무하고, 나머지 40%는 병역특례 등 기타의 방법으로 병역을 이행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 복무가 곧 안보불안을 야기한다는 식의 주장이 전연 근거 없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안보와 반공이란 이름으로 국민의 인권을 서슴없이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열망을 질식시켰던 과거의 군사독재 시대의 논리로 병역 의무의 이행을 재단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한 개인의 양심에 따른 결단임과 더불어 안보와 국가적 이익이란 이름으로 국민을 억압적으로 지배하고 훈육시켰던 구 시대의 마지막 잔재를 극복하는 일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친근한 벗, 임태훈 씨의 양심적 병역거부의 결단을 지지한다는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의 조속한 석방과 군대 내에서의 어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사라질 때까지 힘차게 투쟁할 것을 다짐합니다. 아울러 그의 처지에 공감하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참여와 지지를 기대합니다.
2004. 5. 24.
양심적 병역거부 동성애자 임태훈을 지지하는 동성애자들의 모임
(서동진, 중전, 달래, 승우)

두 시대를 살기


사회과학적으로 말해 나는 포드주의적 자본주의와 이 잘난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두 시대를 한꺼번에 겪어야 하는 불행한 아니 多福한 세대의 주인공이다. 군사독재와 개발훈육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맞이한 이 찰나의 변화에, 나는 거의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다. 그 어리둥절하고 불안한 심정은 크게 두가지의 증세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혐오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우울해지거나 아니면 망명객의 심정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주변에서 배회하는 것이다. 이런 유아론적인 태도는 곧장 자신을 빈약한 윤리적인 늪 속으로 끌어내린다. 위악하고 타락한 세계를 향해 적대감을 품고, 그에 동조하는 배신한 모든 이들에게 가눌 수 없는 원한을 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아주 자포자기적인 태도로 혹은 조금은 그로부터 원기를 회복한 듯한 착각에 빠져 결단을 꿈꾸기도 한다. 나의 경우 몇 해 전 그것은 이를테면 탁발승과도 같은 삶을 살거나-진정코 나는 IMF 직후 프란체스코 수도회나 빈민구제단체에 평생을 바칠 생각에 시달렸다.- 아니면 더 가난하고 더 참혹한 나라로의 이민을 가겠다는 유혹에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나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혹은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에 가야할 것 같은 망상을 버리기 어려웠다(아직도 나는 욱한 심정이 들면 서둘러 짐을 싸들고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물론 내가 마더 테레사나 레지 드브레같은 인물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었던 세계, 그리고 내가 이룩하고자 했던 세계를 위해 자신의 삶을 한결같이 다스리던 의무를 저버렸다는 분노와 수치심 때문에 나는 도피하고 또 되살아나고 싶었을 것이다. 리베르탕의 자격으로 날 호명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인습과 전통, 규범에 반하는 이데올로그의 화신으로 날 초대하는 자리에서, 나는 스스로가 몹시 역겨웠고 지겨웠으며 세상이 모두 피곤했다. 그 때 결단을 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일까 아니면 후회스런 일일까. 그것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아직 그 때의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아직 그 근처에서 꿈지럭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런 윤리적인 선택을 저버린 것을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빈자들을 돌보는 우리 모두의 윤리적인 책임, 자신이 세계를 향해 지고 있는 빚을 적극적으로 떠맡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뿐더러 위험하기조차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빈민구제기관의 훌륭한 사제가 되는 것보다 말만 많은 혁명가가 더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변화를 꿈꾸는 이들에게 씌워지는 가장 손쉬운 모욕과 비난은 그들이 말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에 분노하는 이들이 정작 온전히 말의 힘을 입증하듯이 나는 말에 패를 걸고 희망을 상징화하고 그를 위한 프로그램을 그리는 일에 전력하고 싶다. 그리고 그게 내가 선택한 아니 선택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접어든 길이었다.
지구화니 구조조정이니 따위에 관한 글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그간 내 앞으로 흘러갔던 변화의 실체를 가늠하기 위해 자료와 문서들을 뒤지면서 또한 지난 신문들을 다시 꼼꼼히 읽으면서 나는 내가 접어든 세계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는 더 많은 자유주의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사회주의자에서 나는 그 자유를 향한 꿈이 이미 질식할 듯한 새로운 명령이자 규범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사실 자유라는 말은 이제 오염될만큼 오염되었고, 다양성-차이-시민-자율같은 말은 가진 자들의 말이 되어 입에 담기조차 민망하다. 87년의 민주화가 열어놓은 환기창을 통해 권위와 획일에 찌든 삶을 살던 우리는 모두 자유롭고자 했고 더 많은 상상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고 더 많은 위반적인 삶을 현실에 등록시키려 애썼다. 그래서 언더그라운드니 인디니 올터너티브니 하는 등록상표가 붙은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숭배했고 한결같지 않은 고유한 삶, 특이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축복했다. 히피의 전설을 다시 듣고, 비트 세대에 관한 소문을 수집했으며, 68혁명의 뒤안에서 벌어진 그 아름답고 현혹적인 소동의 현장에 입회하지 못했던 것을 통탄했다. 그리고 또한 새롭게 읽고 듣고 보아야할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는 맑스와 레닌을 넘어 푸코와 들뢰즈를 읽었고 프로이트와 라캉을 읽었다. 심지어 니체도 백치같은 문학청년의 염세적 아포리즘의 운명에서 구제하였다. 또한 우리는 밥 딜런과 찰리 파커, 부르스 스프링스틴 그리고 벨벳 언더그라운를 들을 수 있었다. 고다르와 안토니오니, 오시마, 그리고 모든 B급 영화와 심야영화들을 한꺼번에 보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새로운 잡지를 창간하고 싶었고, 전위적인 지식인-예술가 그룹을 만들고 싶었다. 페미니즘과 게이운동이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지고 공중보건과 위선적인 도덕의 나락에 빠진 우리의 섹스를 만회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때 덩달아 마치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치듯이 악몽과도 같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등장하였다. 구조조정,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유연화같은 말들에 익숙해지고, 우루과이 라운드니 WTO, OECD, IMF같은 말들이 흉흉하게 떠돌 때도 역시 우리는 아직 충분한 함량에 이르지 못한 자유를 찾아 우리는 서성이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다들 그랬겠지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불안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몇 해 뒤 과거의 꿈이 시들해지고, 기사거리를 찾는 싸구려 일간지와 주간지의 문화부 기자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의 유행을 뒤쫓는 하이애나같은 마케팅 담당자들과 광고업자들, 사진가들과 디자이너들에게 우리가 포위당했다는 걸 문득 느꼈을 때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반공훈육자본주의로부터의 탈출하기 위한 우리의 반항이 어느새 소비자본주의의 미끼이자 유혹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클럽과 대안공간, 영화제와 축제, 파티 그리고 반항적인 예술가들에게 염증을 느끼고 심지어 혐오감을 가누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소아병적인 태도이다. 그렇지만 뉴에이지주의와 자기계발의 잡탕, 소비자적인 라이프스타일의 생산자가 되어버린 문화비평의 음란한 공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냉소적인 빈정거림으로 그들과 굳이 불화를 일으키며 그 자리에 참석해야 할 의무를 찾기 어려웠다.
물론 아직도 나는 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풍경에서 탈출할 신뢰할만한 꿈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온갖 버림받은 천민들과 혁명가들이 모여들어 만들어낸 코뮌을 꿈꾸기엔 서울은 너무 거대하고 첨단이다. 브라질에 있었다는 카누도소를 상기하며 코뮌에의 꿈이 박멸당한 세계를 비탄하는 지젝의 맥빠진 이야기에 지지를 보내고 싶지 않다. 시애틀에서의 반세계화 투쟁에 전율하며 새로운 희망을 역설하는 이들에게서도 나는 별다른 흥분을 느끼지 않는다. 불과 지척에 우리는 수십만이 운집한 그리고 피의 쿠데타를 감수하겠다는 각오로 싸운 거리에서의 투쟁이 있었고 아직도 절박한 투쟁은 도처에 있다. 사회협약과 거버넌스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정부에 농락당하고 있는 같은 세대의 많은 벗들에게 나는 더 이상 실망도 않는다. 그들도 한 세대 전체를 덮어 누르고 있는 미망에 갇혀 있을 것이다.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고, 반공주의라는 파시즘의 훈육으로부터 벗어나고, 시민사회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사회를 향한 그들의 꿈은 그리고 공정한 분배라는 불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그들의 희망은 건강한 것이고 또 배반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문제는 그런 희망은 거의 모두 가짜라는 것이며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가장 나쁜 변화의 전략을 지원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더 많은 시민사회의 참여는 결국 국가라는 권력에 매개되지 않은 지배를 낳는 것이고, 아무런 책임질 주체가 없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결사 속에서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돌보아야 할 책임을 떠맡게 된, 불행하고 참담한 “시민” 아닌 “벌거벗은 삶”으로 남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자유로운 욕망을 억압하는 권위와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더 이상 급진적이지 않으며 심지어 거꾸로 가장 나쁜 노예화의 회로에 흡수되는 길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나는 다시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아직 나는 그 삶의 불안한 기분에서 어떻게 다음의 길로 옮겨가야 할지 모른 채 여전히 궁리만 하고 있다. 몇 해 동안의 우울한 마음의 행적을 어떻게든 요약하고 싶은 심정도 아마 그런 궁리만 하며 서성대는 삶의 부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친밀성의 상품화 – 인맥관리 혹은 네트워킹의 문화

미니 홈피와 블로그 – 그들의 쾌락, 그들의 욕망
지금 20대의 가장 큰 소일거리를 꼽자면 당연 미니홈피와 블로그를 들락거리는 일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좀 “논다”는 이들은 너남 없이 블로그와 미니홈피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다. 틈만나면 “파도타기”를 하면서 혹은 “블로깅”의 사슬을 주유하며 인터넷을 쏘다닌다. 오죽하면 가르치는 몇 수업에서 우리 시대의 일상문화를 관찰하고 해석하는 글을 쓰라 했더니 너남 없이 미니홈피와 블로그 이야기를 내놓는다. 그만큼 인터넷에서 소일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증좌일 터이다. 그렇지만 하필 그것이 왜 게임 사이트나 정치 사이트가 아니고 미니홈피며 블로그인지, 곰곰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포털 사이트들 역시 사용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블로그 서비스를 다투어 시작하였다. 내로라하는 대형 인터넷 사이트들은 블로그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런 서비스를 기획하고 또 그것의 흥행 성적을 평가하는 이들이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대개 블로그나 미니홈피를 인맥관리라는 콘텐츠 상품으로 정의한다. 사실 이런 사이트를 오래 전부터 이용했던 이들은 그 사이트들이 처음엔 인맥관리를 통한 자기 계발 사이트로 마케팅되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굳이 인맥관리란 용어를 들먹이며 이런 서비스를 이용할 필요는 없다. 이런 사이트를 이용할 때 사용자들은 인맥관리는 타산적인 이해와 목적을 염두에 두며, 줄여 말하면 “도구적인” 태도로 접근할 필요가 없다. 굳이 인맥관리라는 이름을 빌어 자기의 관심과 의지를 동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인맥관리는 우리 시대의 저류를 관통하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이기 때문이다. 미니홈피나 블로그는 “인맥관리에의 의지”라는 우리 시대의 에토스를 상품화하는 다양한 대상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것에 특별히 다른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계발”의 문화로 부를 수 있을 우리 시대의 문화적 정체성이 평범한 일상생활이 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결국 미니홈피와 블로그 그리고 숱한 인터넷 문화의 변종들은 인맥관리로 압축되는 새로운 자본주의사회의 문화적 정체성을, 자발적으로 혹은 즐겁게 집행하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인맥관리 – 탈근대자본주의의 문화적 에토스
구경제의 시대가 “지능지수(IQ)”의 시대라면 신경제의 시대는 “감성 지수(EQ), 인맥 지수(NQ)”의 시대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신기한 주문으로 들리지 않는다. 신경제의 다른 이름은 물론 지식기반경제이니 지식정보사회, 포스트자본주의니 네트워크경제니 글로벌 경제니 하는 말이다. 이를 대변하는 이들은 구경제의 시대에 직업적인 활동을 하는 이의 능력은 이른바 숙련이나 기술같은 이른바 인지적인 지식이었다면, 신경제의 시대에 노동하는 이의 능력은 감성과 인간관계의 능력을 포함한 모든 것이라고 강변한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감성적 가치와 네트워크 능력 등이라는 주장이 새로운 경영학의 신조가 되고, 이를 구체적으로 응용하는 취업, 인사관리, 조직 설계 등의 다양한 경영 기법 담론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지 이미 오래이다. 그리고 앞 다투어 경영의 구루(gurus)나 경영학자, 직업상담가, 미래예측가 혹은 자기계발전문가들은 “삶 전체”의 능력이 기업과 회사에서 필요한 역량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들의 말은 어느 정도 옳다. 컨베이어 벨트로 운반되는 노동대상에 규칙적이고 표준화된 지식으로 세분된 이른바 “노동”을 투입하던 과거의 공장 노동의 이미지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이 경고하듯이 물론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화되거나 세계의 공장인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의 나라들로 “아웃소싱”된 것에 불과하다(혹은 전에 없이 참담한 조건에서 불완전한 고용상태를 감수하며 일을 해야하는 글로벌 도시 내부의 초과착취 공장(sweatshops)도 있다). 그렇지만 브랜드화된 상품의 세계에서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더 이상 범용품이나 제품이 아니라 상징적 가치나 소비의 규범, 혹은 라이프스타일이라면, 결국 그러한 가치를 불어넣는 노동은 어떤 종류의 일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신경제와 함께 성공을 거둔 또 하나의 우리 시대의 표어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른바 “지식노동자”란 개념일 것이다. 물론 지식노동자란 지식인 더하기 노동자, 훨씬 더 똑똑해진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식노동자란 개념은 물론 변화된 자본주의 경제에 필요한 새로운 노동자의 이미지를 제공해주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그리고 노동에 참여할 준비를 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사회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지식노동자는 변화된 시대에 노동자로서 어떤 자질이 필요한지 정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은 노동자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루고 체험해야하는지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지식노동자는 또한 평생학습의 주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경제의 노동자가 학교 교육을 졸업하면 더 이상 공부를 않아도 되는 노동자였다면 신경제의 노동자는 평생학습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좋은 노동자란 급속히 바뀌는 시대의 흐름을 재빨리 따라잡고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자기계발문학이자 대중문학 가운데 하나일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의 주인공들처럼 우리는 자신의 실패와 정체를 남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이처럼 지식노동자란 말에는 자기를 구체적으로 살피고 돌보는 태도 다시 말해 자기(the self)의 윤리가 바뀌어야 한다는 압력과 요구가 스며있다. 따라서 구경제에 필요했던 노동자와 달리 신경제가 필요로 하는 직업인은 누구인가와 같은 일종의 객관적인 설명을 담는 듯 보이지만 지식노동자란 개념은 노동하는 주체가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과 목적(telos)을 이끌어내고 또한 독려하는 새로운 장치이자 테크닉이기도 하다.
빽에서 인맥까지 – 능력으로서의 인간관계
그런데 이런 지식노동자의 개념이 요구하는 “탁월한 능력”은 지극히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이미 형식화되어 있으며 그것을 획득하고 평가받는 방법과 절차가 잘 알려져 있는 과거의 능력과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경제를 움직인 중요한 일의 원리였던 테일러주의(Taylorism)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란 영화를 통해 이미 테일러주의의 풍경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것은 아직도 현대자동차나 대우중공업과 같은 공장을 움직이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하다. 테일러란 사람이 창안했다는 과학경영기법은 말 그대로 노동자들의 일을 세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여 이를 노동의 규칙과 질서로 삼는 것이었다. 이는 크게 보아 일꾼들이 일하는 시간의 흐름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기술이었다. 규칙적으로 운반되는 노동대상, 시간에 따라 관리되는 일과 그에 연계된 보상(이를테면 월급, 일당 등의 임금 체계)은 테일러주의의 핵심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성과급과 연봉계약으로 바뀐 신경제의 기업과 많이 다른 것이었다. 그렇지만 테일러주의는 일의 과학자들이 세부적으로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설계한 노동의 종류와 질에 관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고 노동자가 될 사람들은 모두 학교와 직업교육을 통해 그러한 노동에 필요한 능력(기술이나 기능 따위)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제 신경제의 노동자들은 그런 능력만으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이 신경제의 옹호자들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멀티형 인간, 다중지능같은 용어는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능력이 전연 다른 것임을 알려준다. 인맥관리가 노동자의 능력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배경이다. 감성마케팅이니 정서 자본이니 체험경제니 하는 말은 이제 우리가 소비하는 상품,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이 더 이상 물건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 혹은 취향(taste)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런 점에서 인맥관리는 노동자의 중요한 능력이며 적극적으로 계발하고 관리해야하는 자원이 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맥관리란 것도 알고 보면 왕년의 마당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니냐며 빈정댈 수도 있을 것이다. 인사청탁에서 차떼기에 이르기까지, 시쳇말로 “빽”을 통해야 일이 되던 사회 기풍을 떠올린다면, 이런 조소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동사무소에서부터 청와대까지 뒷줄과 뒷돈을 대지 않으면 될 일도 안되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이러한 “비공식적인” 연줄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고, 다들 비밀장부와 수첩을 통해, 사과상자와 빳빳한 현금을 통해 그 연줄을 기름지게 살찌워왔던 터에, 인맥관리란 말로 유난을 떨 것은 없지 않을까. 물론 이는 얼핏 생각하기엔 맞는 말처럼 들린다.
그렇지만 “빽”이 자신의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 동원해야하는 얼마간 비겁하고 떳떳하지 못한 예외적인 행위이자 순전히 도구적인 선택이었다면, “인맥관리”는 그와 사뭇 다르다. 인맥관리는 어떤 이해를 실현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끌어들이는 부정한 선택이기는커녕 그 자체 가치로서 추켜올려지며 특별한 목적이 없더라도 언제나 행해져야 하는 활동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경영담론들이 들먹이는 인간관계는 고객으로서든 직원으로서든 우리가 맺는 모든 대인관계가 곧 가치를 창출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그것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표가 된다. 왜냐면 신경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생각엔 인맥 자체가 자원이고 그로부터 가치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맥관리의 담론은 곧 자기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연줄을 맺은 도구적인 이해관계의 타인과 감정적으로 친밀한 타인들 사이의 구분을 지운다. 연줄이나 빽으로 연결된 사람이 “원치 않지만” 혹은 “마음에 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사업과 성공을 위해 돌보아야할 “타인”이었다고 한다면 인맥관리의 담론은 나와 타인들 사이의 친밀감의 거리와 간격을 없애버리다. 우리는 백화점과 쇼핑몰, 병원에 들린 고객을 나의 친한 가족처럼 따뜻한 감정과 태도로 맞이하고 응대하여야 하는 것이다.
친밀성의 상품화 – 탈근대자본주의의 문화경제
친밀감을 사회적으로 조직하고 관리하며 생산하는 것이 물론 어제오늘의 일인 것은 아니다. 이미 백화점의 사원이나 비행기 승무원, 은행의 수납계원 혹은 호텔의 종업원들은 친밀감의 감정적인 관리와 통제를 통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하는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그렇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노동자들의 상품화된 친밀성의 서비스를 제공받았을 때 거북하고 불편해 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친밀감은 경제적인 거래와 교환으로부터 벗어난 자연스러운 감정이어야 하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우리”인 척하는 태도는 작위적일뿐더러 심지어 위악한 태도로까지 보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과 별로 인연도 없는데도 자신에게 친하게 구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따뜻한 친밀감은커녕 거꾸로 그로부터 친밀감 자체가 훼손당한 듯한 모욕감이나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고객이 OK할 때까지”를 모토로 삼고 있다는 기업광고와 시민들에게 이웃처럼 다가서는 행정 서비스를 실현하겠다고 공언하는 공공기관의 자기다짐에 익숙해져있다. 그리고 지나치다 싶으리 만치 자주 전화를 걸어 배송은 잘 되었냐는 둥, 더 불편한 사항이 없냐는 둥 꼬치꼬치 캐묻고 배려하는(!) 인터넷 쇼핑몰의 여직원들과 매일매일 만나고 있다. 이는 접대(hospitality)가 전문화되고 숙박업이나 관광업을 비롯한 몇몇 산업에 배타적으로 독점되었던 과거의 단계의 자본주의와 전연 다른 모습이다. 이제 우리는 공장과 사무실에서부터 소매점과 학교 그리고 공공기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접대가 불가결한 서비스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신경제를 특징짓는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을 꼽자면 단연 우리는 친밀성의 전면적인 상품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맥관리라는 “친밀성의 문화공학(cultural engineering)”은 탈근대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중요한 경제적 관행 가운데 하나이다. 조직을 관리하는 담론이자 기술로서도 혹은 노동자를 통제하고 훈련하는 담론으로서도 친밀성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상품으로 판매되고 또한 추구되어야할 가치로서도 중요해지고 있다. 체험의 경제니 미적 경제니 하는 말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정서의 경제, 친밀성의 경제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친밀성이 상품화되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맥관리는 또한 타인과의 관계일 뿐 아니라 또한 자기와 맺는 관계 역시 변화시키도록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맥관리는 무엇보다 자기의 자원으로 평가된다. 공정한 질서(?) 즉 합리적인 절차에 따라 이뤄지는 사회경제적 활동에 들러붙은 기생물이었던 연줄은 이제 인맥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나아가 기업조직과 사회활동 안에서 어엿한 능력으로 그 가치가 격상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하였듯이 지식기반경제에서는 학교교육을 통해 배운 기술적 지식이 아니라 인적 자원으로서 삶의 모든 능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관계 역시 능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네트워크 지수”로 관리되고 평가받아야 한다, 인맥관리란 자신을 강하게 만들고 성공하는 주체로 만들 수 있는 변신의 계율이 된 것이다.
“성공한 CEO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스로 가 자신의 내면을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할 뿐 아니라, 부하직원의 감성 및 니즈를 이해하고 배려함과 동시에 서로가 함께 추구해야 할 지향점을 찾아 이를 향해 자연스레 구성원들을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일간지 경제면이나 자기계발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토릭은 곧 우리 시대의 “자기(self)”의 윤리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수사학은 도구적이고 타산적인 이해집단을 조직하도 통제하는 조정자 혹은 감독으로서의 지휘, 통제가 아니라 영혼의 지도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를테면 최근 큰 유행을 타고 있는 “서번트(servant) 리더십” 담론은 기업이든 학교이든 아니면 공공기관이든 그 조직 안에서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가 감성적이고 윤리적인 인간관계임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감정이 메마른 관료제화된 조직을 인간화시키는 행복한 변화일까. 사장과 직원, 작업감독과 공원 사이의 형식적인 지위를 통해 매개된 관계가 아니라 인간 김씨 대 인간 박씨의 구체적이고 풍부한 직접적인 인간관계가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계의 원리일까. 물론 우리는 그런 주장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앞서 강조했듯이 그것은 조직의 목표와 효율이라는 기준에서 그 안에 이뤄지는 활동을 합리화하던 것을 넘어서 그 안에서 이뤄지는 감정의 교류와 각 개인이 자신과 맺는 관계 역시 합리화하는 새로운 원리가 뿌리를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맺음말 – 이중무대의 세계
인맥관리의 세계 그것은 친밀성을 상품화하고 더불어 자신을 끊임없이 타인에게 매력적이고 바람직한 주체로 빚어내도록 하는 새로운 윤리적 명령의 세계이다. 그렇지만 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삶의 계율에 강박적으로 쫓기지만 또한 동시에 그로부터 빠져나갈 냉소적인 탈출구를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당장 자신에게 친구처럼 구는 사장과 교사, 아버지, 공무원들을 우리는 인맥관리의 전문가이자 훌륭한 자기경영의 달인으로 평가하는 척 제스처를 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지위의 불평등이 엄존하는 상황에 분노할 수 있다. 그는 여전히 나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더 많은 보상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어긋난 관계를 향한 우리의 분노와 저항은 매우 뒤틀린 채 도착적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강박적으로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매력적인 연출과 자기제시의 기법을 익히면서 더불어 자신과 타인이 제공하는 모든 친밀한 태도를 부인하고 신뢰하지 않는 냉소적인 태도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따라서 휘황한 컨벤션센터의 뒤에는 음침한 호텔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인상을 보여주고 명함을 교환하며 환대를 제공하는 세계의 바로 뒤편에서 우리는 자신이 잃어버린 진짜 감정의 나, 친밀감의 핍진성(authenticity)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려 애쓰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끊임없이 새로운 글과 이미지를 게시하며 자신을 멋지게 드러내 보이는 블로그 사용자들이 곧 다른 가상공간에서 후안무치하고 파렴치한 폭언과 욕설을 퍼붓는 게시판 이용자가 되는 것이다. 타인의 눈길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눈길 아래에서 매력적인 나는 곧 다른 자리에서 난폭하고 저열한 충동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저 많은 블로그와 미니홈피의 주인공들은 누구이고 저 많은 게시판의 욕설과 조롱의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물론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맥관리의 시대에 살아가는 탈근대 자본주의적 주체의 초상이다. ■

인맥관리라는 우리 시대의 문화적 풍경


지금 20대의 가장 큰 소일거리를 꼽자면 당연 미니 홈피와 블로그를 들락거리는 일일 것이다. 인터넷에서 좀 “논다”는 이들은 너남 없이 블로그와 미니 홈피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다. 포털 사이트들 역시 사용자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블로그 서비스를 다투어 시작하였다. 이런 문화현상의 이면을 지배하는 우리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문득 떠오르는 것이 인맥관리를 향한 강박관념이다.
구경제의 시대가 지능지수의 시대라면 신경제의 시대는 감성 지수, 인맥 지수의 시대라는 말은 이제 상식처럼 통한다. 물론 인맥관리란 말도 알고 보면 왕년의 마당발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니냐며 빈정댈 이도 있을 것이다. 인사청탁에서 차떼기에 이르기까지, 시쳇말로 “빽”을 통해야 일이 되던 사회 기풍을 떠올린다면, 이런 조소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연줄은 지금의 인맥관리로 바뀌었다. 그에 대한 대우와 평가도 물론 달라졌다. 공정한 질서의 기생물이었던 연줄은 이제 탈관료제화된 기업조직과 사회에서 어엿한 능력으로 격상되었다. 이른바 지식기반경제에서는 학교교육을 통해 배운 기술적 지식이 아니라 인적 자원으로서 삶의 모든 능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관계 역시 능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네트워크 지수”로 관리되고 평가받아야 한다, 경력관리, 자기관리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인맥관리를 해야 한다, 성공하고 부자가 된 사람은 아침을 혼자 먹지 않는다, 운운의 이야기가 난무한다.
그렇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다. 이는 인맥관리가 인간관계마저 비정하게 성공과 자기실현의 도구로 삼아버린 세태를 보여주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는 친밀감마저 패키지에 담긴 상품으로 판매된다. 갈수록 관계는 접대와 사교의 이벤트 상품의 소비가 되어간다. 물론 그럴 수록에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인간관계를 찾아 배후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휘황한 컨벤션센터의 뒤에는 음침한 호텔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인상을 연출한 나의 뒤에는 어떤 진짜 감정의 나를 찾는 무대가 만들어지기 쉽다. 자신을 멋지게 꾸며 보이는 블로그의 사용자는 또한 후안무치한 욕설로 가득 찬 댓글을 쓰는 게시판 이용자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좋은 조짐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매일경제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유럽의 섹스여 안녕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상해 옮김, 문학 동네, 2004년 5월)은 “진한” 소설이다. 야하다거나 난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11분] 안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섹스와 오르가즘, 그리고 접촉과 만남은 너무나 평범해지고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11분]의 주인공인 마리아 역시 욕망의 비밀을 깨닫기 수많은 섹스지침서들을 읽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현명한 여자였기에 그 책들이 모두 공허하거나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야하기만 뿐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으며 복잡하기만 할 뿐 선명하고 단순한 그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리아가 알려주는 뜨겁고 걸쭉하고 부드럽고 몽롱한 감정의 세계에 접근하려면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할지 모른다. 그러나 소설을 읽기 전에 그에 관해 겁내거나 우물거릴 필요가 없다. 마리아는 난관에 처한 사람들의 곤경과 불안을 성실하게 기록하고 또한 진단해주기 때문이다. [11분]의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을 너무나 잘 알려준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것에도 다 이유는 있다. [11분]은 유럽의 섹스를 향한 아니 서구의 자본주의가 처분한 섹스에 관한 풍자이며 또한 치료이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내게있어 [11분]은 위기에 처한 섹스를 구해내려는 즐겁고 기름진 시도이다.
[컬티즌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우리는 그간 냉소와 환멸에 가득 찬 시선으로 섹스를 바라보는 많은 소설을 읽었다(대개 그 소설은 유럽의 소설이다. 마리아의 모험과 성숙이 펼쳐지는 스위스의 제네바는 바로 그 유럽의 축소판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먼저 섹스는 죽었다고 선언하는 소설들이 있었다. 이런 소설들은 섹스 안에 사회가 금지했던 어떤 숨은 희열, 비밀스런 삶의 에너지가 있다고 믿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거짓임을 깨달았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이토록 과대평가된 섹스, 그토록 숭배 받는 섹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섹스 너머의 세계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소설. 그 안에는 인간에게 부착된 불필요한 에너지의 원인인 성욕의 스위치를 끄려는 사람들도 있고 섹스에서 다시 순정한 사랑으로 되돌아가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섹스가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섹스란 포르노와 수많은 섹스 파티, 그리고 섹스관광을 통해 소비되는 상품으로서의 섹스일 뿐이라고 말하는 소설을 읽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섹스중독자, 음험한 원조교제의 달인, 방콕과 마닐라의 밤거리를 배회하는 배불뚝이 유럽인들, 카마수트라와 타오이즘의 방중술에 현혹된 미국인들을 만났지만 그 안에서 섹스란 너무나 볼품없고 지루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파울로 코엘료는 기적처럼 평범해지고 진부해진 섹스를 다시금 신비한 과거의 자리로 돌려보낸다. 이제 섹스에 관해 더 이상 알 것이 없다고 믿게 된 지금 [11분]은 그것은 전부 잘못 안 것이며 또한 그것은 섹스와 관계없는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11분]은 섹스란 과학자들의 세부적인 처방으로 완성될 수 없는 것이고, 더 자주 많이 길게 한다고 해서 더 만족스러운 것도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물론 그런 이야기는 절제를 통해 더 훌륭한 섹스를 만끽할 수 있다는 식의 익숙한 설교가 아니다. 그것은 브라질의 시골처녀 마리아가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몸을 팔고 한 남자를 사랑하며 겪은 휘황한 체험을 통해 겨우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마리아는 스위스의 제네바에 있는 남국의 정열 풍의 클럽에서 일하는 창녀이다. 그리고 독일에서, 영국에서 혹은 아랍과 일본에서 온 남자들은 오직 그것을 찾기 위해 온다. 그것이란 물론 섹스이며, 마리아가 알려주는 바에 의하면 기준 가격 3백 프랑에 평균 11분 걸리는 오르가즘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섹스를 찾는 가엾고 불안하며 초조해 하는 남자들이 진짜 찾고있는 것은 다른 데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마리아를 찾은 남자들은 모두 자신의 환상 속에 있는 궁극적인 결핍, 자신을 온전히 제 것이지 못하게 만드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섹스에 매달린다. 그것은 3백 프랑을 치르고 호텔 방에서 응분의 교성을 들으며 정상 체위 혹은 포르노에서 배운 체위로 치러지는 11분의 거래일 뿐이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그렇게 냉정한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이 11분 안에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안타까워하며 그녀 스스로 그것이 또한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마리아는 바로 그 남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미끼 혹은 베일에 불과한 섹스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것이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하도록 일깨우고 싶어한다.
마리아는 모험심이 강하고 총명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할 줄 아는 여자이다. 그녀는 잘못 쓴 계약서에 끌려 삼바 춤을 추는 댄서로 팔려왔고 스스로 그곳을 박차고 나와 베른가라는 제네바의 홍등가로 달려간 여자이다. 그녀는 먹고살아야 했고,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아직 자신에게 도착하지 않은 사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그녀는 많으면 하루에 세 번 남자들과 자며 돈을 벌고 브라질에 돌아가 농장을 경영할 꿈을 꾸고 남자들의 숨겨진 욕망과 꿈을 더 잘 듣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우리가 섹스에 관한 유럽 소설에서 언제나 만났던 그 사람, 랄프 하르트를 만난다. 그는 두 번 결혼을 했으며 언제나 나쁘지 않은 사랑을 나누었던 그리고 원하는 만큼 실컷 섹스를 할 수 있었던 남자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다고 믿었으며 또한 섹스에 지쳐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리아를 만났다. 랄프의 멋진 표현을 빌자면 둘은 “의식의 포옹”을 나누었고, 마리아의 표현을 빌자면 “잔이 넘치듯이” 하는 섹스, “나는 사랑이고 음악”인 섹스를 했다. 그 사이에 마리아는 어느 부유한 영국인의 꾀임에 빠져 고통을 맛보며 쾌락을 찾는 유럽식 섹스까지 모든 섹스를 섭렵하였다. 그러나 마리아가 주유했던 모든 섹스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것은 천국이었다. 나는 땅이었고, 산이었고, 호랑이였고, 호수로 흘러드는 강이었고, 바다가 되는 호수였다”. 그것이 마리아가 찾은 섹스였다.
마리아는 유럽의 섹스에 현혹되기 싫었다. 자신의 노이로제를 감추기 위해 허겁지겁 매달리던 유럽 사람들의 섹스와 그녀는 작별하려고 했다. 그녀가 자유 속에서 맛보던 사랑, 그녀가 당당히 발견하고 가꾸었던 성스러운 섹스를 잃지 않기 위해 그녀는 제네바를 떠나 브라질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전날 그는 랄프와 사랑을 나누며 마리아는 그 섹스에 도착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사랑, 자신의 섹스를 지키기 위하여, 랄프와 헤어져야만 했을까.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잔인하다. 그리고 그건 너무 유럽적이다. 마리아는 브라질 비행기로 바꿔 타는 파리의 공항에서 랄프와 다시 만난다. 물론 파올로 코엘료의 말처럼, 아름다운 해피엔딩으로 끝난 영화 이후에 우리는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듯이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다른 이야기를 발명해야 하듯이 소설은 끝난다. 마리아는 놀랍게도 사랑을 완성했으며, 섹스에게 아직도 훌륭한 권한이 남아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11분]은 그런 점에서 허무맹랑한 교훈 소설이다. 아직도 섹스에게 오르가즘이 남아있음을 일깨워주는 엽색 소설에 우리는 깔려죽을 판이다. 그렇지만 [11분]은 그 소설들 곁에서 모든 삶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필요가 없는 섹스, 섹스가 제 자신의 모습으로 즐겁게 간지럼을 피는 섹스가 있음을 알려준다.

너무나 짜증스럽군..

–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한 지지글을 발표한 이후 끼리끼리의 비판과 그에 대한 반론 이후 나는 또 우울해졌다. 역시 나는 논쟁이 지겹다. 논쟁이 공론장을 만들고 그로부터 보다 좋은 합리성을 만들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우습다. 논쟁에 참여하는 주체는 언제나 하나의 문법 안에서 순환하는 가여운 쥐이다. 지배의 담론이나 허위의 지식은 반박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효가 되거나 잊혀진다. 부디, 논쟁에 끼어들지 말자. 그것은 그를 즐기는 이들에게 맡겨도 될 일이다.
– 여성주체의 입장을 게이남성지식인은 절대 알 수 없다는 투의 언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독특한 유사페미니즘적 윤리는 이제 짜증스럽다 못해 지겹기까지 하다. 그런 류의 주장, 자신의 체험에 대해 투명한 주체라는 가정은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옳음을 위한 원리로 내세운다. 그것은 여성을 제외한 모든 주체, 나아가 여성의 핍진한 체험으로부터 소외된 주체를 비난하는. 본질주의의 가장 나쁜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염증과 경멸은 깊어만 간다. 그리고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그것과 다른 페미니즘 사이의 분열을 경계하고 언제나 전전긍긍한다. 안타깝다 못해 우울하다. 여성의 본연의 체험이란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남성적 담론은 언제나 여성의 자기인식의 조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므로 여성은 불가능한 주체라는 것, 그런 입장에서 남근주의적인 세계에 싸우는 입장을 발명하는 것이 여성의 “입장”이라는 것 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설문조사와 참여관찰과 보고와 폭로와 고백 속에서 여성주체의 잊혀진 목소리, 배제된 권리를 주장하는, 거의 판박이같은 언어의 인플레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여성의 권리는 여성의 체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언어화하도록 종용하며 그 주체를 길들이는 체계의 힘으로부터 유도되는 것 아닐까. 여성의 체험은 정말 근본적으로 번역될 수 없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차라리 김정란처럼 어떤 신비한 그 무엇에 여성은 있다고 알 수 없는 그것에 정박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것에 가닿으려는 꾸준한 욕망의 충동을 부추김으로써 그것에 관한 대화의 길을 발명해야하는 것 아닐까.
– 남자가 모르는 여자의 무엇 따위의 제목을 단, 갖가지 책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여성 자조지침서의 저자들이나 남자들을 위한 조언서의 저자들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들이 성공하는 여성을 위해, 좀 더 여자와 통하기 위해 들려주는 여성 이야기의 여성은 과연 누구인가.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그들은 아주 평범한 상식을 알려주는 것 아닐까. 그들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남성의 타자라는 여성의 위치 안에서만 자신의 체험을 해석하는 주체일 뿐이다. 그렇지만 바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알려진 유일한 여성의 체험이자 주체성이라면?
– 정상인으로서의 게이, 자신이 게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느끼는 게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자유주의적 게이시민권운동에 나는 깊은 환멸감을 갖고 있다. 나는 그들이 변태로서, 도착자로서 자신을 상연하는 수많은 “안전한” 의례(SM, 강간 등)를 만들어놓고, 우리 시대의 도덕적인 감정으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비난과 공격에 정확히 대응하는 그것을 즐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자신의 모욕을 즐긴다. 그를 긍지있는 성욕의 주체로 인정하며 즐기는 섹스도 있는가? 더티하지 않은 섹스? 그것은 불가능한 환상이다.
– 사르트르 왈, 타인은 지옥이다.
– 랭보 왈, 나는 타인이다.
– 그들은 지나치게 민감했던 것일까, 아니면 타인을 모두 자신의 욕망, 자신의 나르시시즘적인 이미지 안에 투영하려고 했던 비겁한 자들이었을까.
– 내일의 강의를 위해 다시 읽는 계급론 그리고 오늘 읽었던 침울한 기사들. 분배를 강조하는 빨갱이에 의하여 점령당한 정부와 의회를 규탄하는 조선일보의 끔찍한 사설, 죽음의 근거리에 놓인 빈곤을 재생산하는 노숙자들의 삶을 폭로하는 한겨레의 기사, 타워팰리스에 입주하는 동서로부터 비웃음을 당한 덕윤이 엄마의 이야기, 신용불량자가 400만에 육박했다는 비보… 오늘도 버텼다는 것이 용하다.

지식노동자 – 탈근대자본주의 시대의 주체성과 비판이론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압축 재현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약호는 단연 “지식노동자”일 것이다. 그렇지만 지식노동자를 현 단계 자본주의의 노동자의 역사적 종(種)으로 개념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유경쟁자본주의 단계의 산업노동자와 독점자본주의단계의 대중노동자같은 유형으로 탈근대자본주의의 지식노동자를 분류하는 것은 그다지 유익한 일이 아니다. “지식기반경제” 혹은 “신경제”의 노동자로서 지식노동자는 전 단계의 노동자와 전연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기술적 구성이나 노동과정의 조직, 그리고 노동하는 주체를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형태가 역사적 단계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노동자란 노동자의 사회적 현실을 표상하는 개념이 더 이상 아니라는 점에서 특유하다. 지식노동자는 길드나 동업조합의 장인, 포드주의적 노동자와 더 이상 유사하지 않다. 지식노동자는 비노동주체와 구분될 수 없다는 점에서, 노동의 세계와 노동이 없는 세계가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동의 생애단계와 노동으로 입장하고 노동에서 은퇴하는 생애단계의 간격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유령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이미 네그리와 하트가 푸코의 개념을 빌어 이야기했던 노동의 생정치(biopolitics)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 멀리가지 않도록 하자. “신지식인 운동”으로, “평생학습체제”로, “학습혁명”으로, “국가인적자원개발계획” 등으로, 지식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성의 기획은 우리 주변에 이미 정착하였고 또한 가동 중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노동자는 일관생산라인이라는 직접적인 생산과정, 공장과 사무실이라는 특정한 공간의 배치, 출퇴근 시간과 테일러주의적인 시간동작연구로 상징되는 신체의 통제와 더 이상 상관없다. 노동자를 개별적인 신체로 규정하고 그를 표준과 규범에 따라 통제하고 조정하는 포드주의적인 훈육으로부터 지식노동자는 벗어나 있다. 개별적인 신체로서의 노동자는 이제 집합적인 신체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 명의 노동자의 묶음이란 뜻에서의 집합적 신체가 아님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가상사회에서의 정보와 지식의 (재)생산을 말할 때의 “집단지성”처럼 그것은 개별 신체, 지성, 감각의 집행이나 연장이 아니다. 일관생산라인에서 린 생산으로, 팀제로 변화된 탈근대적 노동 과정에서 노동자는 개별적인 신체로서 성과를 발휘하고 생산성의 지표에 의해 측정되고, 동기와 보상의 체계 안에 귀속되지 않는다. 노동자는 일반적인 노동력 안으로 사라진 채 측정될 수 없는 순수한 추상적인 힘으로 등록된다. 이는 거꾸로 생각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신경제의 “부”의 담론의 핵심은 재산이 아니라 자산(asset)일 것이다. 이는 직접적인 생산을 통해 만들어진 물질적 결과로서의 생산물이 아니라 법인기업이 가진 것으로 예측되는 잠재적인 능력 흔히 자산가치이다. 따라서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보유하고 있는 현물과 수익이 아니라 자산을 통해 자본을 평가하는 유령적인 등가(等價)의 세계에 익숙해 있다. 물론 그 유령의 세계는 나스닥과 코스닥, 증권거래소이다. 아마존닷컴과 벅스뮤직의 주식가치와 월마트나 삼성전자의 주식가치 사이의 관계는 더 이상 미스테리가 아니다. 아마존닷컴의 자산가치는 아마존닷컴의 수익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아마존닷컴의 자산가치는 곧 그것의 잠재성일 뿐이다.
신경제 이데올로그의 주문같은 말처럼 “유한한 물적 자원에서 무한한 지식의 힘”으로 자본의 힘이 변화되었다면, 이는 노동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노동 역시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과받는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노동자 없는 노동의 세계를 가리키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이란 용어일 것이다. “인적 자원 개발”, “인적 자본” 등의 개념은 한 명의 구체적인 심리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하는 나, 직장에 다니는 나, 월급을 받고 연금과 보험을 내는 나와 같은 뜻에서의 노동자 역시 잔존한다. 그렇지만 지식기반경제는 지식(그것은 신경제의 이데올로그들에 따라 다중지능, 창의성, 탁월성,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 EQ, NQ 등 다양하게 정의되고 세밀화된다)이라는 역량을 요구한다. 이것은 노동자의 신체와 지성 안에 포함되어있는 실체로서의 능력도 아니고 또한 노동자가 판매하며 보상되는 소유물도 아니다. 다시 푸코를 끌어들이자면 그것은 삶(life)이며 생능력(biopower)이다. 투입되는 노동력을 이미 예상하고 규정하는 생산수단(이를테면 미싱은 재봉사, 선반은 선반공과 같은 식으로)과 달리 지식기반경제의 생산은 이미 형식화되고 표준화된 노동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인적 자원이란 개념은 따라서 경직된 직업 교육과 숙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를 실행하고 자신의 능력을 지속적을 개선하고 향상하는 노동력을 요구한다. 이런 점에서 인적자원은 평생학습을 요구하며, 노동하는 주체의 지속적인 자기계발을 강요한다.
한편 노동자는 언제나 해체와 이동을 함으로써 변신한다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혹은 변화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는 자본의 가속화된 순환에 따라 그 스스로 끊임없이 변형되어야 한다. 이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마 최근 끊임없이 회자되는 “직장인에서 직업인으로의 전환”이라는 담론일 것이다. 지속적인 직업 이동, 동일한 직무와 직종 안에서의 이동이 아니라 다른 직업으로의 이동을 수반한 노동자의 이동은, 노동을 통한 자기(self)의 구성을 파산시킨다. 일의 여정(旅程)을 통해 자기의 생애를 재현하던 사람들은 이제 그 자리에 새로운 주체성의 형식에 사로잡힌다. 평생직장과 철밥통의 세계를 대신하여 이태백, 사오정이라는 유연화된 노동자가 들어설 때, 그것은 불안과 위험 속에 내동댕이쳐진 노동자의 물질적 생존만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혁신하고 관리하며 향상시켜야하는 기업가적 주체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간다. 이들은 리더십 프로그램과 자기계발 세미나, “아침형” 습관의 중독자, “메모의 기술”의 달인, 자기표현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노동하는 주체에게 단순히 새로운 노동 기율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다. 더 많은 성과, 더 높은 생산성을 요구하는 점에서 다를 바 없지만 그것은 관료적으로 조직된 조직 체계에서 즉 외부로부터 오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에게 던져진 최대의 명령인 “자기주도”가 알려주듯이 “자기를 돌보는” 에토스를 실현하는 주체이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에토스는 노동하는 주체가 공통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던 상징적 동일시의 형식(당연히 이에 해당하는 고전적인 개념은 당파성, 프롤레타리아트적 계급의식, 의사소통적 합리성 등이다)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노동은 있지만 노동을 수행하는 주체는 사라지고 있고,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물질적인 제도와 기관(정당, 노동조합, 클럽, 신문, 출판사 등)은 위축되거나 무력해지고 있다. 노동자를 대신하여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기업가(the entrepreneur)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경력경로를 관리하고 다중경력을 체득하며 고용가능성(employability)을 향상시키는 주체이다. 물론 이를 가장 잘 요약하는 것은 신경제의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그인 톰 피터스의 “나-브랜드”일 것이다. 그에게 삶이 어떻게 의미작용의 코드와 사회적 재생산의 네트워크에 의해 규정되는가를 묻는 것은 진부한 일이다. 나의 삶은 일종의 프로젝트이며, 나는 무엇보다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노동하는 주체의 정체성의 변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를 익히며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남근로고스중심주의와 투명한 자기의식적 주체와 작별을 고하는 것은 적어도 비판적 학계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정신이 잊고 있었던 것은 그러한 변화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정의하는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힘들의 장이었다는 것이다. 통속적인 경영학 서적에서 데리다가 신경제의 지식경영의 선구자로 칭송받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다. 디지털정보자본주의를 선구한 예언가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를 들먹이는 것은 차라리 참신하다 할 일이다. 젠체하는 마케팅서적에서 부르디외의 “아비튀스”와 “문화자본”을 인용하는 것은 이미 관례가 되다시피 하였다. 물론 그 자체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다. 담론의 소비를 지식인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르크스 역시 월스트리트의 철학자로 둔갑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분석가로서의 마르크스가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음을 잊고 있었다.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분석하고 정의하는 일은 정치적인 개입이다. 그런 점에서 탈근대자본주의의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일은 근대성과의 단절 혹은 극복이 아니다. 외려 필요한 것은 탈근대자본주의의 주체성을 둘러싼 적대적인 논쟁의 공간을 창출하고 참여하는 일이다. 지식노동자라는 탈근대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개념은 무엇인가. 놀랍게도 우리는 그 자리에 컴컴한 공백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이는 슬프고도 참담한 일이다.
– 연세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패러디는 무효다


패러디는 법 앞의 몸짓이다. 법이 없다면 패러디도 없다. 패러디는 의미작용을 규제하고 조직하는 상징적 질서로서의 법을 항상 전제한다. 그렇지만 탈근대자본주의의 표준적인 에토스는 법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삭제하는 데 있다. 법은 없거나 무력한 공식적인 규칙과 협약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부재하는 초월적인 기의로서 법은 없다. 우리에겐 자의적이며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소소한 규칙이 있을 뿐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패러디는 무효다. 법이 없다는 데 패러디가 서 있을 자리 역시 없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만끽하고 있는 패러디는, 필경 다음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먼저 없는 법, 사라지고 있는 법을 환상 속에 설립하고 존속시킴으로써, 법의 부재가 초래하는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상상된 법. 다른 하나는 탈중심화된 세계임을 선선히 인정하며 약한 법, 혹은 실용적인 협약과 법령으로 탈신화화된 법.
패러디의 ‘명가’ “딴지일보”를 생각해보자. 딴지일보의 패러디가 주는 쾌락은 무엇보다 법을 ‘구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쾌락 아닐까. 딴지일보에서 우리가 느끼는 쾌감은 법의 허위성, 편파성을 감지한 탓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없는 법의 존재를 허구적으로 상연함으로써 얻는 “자유로운 주체”라는 환상의 쾌감 아닐까. 딴지일보를 읽으면서 흘리는 웃음과 흥분은 권위적이고, 관료적이며, 가부장적이고, 반공주의적인 상징 체계를 비판하고 있다는 믿음으로부터 연유한다. “딴지일보”의 패러디는 이데올로기적인 비판으로서, 우리의 심리적인 사고를 규정하는 법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번 총선과정에서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의 인터뷰 기사는 그런 패러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예컨대 그는 고상하고 위엄있는 공적인 장면의 주체를 세속적이고 실제적인 이해에 오염된 인물로 격하시키고, 예의 딴지체로 그들을 묘사한다. 따라서 “DJ보다 이쁜 한화갑”이거나 “선수들과 잔 적이 없는 홍준표” 식의 표현은 공적인 정치적 주체(직업적인 정치가란 뜻에서가 아니라 “정치”라는 상징적 장을 규정하고 집행하는 상징적 주체라는 점에서의 정치가)를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속물스런 이기적인 개인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렇지만 패러디의 풍자성 그리고 그것에 결부된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효력은 이젠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렵다. 이는 패러디의 풍자와 정반대되는 태도, 즉 맹목적인 신화적 이데올로기와 패러디 사이의 거리를 더 이상 고집할 수 없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한나라당의 총선 반전은 당대표인 박근혜가 국모의 딸이자 박애주의자 영부인의 딸로서 신화적인 이미지를 획득한데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박근혜를 “반공규율자본주의”를 이끈 파시스트의 딸이 아니라 신비한 모성적 여성으로 신화화한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무지가 아니다. 박근혜의 이데올로기적 위장과 딴지일보의 탈이데올로기적인 풍자라는 구분은 옳지 않다. 공적인 법의 세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정치를 규정하고 좌우하는 것은 여론조사와 토크쇼, 정치인의 이력과 소소한 사생활, 그의 인간적 자질과 매력 따위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딴지일보의 패러디와 박근혜의 이데올로기적인 신화화는 모두 동일한 형식적 절차에 의존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공적인 정치적 주체를 세속적인 이해에 오염된 개인으로 풍자함으로써 허구적으로 이미 법이 있었던 것처럼 상상하는 것과 자의적인 상상으로 선택한 정치적 주체를 숭고한 법의 화신으로 신화화함으로써 법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듯이 시치미를 떼는, 소소한 형식적인 차이에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스펙터클이 되어버린 정치 그 자체이다. 이 때의 정치란 자유주의적 정치학에서 말하는 선거와 투표, 법치, 언론의 자유라는 외적인 정치적 장치와 그것이 재현(대변)한다고 가정하는 현실 사이의 관계가 모호해져 버린 정치이다. 아마 우리가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적인 특성을 지적하자면 바로 이러한 정치의 재현적인 특성이 사라져버리고 정치적 행위 자체가 정치를 구조화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최근 인플레를 이루고 있는, 포스트 정치적 담론으로서의 “거버넌스” 개념이 유행하는데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거버넌스란 국가의 통치가 아닌 지역사회와 개인의 선택과 참여에 의한 통치로의 변화를 가리킨다.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따위는 곧 정치를 규제하는 일반적인 이상이 없는 정치의 세계, 곧 정치가 사라지고 자유로운 선택을 하는 개인들과 지역사회만이 있을 뿐임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법은 국가인권위원회, 노사정위원회, 청소년보호위원회 등등의 다양한 위원회와 시민단체와 여성단체의 수많은 입법 투쟁을 통해 공급되는 다양한 사회적 협약과 공식적인 규제 따위로 축소된다. 물론 법은 없고 선택을 하는 개인과 지역사회, 비정부기구 등이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패러디란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는 자율적인 주체의 환상을 공급하고, 상징적인 질서를 풍자함으로써 법을 극복하며 자유를 실천한다는, 순응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로 전락하여 버린다. 재차 말하지만 패러디는 무효다. 적어도 탈근대자본주의에 있어 이데올로기적 비판은 법의 비판이란 형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라는 환상을 비판하는 형식을 통해 실현되기 때문이다. ■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

전주 行…

– 전주엘 다녀왔다. 유쾌하지 못한 이유로 전주영화제를 떠난 후 내내 그곳을 가기가 어려웠다. 이젠 시간도 흘렀고 다른 낯의 사람들로 채워져 쉽게 걸음할 수 있다 여겼다. 그 전 내가 차지했던 지위에 가늠할만큼 융숭한 대접을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시비를 붙을만큼의 기력도 없으니, 이젠 그저 영화나 보고 식당이나 기웃대는 가벼운 여행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내게 그곳과 어떤 인연을 상기시키는 이들을 피하자는 작정대로 낮은 포복으로 움직여 다녔고, 사람이 모일 만한 곳이면 피하려 애썼다. 덕분에 맘 주름질 일 없이 3박4일, 전주행을 했다.
– 이렇다 할 좋은 영화를 건지지 못해 아쉬웠다. 장유웬의 신작 <녹차>는 아주 실망이었고, 개방개혁 시대에 문혁의 그늘을 규탄하고 처치하려던 한 명의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그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괴물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어떻게 전락하는지 보는 듯 했다. 그에게서는 더이상 중국도 없고, 자유도 없고,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도 없었다. 아르노 데스플레셍의 <파수꾼>이 그나마 건진 수작이라면 수작일까.
– 카롤린느 샹페띠에라는 촬영감독의 작품이란 이유로 선정된 그의 작품은 고전적인 카프카적인 세계였고, 드물게 인물에 관한 영화였다(모든 영화는 인물을 다루지만 그것은 캐릭터이지 인물은 아니다. 스토리를 상연하는 배역과 불가사의하리만치 충일한 한 인물을 재현하는 영화는 다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인물을 다룬 영화는 많이 희귀해졌다. 이를테면 나는 데칼로그는 인물에 관한 영화라고 본다. 아니 키에슬로프스키의 모든 영화는 그저 인물에 관한 영화라고 본다). 한시도 한 인물의 낯을 떠나지 않는 영화를 만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데스플레셍은 냉전의 종식과 평화라는 세계의 표면 뒤에서 어떤 공식적인 제도와 권위로부터 그의 자유가 면제된 한 인물 – 역설적으로 그는 자유를 선택한 인물이다 – 과 그의 죽음을 쫓는 한 법의학도의 병적인 집착을 쫓는다. 영화는 아버지가 외교관이었으며 독일에서 성장한 프랑스 청년인 법의학도 마티아스의 파리행을 쫓는다. 마티아스는 프랑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외교부의 관리라는 자로부터 불법입국자란 혐의를 받고 곤욕을 치른 후 파리에 도착한다. 끔찍하고 영문모를 사건에 시달렸던 그가 파리에 도착한 후 열어본 가방에는 괴이한 사람의 머리 하나가 들어있다. 마티아스는 이 영문모를 머리의 신원을 추적하려 발버둥치고, 그는 그가 구 소련에서 살았던 인물이며 수마트라에서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낸다.
– 프랑스의 외교부 안에는 구 소련에서 자유를 택한 과학자를 몰래 서방세계로 빼내 그가 가진 첨단의 과학적 지식을 얻어내는, 일종의 인신매매 비즈니스 팀이 있다. 그들은 소련의 한 인물을 프랑스로 빼내는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자유의 영지로 배당된 수마트라에서 자신의 온전하지 못한 자유에 저항을 했고 살해를 당한다. 그리고 그의 친형이었던 프랑스인은 그의 동생의 죽음을 규명하기 위해 외교부에 안에서 투쟁을 벌이다 지금은 미치광이이자 반역자로 몰려 추방을 당하게 된다는 신세가 된다. 마티아스에게 머리를 넘긴 인물은 바로 그였다.
– 그러나 이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마티아스의 윤리적인 얼굴이다. 음모적인 비밀경찰과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인물이란 설정은 흔한 것이고, 그렇게 보자면 이야기의 얼개는 매우 진부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영화가 시시해지지 않도록 만드는 것은 그런 이야기에 실린 서스펜스를 쫓는 것이 아니라 거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듯 보이는 한 미지의 인물을 향한 그의 집착이다. 그의 그런 태도는 국가권력의 뒤안에서 희생당한 한 인물의 억울한 죽음을 규명하려는 자의 도덕적인 태도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자신을 뒤쫓는 저항할 수 없는 윤리적인 요구이다. 그는 마치 그것이 없다면 그의 삶이 무너질 것처럼 그것에 매달린다. 그러나 그의 안티고네적인 모습이 숭고하기는커녕 그로테스크하고 부조리하게 보이기만 한다.

– 알랭 기로디의 신작 장편인 <용자에겐 쉴 곳이 없다 No Rest for the Brave>를 보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오래된 꿈 That Old Dream That Moves>(일전 나는 이 작품을 “쿨 타임”이란 영어 제목으로 봤던 듯 하다. 로테르담이었던가..)을 다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특히 내가 보지 못했던 다른 단편들 역시 만났다. 그러나 아마 그는 매우 난삽한 이력을 가진 감독인 듯 하다. 그의 단편들 가운데 <그것들의 힘>은 적잖이 실망스런 치졸한 작품이었다. 다른 단편 둘은 재치가 있었고, 특히 그가 미장센을 조직하는 능력에 있어 매우 탁월하며, 특히 사운드에 관한 한 금욕적이고 또한 이미지와 대사 사이에 소박하지만 그러나 사려깊은 연관을 부여하는 재주를 지녔음을 알려주었다. 다시 본 <오래된 꿈>은 파스빈더의 <팍스와 그의 친구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도 그와 동년배일 울리히 사이들이나 미하엘 하네케 혹은 로베르 귀에드기엥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정묘한 사회적 사실주의나 노동계급 출신 게이의 삶에 관한 치밀한 재현은 무조건적으로 나를 감동시켰다.
– <영화보다 낯선>이란 프로그램을 섭렵하지 못한 것은 후회할 일이다. 조나스 메카스나 론 라이스의 영화를 스크린에서 만나지 못한 것은 분명 후회할 일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화를 보기 위해 생계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니. 아이작 줄리앙의 근작을 보지 못한 것 역시 안타깝고 분하다. 그렇지만 마침 상영일정에 포함된 패트릭 킬러의 작품들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는 탈근대적인 도시인 영국에 관한 일종의 “도시의 교향곡” 풍의 영화를 만들려는 듯 했다. 그는 어느 산보객을 내세우며 런던이란 도시를 주유하고 도시의 풍경과 산보객의 파노라마적인 시선을 제시하려 애쓰지만 그 작품은 그 어디에서도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그저 그 영화는 수다스럽게 기억과 체취가 사라진 도시에 대한 한탄만을 늘어놓고 새로운 도시에서 배양되는 지각의 세계를 근거 없이 혹은 막연하게 축복한다. 그는 너무 책을 많이 읽었거나 아니면 남에게 지루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듯 하다.
– 끌로딘 에이지크만과 기 피만의 실험영화는 볼 만 했지만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그들은 영화와 사진의 연관을 대신하여 영화와 회화의 관계에 주목하는 실험영화 감독들 같았다. 그들은 이미지의 환영적 성격을 강조하는 사진으로서의 영화와 이미지의 정동적(affective) 능력을 강조하는 회화로서의 영화 가운데 후자의 편에 서있음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들이 시도했던 영화의 이미지의 회화적 성격 – 이 말은 이제 우스운 말이 될 것이다 -을 향한 집요한 관심은 디지털 영화 이후의 시대엔 매우 진부한 물음이다. 아마 많은 이들은 그들이 카메라를 통해 시도했던 수많은 이미지의 회화적 변조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이중인화와 빛과 색채의 다양한 변용을 통해 보여준 이미지들은 디지털 소프트웨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이미지들 사이에서는 이미 식상한 것이거나 흔한 것이다.
– 전주에서 체재하는 어제, 내겐 귀빠진 날이었다. 후배 녀석이 케익과 선물을 준비해 날 감격케 하였다. 동석했던 전주의 토박이 게이들도 내게 후한 축하를 베풀어주었다. 산란해진 마음을 빗질하기 위해 갔던 여행이기도 했던 터라, 그들의 우연한 호의가 날 가격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칸 영화제로 가게되었다는 소식이 연일 대서특필되었다. 한국 영화의 개가라고 뿌듯해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문득 최근 이혼을 선언한 어느 개그 우먼 생각에 마음이 신산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는 데 정작 현실에서 여자는 남자의 동네북이기 때문이다. 사실무근이라고 남편은 주장한다지만, 사람들은 얼굴과 이름을 제일로 여기는 여자 연예인이 그런 결단을 내렸을 정도면 여염 여성들은 오죽 했겠는가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를 가정 내 폭력을 보여주는 흔하고 뻔한 또 하나의 사례로 치부해서는 안될 듯 하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확대되고 또한 실제로 가장이 되기도 하면서 남자들이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남자들이 이런 왜소해진 지위를 인정하기 힘들어하고 그에 따른 심리적 반동으로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게되었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일리가 없지 않다. 이미 많은 가족의 경제적 재생산 형태가 남성 가장의 임금 소득에 의존해 있지 않다. 남자들이 벌어다 준 돈으로 살림하는 여자라는 공식은 현실에서는 사라졌는데, 남자들의 뇌리에는 아직 깊이 남아있는지 모른다.

최근 높아지는 이혼율에 제동을 거는 방편으로 정부는 이혼 부부들이 반드시 의무적으로 상담을 받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어떤 이는 처음부터 소통하며 지내는 연습을 시킨 후에 결혼할 자격을 주는 결혼인증제를 도입하자고까지 제안한다. 손쉽게 이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적어도 이혼이 불평등하고 폭력적인 관계를 거부하는 방편인 한 그것은 결혼을 좀 더 민주화하는 장치가 된다. 그렇지만 이혼을 선택할 자유가 보장된다고 결혼이 민주화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뇌리에 박힌 기억에 매달린 채 달리 살자는 요구가 곧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라 여기는 한, 결혼은 다시 폭력에 말려들 것이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것은 남자의 지위를 빼앗는 것이 아니다. 평등을 요구하는 주장을 이렇게 곡해하는 것은 결혼뿐이 아니다 최근 의회로 진출한 민노당의 평등의 요구를 부유층의 재산을 뺏는 짓이라 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처럼 우리는 평등의 에토스에 무감각하다. 상생이란 말이 인플레를 일으키는데 정작 평등의 상생은 안 보인다. 왜 일까.
<서울경제신문 칼럼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