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로서의 트렌드 혹은 트렌드로서의 대중문화

(문화방해운동 cultural jamming)의 전위인 미국의 록밴드 네거티브랜드의 앨범 표지)
지식인이나 문화비평가가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문화나 문명의 위기를 고발한다는 생각은 어느덧 맥추지 못하게 된지 오래이다. 그들이 맡아하던 역할은 나오미 클라인이 <노로고>라는 책에서 “멋 사냥꾼”이라고 부른 시장조사자들이 떠맡고 있다. 그들은 통신원과 포토저널리스트를 동원하여 청소년들이 모여있는 게토를 누비고 그들의 은밀한 언어 안에 깃들어있는 성향과 감수성을 파악한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소비자 욕구 조사의 거대한 정량기법의 사회통계를 비웃으며 이들은 도시의 인류학자들이 되어 민속지를 쓴다. 과포화된 미디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열광적인 정보통신의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불확실성에 사로잡혀 있다. 시대의 풍경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흐릿해지지만, 다행히 우리는 조각보처럼 기워진 세계의 이미지를 가까스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시장조사자들과 트렌드 연구자들 그리고 미래예측가들의 덕택이다.
이미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미래생활사전>이나 <클릭 미래 속으로>의 저자이고 조금은 섬뜩하지만 우리 시대의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예언가의 명성을 얻은 페이스팝콘을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 혹은 청소년 시장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의 기상예보관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스푸트니크”라는 회사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이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마케터 혹은 트렌드 분석가의 모습과 다르다. 그들은 상품의 판매를 위한 아이디어의 제공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문화분석가이기도 하다. 이는 문화와 경제의 구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반영한다. 상품은 더 이상 제조품이 아니라 정보와 상징, 기호(sign)가 되어버렸다는 주장은 이미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나아가 “무게 없는 경제”, “무형의(intangible) 경제”란 용어들은 유행어가 되었다. 상품의 세계는 곧 문화의 세계이고 상품의 판매는 물질적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욕망과 환상의 소비를 위해 이뤄진다.
결국 우리는 트렌드 분석가야말로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의 분석가 혹은 시대정신을 분별하고 제시하는 인물이란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노르베르트 볼츠와 다비트 보스하르트란 독일의 문화이론가 겸 트렌드 연구자들은 천연덕스레 트렌드란 “문명 속에 깃들어있는 의례”라고 정의한다. 이 알쏭달쏭한 이야기는 트렌드와 유행의 차이, 또한 트렌드와 사회적 법칙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제안된 것으로 보인다. 유행이란 이미 이뤄진 선택이고 사물 혹은 상품 그 자체이다. 이를테면 남성용 색조화장품은 유행이지만 “메트로섹슈얼”이라는 현상은 트렌드이다. 우리는 메트로섹슈얼이란 트렌드에 따라 남성용 화장품은 물론 새로운 티비 프로그램과 팝 스타, 출판 아이템, 패션 디자인, 장신구 나아가 의료서비스와 자동차 설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트렌드는 곧 어떤 유행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습성, 행위의 경향, 심미적인 태도를 아우르는 것이란 뜻이 된다. 우리는 트렌드란 개념에 근접한 어떤 또다른 용어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라이프스타일 또는 생활양식이란 말이다. 틈새시장과 라이프스타일 마케팅이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경제적 활동의 핵심적인 특성은 곧 제조업과 서비스업을 분간하기 어려운 우리 시대의 경제활동을 잘 보여준다. 이미 국내의 어떤 대기업은 자기네를 생활문화기업이라고 명명하였다. 감량경영과 리엔지니어링, 아웃소싱, 유연화, 생산의 정보화같은 말이 범람한지 십여년이 지난 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상품의 세계에 살고 있지 않다. 상품의 진열은 문화의 박람회로 바뀌었다.
한편 트렌드는 사회 법칙과도 다르다.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규제된 행위의 규칙을 가리키는 사회 법칙과 달리 트렌드는 매우 우연적이고 자의적인 행위의 문법을 가리킨다. 트렌드란 이미 주어진 규칙에 따라 이뤄지는 행위가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으로 행위가 행위기 이어짐으로써 행위 방식과 선택이 결정됨을 가리킨다. 트렌드란 이미 결정된 규칙이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들의 시리즈이고 그를 통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 행위에 다른 행위가 덧붙여지고 그 행위에 대한 외부의 반응이 추가되고 내면화되면서 또 다음의 행위는 전개된다. 다음에 무슨 행위가 벌어질 것인가는 행위자의 의도, 행위자의 등뒤에서 그를 지배하는 규칙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무질서한 것이 아니다. 행위가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반복성과 상대적인 일관성이 결국 행위를 규제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트렌드란 일종의 경향이다(프랑스의 사회학자는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문화를 특정한 심미적인 성향의 체계로 분석하며 아비투스(habitus)란 개념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 홍대 앞에서 자신이 흠모하는 영국의 펑크 밴드를 카피하는 연주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부르고 그들의 행위를 해석하기 위해 인디 음악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거나 빌려쓰게 되고, 다시 그것은 인디 음악이라는 일련의 성향을 만들어낸다. 물론 여기에서 우리는 인디 음악의 정신을 반영하고 집행하는 연주자들의 묶음으로 인디 음악을 정의해서는 안된다. 인디 음악은 우발적으로 뒤섞이고 또한 외부의 반응을 수용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에 재투입하면서 만들어지는 연속적인 돌연변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인디 음악과 “짝퉁” 인디 음악을 나누고 가늠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반복되겠지만 그런다고 자신을 순수한 인디 음악으로 정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인디 음악의 연주가 되는 것은 인디 음악의 ‘법’에 마침내 다가섬으로써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인디 음악이란 무엇인가를 해석해 냄으로써 어느덧 나는 인디 음악의 연주자가 된다. 줄여 말한다면 해석자와 해석하는 대상의 거리는 없다. 마치 과학철학에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을 순수하게 분리시켜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트렌드 역시 이렇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트렌드를 묘사할 수 있지만 분석할 수는 없다. 아니 그것이 트렌드로 묘사하는 순간 사람들은 그것을 에워싸고 다양한 말을 쏟아내고 행위를 추가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생태계를 만들어 낸다.
문화 산업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수십 년 간 대중 문화의 기류 역시 트렌드의 정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조용필과 서태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는 조용필을 위대한 대중음악가로 기억한다. 대중음악의 가인(歌人)이자 장인 혹은 거장으로서의 조용필과 신세대 문화의 아이돌로서의 서태지 사이에는 대중음악가란 점을 빼곤 일치하는 점이 없다. 그 사이 한국 대중음악의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소년 보이밴드의 댄스뮤직 일색의 대중음악을 향한 볼멘 푸념과 저항은 음악 문화의 다양성을 해친다는 명분을 들먹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음악을 에워싸고 있는 변화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주장일 것이다. 물론 대중음악의 생산이 소규모의 고도로 분업화되고 전문화된 기획사의 시스템을 통해 제작되고 거대 자본에 의해 집중된 배급 체제와 미디어를 통해 유통된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의 영화 산업의 구조를 보나 음반 산업의 구조를 보나 이는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화산업의 구조가 획일화된 대중 소비자의 시대와 얼마나 다른가는 서태지를 통해 입증된다.
그러나 멀리 거슬러갈 것도 없다. 지난 해 가장 뜬 “비”라는 뮤지션을 생각해보자. 그는 요즘 뜨고있다는 새로운 트렌드인 “메트로섹슈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남성적이면서 또한 동시에 여성적인 그의 외모와 인상, 분위기. 시중의 평가는 그가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컨셉의 진정한 재현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꽃미남”의 느끼한 감상적 호소와도 거리를 두고 촌스럽고 멍청한 진짜 사나이와도 무관한 그의 이미지는 물론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저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HOT와 GOD 모두 분발했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거대한 자본을 거느린 기업의 생산물이 아니라 작은 기획사의 용의주도한 기획과 마케팅을 통해 시장에 나왔다. “비”를 기획한 회사는 그를 정보경제의 콘텐츠로 가공하고 판매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의 음반은 디지털콘텐츠의 쿠폰을 내장하고 있고, 그의 초상은 상품권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그의 뮤직비디오는 간접광고기법을 도입하여 여러 브랜드와 윈윈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모 치킨회사의 광고에 출연하여 “야마카시”란 익스트림스포츠를 즐기는 분위기를 선사하고 브랜드를 감성화한다. 그의 음반에는 “비의 1일 매니저되기”와 “리니지 무료이용권’이 들어있어 고객관계관리, 멋진 말로 관계 마케팅을 솔선한다. 그렇다면 그는 두루두루 트렌드의 첨단을 걷는다. 그는 정보통신산업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하고 섹슈얼리티와 몸을 둘러싼 우리 시대의 트렌드와 함께 한다.
이처럼 현재의 문화산업은 세분된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혹은 트렌드의 방향에 따라 틈새 시장의 골목을 누비며 제작되고 마케팅된다. 역시 요즘 유행하고 있는 표현처럼 “비”는 뮤지션이 아니라 “콘텐츠”인 것이다. 댄스 음악 일색의 뮤직 비디오형 가수들의 음악과의 차별화 덕택에 라이브 공연이 자신을 유지하고 인디 음악이라는 주변적인 음악 산업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나름의 문화 자본을 가진 부족화된 청중 집단과 만나게 된다. 조용필이라는 대중음악가가 딴따라에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독창적이고 천재적인 개인, 영웅으로서의 예술가라는 미학적인 신념을 통해 대중음악을 향유하던 시대가 본격적으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청취자로서 FM 음악방송을 열심히 듣고 연주회에 참여하는 전 시대의 대중음악의 향유자들과 지금의 대중음악의 수용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서태지가 대표하듯이 대중음악은 곧 그 시대를 향한 태도라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의 차원까지 상징한다. 나와 대중음악가 사이에 연주자와 수용자 사이의 즉 저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고 서태지는 우리가 된다. 물론 우리는 이를 밥 딜런, 비틀즈와 마돈나, 에미넴의 차이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록큰롤의 천재적인 아티스트였으며 반항적인 시대의 영혼이었던 비틀즈, 밥 딜런과 달리 마돈나와 에미넴은 동시대를 들여다보는 거울 그 자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록큰롤의 모차르트로 비틀즈를 부른 것처럼 마돈나와 에미넴을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요즘의 트렌드 분석가의 표현을 빌자면 신화의 제조자이고 생활양식의 창조자들이며 시대의 이야기꾼이고 삶의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판은 그것이 진정한 체험과 쾌락으로부터 우리를 소외시키고 문화산업이 만들어낸 조작된 욕망에 길들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경제와 문화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있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한 이들은 문화산업이 개성의 표현이라는 교환될 수 없는 고유한 삶의 세계를 상품이라는 보편적인 교환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이른바 “신경제”의 시대로 불리는 후기 자본주의에서는 계속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따라서 트렌드란 개념이 난데없이 부상하고 그에 관련된 책들이 날개 돋힌 듯 팔리는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 과연 시장에서 어떤 상품이 잘 팔릴 것인가를 예상하고 소비자의 욕구를 조사하던 시대의 트렌드는 우리 시대의 트렌드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트렌드란 결국 문화이다. 그렇다면 대중문화 역시 다르지 않다.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의 부상은 새로운 상품 세계의 등장이다. 그렇지만 우리를 따로 분간할 수 없을 것이다. 곧 문화는 상품이고 상품은 문화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집약하는 말이 있다면 트렌드일 것이다. 쿨(c0ol)에 관한 강박증을 생각해보자. 청소년 하위문화와 대항 문화의 레퍼토리를 모방하고 전용한 이 희대의 트렌드는 곧 상품의 세계이자 문화적 관례의 세계이다. 그것은 의류와 가방, 음반에서부터 심지어 마약과 윤리적 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망라한다. 그리고 그것은 광고와 마케팅, 홍보에서 교육과 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펑크가 룩이 되고, 그런지가 패션이 되는 세계, 그것은 또한 트렌드의 세계이기도 하다.

역사의 디즈니랜드화, TV 생활사 박물관 [다모]

어디서 보았는지 가물거리지만 곱씹을수록 섬뜩한 이야기가 있었다. 미국의 어느 마을에 도무지 영문을 알길 없는 괴이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단다. 그 사건을 취재하러 온 방송국 기자가 한 동네 사는 마을 주민에게 물었다. 이런 일이 왜 벌어졌겠냐고. 그랬더니 주민 왈, “글쎄요. 몇 년 안에 헐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하지 않겠어요. 그럼 우리도 뭔 일이 났는지 알겠지요.” 그 주민은 아주 영특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우리 시대에 역사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고 쓰여지는지 정곡을 짚고 있다. 지금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굳이 애써 물을 필요가 없다. 하물며 내가 살기도 전에 벌어진 일들이 무슨 진실을 갖는지 물을 필요가 없다. 조만간 대중문화가 먹기 좋고 보기 좋은 형태로 가공하여 방부처리된 패스트푸드처럼 내게 배달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대중문화는 역사가 어떤 이미지로 규정되고 소비되어야 할지 결정해주고 있다.

대박까지는 아니겠지만, [옥탑방 고양이]를 대신해 등장한 새 티비 드라마 [다모]가 뜰 기세이다. “퓨전 무협 사극”이라는 아리송한 간판을 달고 나온 이 드라마는 [와호장룡]의 유려한 와이어 액션을 본뜬 데다 유치찬란한 멜로적 요소와 수사극이라는 연속극의 얼개를 뒤죽박죽 뒤섞어 놓은 짬뽕 드라마이다. [다모]란 드라마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역사를 소비하는 포스트모던한 방식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혹한 신분차별의 사회에서 서얼 출신의 포청 관리와 역적을 꾀한 양반 가문 출신의 노비인 여주인공과 대동 세상을 꿈꾸는 어느 혁명아의 진부한 삼각관계가 이 드라마를 엮는 얼개이다. 조선시대 후기란 배경은 물론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 드라마를 즐겁게 소비하기 위해 시청자들이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그저 분위기를 잡아주는 배경일 뿐이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독특한 이야기의 장르가 언제나 현재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쓰여진 과거일 뿐이라지만 그 과거는 더 이상 무슨 의미심장한 역사의 법칙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현재가 무엇인지 재현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역사는 이미 그 역사를 전유할 이데올로기적 주체를 잃은 지 오래이다. 국민적 정체성 아래 우리를 묶어주던 공통의 과거로서의 역사는 고작 공무원 시험에나 등장하는 국사일 뿐이다. 피억압 계급으로서의 민중의 역사는 탈근대의 낭만적 신화가 되어 대하무협지와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에서의 18일]을 읽으며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에 대해 머리를 싸매는 것은 바보짓이다. [나폴레옹과 조세핀 문화미술대전] 박람회에 가면 우리는 프랑스의 역사를 전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모]는 지금 우리가 역사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가장 잘 압축하고 있는 예일 것이다. 이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보며 역사라는 문자에 전율했던 386세대, 식민지반봉건이냐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냐를 놓고 단내를 뿜으며 논쟁했던 6월항쟁 세대의 역사와 매우 다른 것이다. 역사란 사회적으로 소비하는 이야기의 한 종류일 뿐이라고 생각해 보자면 둘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반공자유민주주의의 주술로부터 해방되는데 우리는 한 점의 사소한 역사적 지식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때의 역사 역시 물론 이야기인 것이다. 국가안전기획부가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같은 온건한 역사책을 빨갱이 책의 대표 선수로 낙인찍고 그토록 집요하게 금지한 것은 그 책의 이야기로서의 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역사학자들이 이야기로서의 역사란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 탈근대 자본주의는 벌써 훨씬 앞서나가 있다.
탈근대 자본주의가 역사를 가리키기 위해 쓰는 가장 흔한 용어는 “문화콘텐츠”일 것이다. 역사는 자연사박물관과 문화축제, 테마 파크, 시뮬레이션 게임, 패키지 여행을 만들어내는 우리 시대의 훌륭한 문화상품이다. 우리는 허준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허준 의료박물관을 건립하여 한의학의 우수성을 알릴 수도 있고, 허준의 간난에 찬 삶을 추념하며 그의 이름을 딴 약초 박람회를 열 수도 있을 것이며, 허준의 이름을 딴 브랜드 마케팅을 특허로 등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 지식 경제에서 역사도 역시 문화상품이며 콘텐츠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의 디즈니랜드화로부터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역사의 이야기가 폭증하는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우리는 역사의 이야기로서의 빈곤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역사가 이야기란 것은 굳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앞에서 우리와 다른 라이프스타일의 한 종류로 상연되는 역사를 관전할 때, 그 역사는 알다시피 이야기가 아니라 침묵이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이야기 안에서 소비되는 역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때의 역사란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지 않은 채 영원한 동일성의 순환이라는 질식할 듯한 침묵에 빠져든 역사이다. 역사가 이야기일 때 그것은 현재의 삶을 말하는 방식을 차별화한다는 뜻이다. 역사가 삶의 서사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서사란 것은 그것이 끊임없이 이야기된다는 점에 있다. 이야기가 끊기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세헤라자데처럼 우리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야 한다. 포스트모던한 역사의 소비로부터 우리가 구제해야할 것이야말로 이야기로서의 역사이다.

매그놀리아, 신바람, 성공하는 사람을 위한 7가지 습관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노동과 문화

더 이상 기업가는 제조품을 만들어내는 업자가 아니라 연출가이며, 이야기꾼이고, 행위예술의 감독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포스트모던 경영학의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 상식을 비웃기도 어려운 것이 이미 일의 강박관념에 휩싸인 채, “라꾸라꾸” 간이침대를 제 사무실에 들여놓고, 오피스텔 지하층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씹으며, 아직도 대박과 히트의 꿈을 꾸는 미래의 CEO들이 주변엔 즐비하다. 그들은 일에 환장해 있고, 일이 즐거우며, 무엇보다 일과 결혼하거나 연애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노동에의 몰입을 병리적 현상으로 쉽게 진단하며, 이를 그저 “노동중독”이라고 안이하게 부를 수만도 없다. 노동을 향한 강박관념, 그 열렬한 편집증적인 상태를 탓하기에는 그것을 심리적 병리 이상으로 분석하려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영화 [매그놀리아]는 포스트모던 경영학의 음란한 메시지를 훌륭하게 상연한다. 알다시피 영화 [매그놀리아]의 주인공은 포스트모던 자본주의를 위한 리더십의 부흥사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창의성과 개성, 능력을 발견하도록 이끄는 목자이다. 그는 근면과 자조, 저축과 절제를 설교하던 근대 초기의 칼빈주의적 목사의 목소리를 21세기에 새로운 판본으로 재연하는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소소한 가족적 가치의 파수꾼으로 전락한 교회에 비해, 위성 중계되는 경영 세미나와 부흥회야말로 우리 시대의 교회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정도이다.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탐 크루즈는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낙오자들을 향해 선동한다. 그는 마음껏 자신들이 기죽어 지내며 외치지 못한 자신의 욕망의 목소리를 내뱉으라고 부추기고, 싸구려 히피주의와 동양철학 그리고 영성주의가 뒤범벅된 뉴에이지적 리더십 세미나를 주재한다.
영화 [매그놀리아]가 음울하게 재현하는 포스트모던 노동 주체의 모습은 이미 남한 자본주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저 유명한 “신바람 건강법”이 히트를 쳤던 때가 IMF 위기를 전후한 시절이었던가. 그가 제시한 신바람 건강법은 언제 어느 때나 바보같은 자동인형의 모습으로 언제나 조증상태에 빠진 채 자신의 일과 행위를 쾌락으로 즐기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즈음부터 우리의 독서 시장을 평정한 책들 역시 “즐거운 일”, 어느 경영학자의 말대로라면 “힘든 재미”로서의 일을 위한 복음서들이었다.
놀랍게도 한국과 대만에서 가장 많이 팔려나갔다는 국제적인 베스트셀러, [성공하는 사람들을 위한 7가지 습관]을 생각해보자. 포스트모던 경영학의 구루(guru)인 스티브 코비는 일을 명료하게 정의되고 완수되어야할 일로 보기를 거부한다. 그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습관을 잘 조직하는 사람이라고 역설한다. 탈근대 자본주의의 영웅은 관료화된 노동조직에서 불굴의 에너지를 발휘한 소비에트적인 노동 영웅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노동 영웅은 바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이를테면 경영학 서적들의 클리세를 빌리자면, 놀이에 몰입하고 있는 아이들처럼, 자신의 일을 놀이의 즐거움 속에 심취한 노동자이다. 그것은 습관이며 기질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평소의 반복된 주장을 빌려쓰자면, 왕년의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심적 경제는 신경증이고,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심적 경제는 도착이다. 이를 풀이하자면 이럴 것이다. 산업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징화하려 한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과업, 한정된 조직과 활동 따위로 직조된 포드주의적 공장에서의 노동자의 특성은 히스테리에 휩싸인 사람이다. 그 노동자는 자신을 규정하는 상징적 명령, 즉 자본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으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자본주의에서 그러한 명령의 주체 – 즉 사장, 선생님, 아버지 등 -는 없다. 따라서 질서와 규율, 명령 따위로 직조된 상징적 질서를 대신하는 것은 나의 자발적이고 진정한 욕망이다.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주체가 아닌 한 높은 가치의 활동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포스트모던 경영학, 교육학 등의 핵심적인 슬로건이다. 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나를 실현하고, 나의 개성을 발휘하며, 나의 잠재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경증적인 자본주의가 아니라 도착적인 자본주의이다. 도착의 결정적인 특성이 바로 자신을 상징적 명령의 자리에 내세우는 것이라면, 그것의 세속적인 표현은 포스트모던 경영의 담론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 시대의 비판적 문화 담론의 어떤 부분과 정확히 일치한다. 따라서 하나의 팁. 일급 문화평론가가 되고 싶다면 톰 피터스와 피터 드러커 그리고 스티브 코비를 읽어라. 그리고 도착적인 자본주의와 죽도록 즐겁게 춤을 추어라. 탈근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희한한 무도병의 희생자고 되고 싶다면.

35세 정년, 조 스트러머 그리고 386 세대

단 한번도 386이란 문자와 동일시해 본 적이 없는, 그 동네에서 스스로 호적을 파버린 날라리 문화평론가인 내게, 30대를 향한 모욕과 적대는 참으로 우습다. 가소롭다. 솔직히 말해 이보다 별 시덥잖은 꼴이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오정(45세 정년)이란 괴담이 떠돌더니 이제는 삼오정(35세 정년)이란 더 섬뜩한 괴담이 횡행하고 있다. 완전계약제와 연봉제라는 유연한 고용 형태가 시대의 흐름이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던 탈근대자본주의의 나팔수들마저 이런 추세에 뜨끔해 한다. 그래도 일말의 눈치는 남은 것이다. 시한폭탄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만년 철밥통을 꿰찼거나 아니면 고액연봉의 오르가즘에 진저리치는 이들이 복창하는 노동의 자유가 대다수의 노동자들에겐 해고의 자유이며 빈곤의 자유란 것은 지난 5년의 세월이 충분히 증명하여 주었다. 그런데 이제 삼오정이라니 이건 해도 너무했다는 주장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30대 이후의 일 맛을 터득한 숙련 노동자에게 조기 퇴직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의 이동을 보장해주라는 썩 겸손한 조언이 다투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잠시만 기다리자. 전통적인 위계의 고리타분한 직장에서 벗어나 “와우”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법한(물론 나는 지금 마돈나나 에미넴만큼이나 유명한 톰 피터스의 [와우,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있다), 자신을 브랜드화한 30대 초반의 CEO가 등장하여 우리의 불안을 씻어줄 것이다. 쇄신이 아니라 혁명이고 질서가 아니라 혼돈이며 직업이 아니라 인생의 실험이라는 탈근대 자본주의의 경영 구루들의 복음은 나날이 인기를 더해 가는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이다. 아쉽게도 나는 선착순 몇 천명만 받는다는 세계적인 경영 전도사 스티븐 코비의 장충체육관 내한 강연 이벤트에 가지 못했다. 비정규직 노동자 주제에 주5일제 근무가 어디 언감생심인가. 내가 아는 한 일초도 쉬지 않고 “좆뺑이”치는 것이 탈근대자본주의이다. 그래도 스티븐 코비 박사의 강연은 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그는 바로 내게 시간관리의 잘못을 알려주고, 베르그송이나 들뢰즈보다 더 쓸모 있는 지속과 생성의 시간론을 귀띔해 주었을지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게다가 그는 스타 아닌가.
정말 우연히 며칠 전 조 스트러머(Joe Strummer)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해 말 죽었다는 것이다. 그가 몸담았던 펑크 원조 [더 클래시(The Clash)]를 기억하는 이들은, 이제 더 이상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랑 동갑내기인 커트 코베인조차 존 레논만큼 늙은 영혼처럼 추억되고 있는데, 하물며 조 스트러머를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러나 그의 부음은 내게 영 새삼스럽다. 엘리엇 스미스(Elliott Smith)가 죽었다는 부음을 들은 지 불과 며칠 전이었기 때문일까. 엘리엇 스미스의 죽음은 마치 예상한 부음인 듯 여겨진다. 언제나 음울한, 죽음을 자청한 자들의 괴팍한 기분을 그가 풍기고 다닌 탓일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두툼한 스웨터를 걸치고 탁자 옆에서 일본산 사탕 깡통 옆에서 찍은 사진의 기억 뒤로 나는 그의 멜랑콜리가 지겨웠다. “아픈 척도 한두 번이지 너는 해도 너무 한다”는 내 졸렬함 탓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조 스트러머의 부고를 접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거의 끝났다는 우울에 빠졌다. 록큰롤의 명예의 전당의 역사에나 어울리는 기억을 주억거리며 내가 센티멘탈해질 이유가 뭐 있겠는가. 그가 조용필도 아니고 신중현도 아니고 한대수도 아닌데.
아마 그것은 내가 30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사회생활을 시작도 하지 못한 것 같은데, 아직 주택청약예금에 가입도 못했는데, 남들 다 한다는 뮤추얼 펀드에 계좌도 만들지 못했는데, 30대 쁘띠 부르주아지를 향해 세상이 선고하는 부음을 들어야 하다니. 그래서 억울하고 약이 올랐던 탓일까. 60년대를 미국의 몰락과 타락으로 단죄하는 미국의 우익들과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386세대가 나라를 망친다고 거품을 쏟는 꼰대 정객들의 광란 사이에는 묘한 닮은 꼴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 한번도 386이란 문자와 동일시해 본 적이 없는, 그 동네에서 스스로 호적을 파버린 날라리 문화평론가인 내게, 30대를 향한 모욕과 적대는 참으로 우습다. 가소롭다. 솔직히 말해 이보다 별 시덥잖은 꼴이 없다. 이광재란 자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몰라도 그를 두고 그렇게 막말하는 게 아니다. 자기가 극구 노동운동을 하다 잘린 손가락이라는데, 모 일보의 논설위원이란 자가 나서서 그의 소영웅주의에서 비롯된 만용인지 아니면 출세의 의지에서 비롯된 쇼였는지 따지고 그의 순정한 삶에 침을 뱉을 일이 아니란 것이다. 댁들이 배불리 와인 홀짝이고 골프치고 해외여행 다닐 때, 정신이 나갔는지 마음이 본래 약했던 것인지, 눈물을 뿌리며 말리는 부모들에게 등돌리고 구로공단에 들어갔던 젊은 청년을 향해, 그렇게 사후적으로 뒷다마 까는 건 역사적인 예의가 아니다. 청와대 상황실장이 별거라면 별 것이겠지만, 문득 내가 작별했던 그 고약한 386들에겐 그건 정말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것이었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그런데 이번 글은 왜 이렇게 감상적인 거지, 제길. 편집자 양반, 자르려면 자르쇼.

메트로섹슈얼, 마초 이미지에서 탈출한 포스트모던 영웅들에 대한 유감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죄다 게이”라며 절망하던 이성애자 여성들에게 나날이 희소식(?)이 찾아들고 있다. 이성애자 남성들이 한층 변신하고 있다지 않은가. 게이 웹사이트에 가면 쉬이 찾아볼 수 있는 “상대 찾기” 광고. “좋아하는 타입-일반틱한 남자(일반이란 이성애자 남성, 이반이란 동성애자 남성을 각각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는 “straight acting gay”. 그러나 “이반틱한 이성애자 남자”를 쫓는 이성애자 여성을 위해 준비된 새로운 남성성의 “트렌드”가 목하 확산 중이다. 심지어 이성애자(straight)와 게이(gay)를 합성한 스트레이(the Strays)란 신조어도 나왔단다. 즉 “gay-acting-straight men”이다. 우리말로 “이반틱한 일반 남자”? 이제 게이처럼 사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믿는 이성애자 남성들이 뜨고 있다.

요 얼마간 국내 일간지들이 다투어 “화장하는 남자”들에 관한 기사를 싣고 있다. 반신반의하며 컬러 로션을 내놓았다 대박을 터뜨렸다는 어느 화장품 회사의 성공담이나, 수능이 끝난 여고생을 대상으로 한 화장 강좌가 이제 남고생들에게 확대되고 있다는 이야기나, 강남의 쿨한 바나 클럽을 전전하며 직장인을 대상으로 스킨 케어와 메이크업 강좌를 하고 고객을 확보하는 새로운 마케팅이 재미를 본다는 소식은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에 등장한다. 어느 일간지의 설문조사는 아예 한국의 이성애자 여성들에게 네 가지의 남성 유형을 제시하고 선택하는 설문조사를 했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선택 대상에는 “짙은 화장을 한 남자”, “알 듯 말 듯 화장을 한 남자”, “그냥 평범한 단정한 남자”, “터프한 남자” 등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 가운데 수위는? “알 듯 말 듯 화장을 한 남자”였다.
얼마 전부터 우리 시대의 가장 쿨한 성문화의 트렌드로 소개되기 시작한 것이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이다. 데이빗 베컴과 안정환은 아마 가장 유명한 메트로섹슈얼의 아이콘일 것이다. 스파이스걸즈 출신의 아내 “포시 스파이스”의 메니큐어를 칠하고, 꽁지머리를 묶고, 치마를 걸치는 베컴의 이미지는 더 이상 거북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그것은 쿨할 뿐이다. 안정환? 역시 그의 수려하고 세련된 외모는 질투의 대상이다. 그의 헤어스타일, 피부, 의상 등은 이성애자 남자들이 질시하는 대상이다. 빌 클린턴, 브래드 피트, 자니 뎁, 마키 마크 월버그, 조지 클루니, 주드 로, 이완 맥그리거 등등. 이 모든 스타들의 공통점은 한가지, 바로 메트로섹슈얼이란 점이다.
그 희한한 용어를 발명한 문화평론가 마크 심슨이 정의하는 메트로섹슈얼은 이렇다. “대도시에 살거나 일하며 가처분 소득이 많음.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GQ]같은 패션잡지나 아니면 게이 바에서 볼 수 있었지만 1990년대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음” 운운. 결국 메트로섹슈얼은 남녀 구분이 더 이상 의무와 규범의 압력에 짓눌린 곳에 있지 않음을 암시한다. 성형외과와 다이어트 카운슬러와 헬스클럽, 패션 잡지, 인테리어, 요리 등등. 이 모든 곳에서 남성은 있고, 그들은 남성성을 변화무쌍한 라이프스타일로 변조할 수 있는 재주를 지녔다. 메트로섹슈얼은 이성애적 남성성의 규범,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마초”적인 남성의 이미지로부터 탈출한 포스트모던 영웅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녀유별의 절대적 주술에서 헤어난 이 쿨한 남성들을 쌍수 들어 환영할 것인가.
메트로섹슈얼은 우리 시대의 성별의 정치학을 라이프스타일의 정치학으로 전락시키는, 신종 퇴행의 전략이다. 부드럽고 세련되며 분방한 “젠더의 예술가”인 메트로섹슈얼이 자신의 남성성을 적극적으로 반성한다지만, 그들이 반성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반성하는 위치 자체의 남성이라는 규정이다. 자신의 남성성을 반성하는 그 남성의 위치란 대관절 무엇인가. 물론 그 위치는 “그것은 네 남성성을 마음껏 변형시켜라. 하지만 그것이 바로 네 남성의 주체성 안에서 이뤄지도록 하라”는 명령에서 영원히 거울 반사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캔 맥주를 훌쩍거리며 프로야구 경기나 즐기고, 헤진 청바지에 싸구려 골프 셔츠를 걸친 채 방바닥을 뒹구는 마초적인 이성애자 남성보다 훨씬 “교활한” 남성이다.
진부한 이성애자 남성은 적어도 자신의 남성이란 성별적 주체성을 “타율적 명령”으로 인식하는 건전한 판단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자신의 남성적 주체성이 바로 자신의 선택으로부터 벗어난 외부로터의 강제이며, 사회적 명령임을 간파하고 있다. 그러나 메트로섹슈얼에게 남성/여성이란 오직 우리가 마음껏 스스로의 연출을 통해 “각색”할 수 있고, 쇼핑을 통해 구매할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이며, 상품적 스펙터클이다. 잘 나가는 모든 마케팅 서적은 21세기의 새로운 “트렌드”를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트렌드 예측의 노스트라다무스이자 21세기 소비자본주의의 선지자라는 페이스 팝콘은 21세기의 “트렌드”는 “여성적 사고”이자 “남성해방”이라고 주장한다.
역시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메트로섹슈얼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고, 여성리더십, 여성적 가치의 활용은 경제학, 경영학의 핵심적인 패러다임이 되었다. 물론 우리는 놀라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포스트모던한 “계몽적 각성” 혹은 얼빠진 착란에 빠져야 하는 것이다. 참회는 시작되었다. “얼마나 우리는 어리석었는가. 바로 가부장제가 바로 “트렌드”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토록 육중하게 우리를 짓누르던 성별이 바로 “라이프스타일”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니.“ 결국 메트로섹슈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자연스러운 절대적 한계로 강요하고, 남성과 여성이란 언제나 우리의 삶이 기원하는 근원적인 기반으로 종용하는 성별의 테크놀로지이란 것이다. 메트로섹슈얼? 아니,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쾌적하게 우리를 찜쪄먹는 성의 보수적 이데올로그일 뿐이다. 결국 그들은 ”리트로섹슈얼(retrosexual)“이다.

욕망의 해방, 그리고 새로운 성혁명

커플 매니저, 타워 팰리스 그리고 새로운 성혁명
결혼전문가 혹은 커플매니저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요한 사회학적 증상일 것이다. 모든 사회이론은 만남 자체를 괄호친다. 만남을 성사시키는 조건은 묻지 않은 채 만남이 이뤄진 뒤의 공식적인 사회적 계약 요컨대 결혼과 가족, 연인 등을 분석한다. 따라서 그런 만남이 이뤄지도록 만들어주는 조건을 분석하는 것은 망각되거나 포기된다. 그런 점에서 커플매니저와 결혼전문가는 사회학자들이 방만하게 무시했던 중요한 영역, 즉 만남에 관하여 분석하고 종합하는 우리 시대의 숨은 사회학자들이다. 그들은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분석하며 그것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중요한 상징적 지식을 생산한다. 물론 그것을 통해 꽤 많은 돈까지 벌어들인다.
접대 혹은 손님을 맞이하는 정신적 태도가 제3자 혹은 이방인과의 만남이라면, 결혼이나 연애는 내부에서의 만남에 해당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제법 많은 사회이론가들이 분석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어 호텔은 전문화되고 상업화된 접대의 공간이다. 나날이 번창하는 컨벤션 센터류의 접대 공간과 파티서비스업과 캐터링 산업 등이 선도하는 접대 행위의 산업화는, 만남의 행위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가능한 손님을 집으로 맞이하길 꺼린다. 푸짐한 성찬과 과시적인 증여로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던 과거의 접대의 에토스는 사라진지 오래이다. 우리는 가능한 집을 밀실화하고 있으며 “둥지”와도 같은 집이 바깥에 드러나길 꺼린다. 탈근대적 주거문화의 표본이자 “한국판 상류층의 신주거문화”의 상징인 “타워팰리스” 아파트는 아예 입주자를 찾는 손님을 재울 게스트룸을 따로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아파트의 입주자들을 취재한 어느 신문의 기사는 “그들의 생활양식”에 관해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준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정의하는 태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예절과 매너”라는 것이다. 동네 수퍼마켓을 갈 때라도 츄리닝을 입어선 안되는 예절이 바로 그들의 에토스이다. 그렇지만 접대의 문화적 정체성이 이렇게 바뀌어가듯이 만남의 정체성 역시 상당히 바뀌었다.
일전 누가 서평을 게재한 적이 있는 미셀 우엘벡의 소설 [소립자]은 우리 시대의 만남의 불가해한 성격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보고서일 것이다. 그는 놀랍게도 욕망의 철학을 비판하는 과격한 선언을 제출한다. 그는 이미 노환에 시달리고, 그 자신의 잦은 표현에 따르면 망령이 들은 노인들의 헛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욕망의 철학”을 규탄한다. 물론 그가 말하는 그 염병할 노인들이 누구일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은 분명 들뢰즈와 가타리, 푸코 나아가 욕망과 쾌락을 예찬한 모든 철학자들일 것이다. 우엘벡의 이야기를 따르자면 욕망의 철학과 생활양식은 미국에서 건너온 비트족과 히피족의 정신적인 에토스를 흡수하고 욕망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다가 스스로 파멸했으며 나아가 그 뒤를 잇는 세대를 파멸시킨 자들이다(따라서 들뢰즈와 푸코가 미국에서 복잡계이론과 초끈이론, 분자생물학을 뒤섞은 희한한 히피들 사이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예찬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들은 나체 해수욕장과 뉴에이지 풍의 레저시설의 주인이 되었으며, 불감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병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비판을 자신의 욕망을 확보하기 위한 저열한 경쟁과 아집으로 몰아넣은 자들이다. 무엇보다 나쁜 것은 바로 이러한 68 세대의 철학 아래에서 황폐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아들, 딸들이다. 그들이 근사한 아파트의 테라스에서 스와핑을 즐기고, 저녁 식사에서 욕망의 철학을 회상하며 쭈글해진 뱃가죽을 쓸어 내릴 때, 바로 그들이 번식시킨 두 아들, [소립자]의 주인공인 브뤼노와 미셸은 우울증과 편집증 속으로 하염없이 빠져든다. 그런데 우엘벡의 [소립자]나 [플랫폼]같은 소설이 들려주는 하염없이 서글픈 20세기를 향한 부고는 또한 우리에게도 더없이 해당된다.
그러나 우엘벡의 소설이 환기하는 것은 만남에 대한 음험하고 도저한 향수이다. 그것은 낭만적 사랑, 진실한 사랑을 향한 안타까운 열망을 제외하곤 만남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우엘벡은 실증주의와 무성생식의 세계를 꿈꾸는 미셸과 결국은 미쳐버린 채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수감된 섹스중독자인 브뤼노로부터 지극히 애매하고 반동적인 주장을 암시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의 재발견이다. 그들이 죽기 직전 마침내 진정한 사랑인 듯한 운명적인 그녀들과 재회하고, 잠시 행복을 맛본 후 곧 끔찍한 죽음으로 그녀들을 잃어버릴 때, 그들은 각자 파멸적인 선택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우엘벡의 싱겁고 시시한 결론의 암시로부터 가정의 가치를 일깨우고 진정한 헌신과 맹세에 바탕한 결혼을 강조하는 통일교와 모르몬교의 복음을 들을 뿐이라고 강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 우엘벡같이 총명한 작가가 주장하려 한 바는 바로 섹스를 둘러싼 “풍속의 해방”이 가져온 파국적인 결과, 사이비 절대 자유주의의 감당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반성의 시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우엘벡의 주장 따위는 아랑곳 않을 것이다.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옹호하며 기꺼이 안전하고 쾌적한 SM을 즐길 것이고, 애널 섹스를 둘러싼 공포를 극복하고자 애쓸 것이며, 스와핑을 둘러싼 논쟁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사이버네틱스를 통해 추출된 상대와 수백 번이 넘게 미팅을 할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가장 안전하고 훌륭한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기꺼이 요금을 지불하고 데이터베이스 속에 자신의 자질구레한 신상명세를 넘길 것이다. 또한 “동쪽에서 오는 귀인을 만나게될 것이다”는 따위의 점괘를 얻고자 복채를 지불할 것이며, 타로카드와 사주궁합을 보는 데 아낌없이 주의를 집중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싸구려 행동심리학과 뉴에이지 풍의 사이버네틱스, 허접한 동양학이 뒤섞여 만들어낸 만남의 과학을 통해 만남의 “기적”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한다. 그러나 이같은 “만남”을 둘러싼 인식의 증대가 어느 사회학자의 말마따나 “친밀성의 구조변동”을 가져오고 한결 “자기성찰성”이 증대된 “순수한 관계”, “조형적인 섹슈얼리티”로의 진화를 가져오는 것일까. 물론 우리는 그런 주장에 한치도 동의할 수 없다. 우엘벡의 주장처럼 우리는 사랑을 더욱더 지혜롭게 통제할 수 있는 세대가 되기는커녕 만남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한 인류 최초의 세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벗어날 탈출구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답을 찾느라 우리는 또 수십 년을 허비해야 할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또 한번의 성혁명이 있을 것이다. 부디 그것이 극우가족주의자에 의한 반혁명이 아니길 학수고대할 뿐이다.

“비”의 성공 시대, 아도르노의 문화 산업론을 다시 생각한다


연예 비즈니스에 의해 기획된 가수라는 것이 오명이던 시대는 갔다. 물론 이미 사라지고 만 HOT를 비롯하여 JTL과 문희준을 여전히 증오하고 경멸하는 이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혐오하는 청중의 반응은 SM기획사의 어설픈 몸짓 때문이었지 그들에게 속한 어떤 속성과 자질 때문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것을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와 춤의 텍스트에는 별반 관심이 없다. 정작 우리가 작품과 제작된 상품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며, 소비자가 아니라 “미적 대상”과 무관심한 척 거리를 둔 우아한 고전적인 청중으로 스스로를 제 아무리 위치시키려해도, 그들을 비웃는 조롱 안에는 이미 소비자로서의 적극적인 “참여”가 스며있다.
이제 HOT와 GOD로 대표되는 기획 연예 비즈니스의 시대는 이제 한물 간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그것은 처량한 향수에 깊이 빠진 채 프로모터와 매니저와 음반기획자로 상징되던 록큰롤의 한 시대를 상기하는 짓과 같다. 비틀즈의 위대한 매니저였으며 특히 존 레논과의 동성애적인 애착을 억제하지 못한 채 우울증에 사로잡혀 자살한 브라이언 엡스타인,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하위문화와 스펙터클한 소비문화의 전령 사이를 오가며 “벨벳언더그라운드”라는 밴드를 후견했던 앤디 워홀, 그리고 저 유명한 “월 오브 사운드”의 필 스펙터와 디스코 시대의 영웅 버트 바카락의 스튜디오를 기억하는 이들. 그러나 알다시피 탈근대 자본주의의 음악산업의 아이콘은 데이빗 게펜이다. 그는 록큰롤의 비즈니스를 “신경제”의 패러다임과 접속시킨 장본인 아닐까. 비록 그는 닷컴 기업의 CEO는 아니었지만 게펜이라는 레이블을 “아마존닷컴”과 같은 브랜드로 만들어내고, 스토커와 같은 모습으로 청소년 하위문화의 흐름을 포착하여 그것을 취향의 규범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는 인수합병의 지옥 속에서 어마어마한 가치로 그것을 팔아 넘겼다.
어쨌거나 프로젝트를 통해 기획된 콘텐츠가 곧 문화와 예술인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음악 비즈니스를 대표하는 아이콘은 누구일까. 아마 “비”라는 가수가 바로 새로운 시대의 문화산업의 화신 아닐까. 먼저 그는 요즘 뜨고있다는 새로운 트렌드인 “메트로섹슈얼”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 남성적이면서 또한 동시에 여성적인 그의 외모와 인상, 분위기. 시중의 평가는 그가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컨셉의 진정한 재현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꽃미남”의 느끼한 감상적 호소와도 거리를 두고 촌스럽고 멍청한 진짜 사나이와도 무관한 그의 이미지는 물론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저 진부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것은 HOT와 GOD 모두 분발했던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를 기획한 회사는 그를 정보경제의 콘텐츠로 가공하고 판매하는데 발군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요즘 마케팅과 경영학이 토해내는 살벌한 용어는 “비”를 위해 마련되어 있다. 이를테면 닷컴 기업을 떨게 만드는 “비즈니스 모델”이란 용어는 “비”에게는 우스운 말이다. “원소스 멀티유즈”란 디지털 경제의 황금율 역시 “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편익과 효용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을 팔아야 한다는 마케팅 구루들의 예언도 “비”를 두고 만들어진 말이라 싶을 정도이다. 이제는 시들해진 “고객관계 경영”과 “휴먼 네트워크'”도 역시 “비”의 전공분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의 음반은 디지털콘텐츠의 쿠폰을 내장하고 있고, 그의 초상은 상품권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그의 뮤직비디오는 간접광고기법을 도입하여 여러 브랜드와 윈윈 전략을 구사한다. 그는 모 치킨회사의 광고에 출연하여 “야마카시”란 익스트림스포츠를 즐기는 분위기를 선사하고 브랜드를 감성화한다. 그의 음반에는 “비의 1일 매니저되기”와 “리니지 무료이용권’이 들어있어 고객관계관리를 솔선한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저 유명한 문화산업론은 이 정도면 무색해진다. 도구적 합리성이 문화를 좀먹고 상품 세계의 추상적인 화폐가치에 의해 문화는 표준화된다는 그들의 문화산업론은 그간 많은 질타를 받았다. 어쩌면 아도르노는 사르트르의 운명과 흡사할 지경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더 이상 사르트르를 철학자로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가 실존주의 철학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철학적인 “사고”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그를 데카당트한 혹은 저항적인 에세이스트로 기억할 뿐이다. 이러한 처지는 아도르노에게도 해당되지 않을까.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을 역설하고, 파시즘의 정신병리가 만들어내는 집단적 주체성에 골몰했으며, 무엇보다 문화산업의 등장을 고발했던 아도르노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고상한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자이기조차 했던 고상한 에세이스트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아도르노의 주장을 되새길 때가 오지 않았을까. 문화산업은 탈근대 자본주의의 경제 자체가 되어 우리에게 복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약간의 유보 조건을 달 필요가 있다. 그가 문화의 상품화를 우려했다면 지금 그것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모든 상품이 문화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헤겔적인 논리로 그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먼저 경제가 문화를 부정하였고 그리하여 경제는 문화를 자신의 논리로 물들이며 ‘식민화’하였다. 그러나 문화는 이제 곧 경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의 최종적인 승리가 어떤 모습을 취하는 것일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아도르노가 보았던 것은 문화가 판매될 수 있는 상품이기 위해 그리고 상품의 핵심적인 논리인 장벽 없는 이동과 거래 즉 교환의 대상이 되기 위해 “일차원적”인 물신이 되어야 했다는 것이다. 문화는 언제나 출판사, 방송국, 음악산업, 영화산업을 통해 매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이다. 상품은 스스로를 가치화하기 위해 곧 문화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은 이제 트렌드와 유행, 라이프스타일을 연출하고 장식하는 심미적인 대상이다. 따라서 비의 마케팅 성공담은 곧 우리 시대의 문화산업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를 실천하는 역설적인 사례이다

위안부 누드, 강간 환상 그리고 식민주의의 섹슈얼리티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그것의 공식명칭은 종군위안부 테마영상집이었다 한다)로 북새통이다. 식민의 역사를 다시 기억해보자는 진지한 발로에서 위안부 누드를 기획했다는 제작사 측의 주장은, 참으로 가소롭고 기상천외한 설레발이다. 이런 졸렬한 변명을 할 생각이었으면 그냥 함구하고 있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안부 누드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이들의 태도 역시 이들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위안부 누드를 만든 이들은 위안부 여성들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을지 모를 은밀한 성적인 환상을 천연덕스럽게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해했거나 무식했던 점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다들 즐기고 있다”는 순진한 사실만을 알고 있었지 “아무도 즐기지 않는 척 즐기고 있다”는 사실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어제 나는 친구 누나를 따먹었다”는 식의 흔해빠진 저질스런 음란한 낙서와 비슷한 수준으로 다루고 말았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물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옆집에 사는 친구 누나를 따먹었다는 식의 화장실 낙서와 위안부 여성들의 성적인 재현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 둘 모두 은밀한 강간 환상의 틀을 통해 자신의 성적인 욕망을 유지하려 한다는 점에서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위안부 여성들이 식민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위안부 여성들의 체험을 집요하게 성으로부터 떼어놓으려 애써왔다. 우리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체험을 상징화하는 유일하게 허용된 방식은 “식민지 백성”이다. 이는 그녀들이 겪은 고통의 핵심적인 원인이 강간이라는 사실을 삭제하는 것이다. 이는 전시에 강간을 당한 여성들의 체험을 인종적 폭력과 식민적인 지배의 결과로 환원하려는 (보스니아나 르완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남성의 역사적 법정의 논리이다. 설령 그녀들이 겪은 강간의 체험을 마지못해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강간당한 여성의 분노가 아니라 자기 여자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힘없는 남자들의 무력과 자괴를 위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 오랜 세월 숨죽여 살다가 마침내 ‘커밍아웃’을 하였을 때 그녀들을 그토록 침묵하게 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그것은 그녀들이 전시에 강간을 당했기 때문이다.
위안부 누드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정신대 할머니들을 식민지 백성이 아니라 성적인 대상으로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제국주의를 기억하는 남성 주체의 입장 안에 강간당한 여성의 자리는 없거나 부정된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누이이거나 어머니로서의 여성이다. 그렇지만 민족의 역사가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강간당한 여성으로서의 체험을 소외시키고 식민지 백성으로 상징화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위안부 여성들의 강간의 체험을 완벽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된 채 긍정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위안부 누드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억압된 채 즐겨지고 있던 남성적 환상이다. 위안부 누드는 위안부 여성(혹은 성의 희생을 강요당한 역사 속의 여성들)에게 투입되어 있는 은밀한 성적인 환상을 그만 어이없이 누설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위안부 누드는 괜찮다는 것인가. 당연히 아니다. 정반대로 위안부 누드는 강간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적인 기억마저 소모하고 있기에 더욱 위악하고 또한 폭력적이다. 위안부 누드는 역사적 기억을 강간 환상의 무대 안에서 소비한다. 그 자리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존재하지 않고 스스로 은밀히 즐기고 있었음에 분명한 성적인 파트너, 마조히스틱한 여성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때의 위안부 여성은 재국주의적 전쟁에 징발당한 채 성적인 보상을 제공해야 했던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모든 사회적 관계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집행하는 “나의” 상상적인 여성일 뿐이다. 이는 강간이나 성희롱을 자행한 남자들에게서 흔히 듣는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그는 왜 그녀가 그것이 싫었다면 왜 감히 저항하고 부정하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과 그녀 사이에 놓인 권력관계를 보지 못한 채 오직 욕망의 대면만으로 그 상황을 각색한다. 성폭력과 강간을 저지른 남자들의 집요한 환상은 언제나 그녀도 분명히 즐겼다는 것이다.
이는 위안부 누드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리고 위안부 누드의 비참함은 바로 이런 성적 환상을 위해 전시 강간이라는 비극적 진실을 망각한다는데 있다. 위안부 누드는 위안부 여성의 체험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우고 있다. 어떻게 감히 “어머니 조국”을 능욕하느냐고 위안부 누드를 비난할 때 그 주장은 식민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식민의 역사 안에 놓인 위안부 여성의 체험에 숨어있는 성을 떼어내고 아울러 자신의 몰역사적인 강간 환상을 유지하려는 몸짓에 가깝다. 위안부 누드는 식민의 역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강간 환상을 이용한 싸구려 포르노일 뿐이다. 그것은 식민적 역사와 전시의 강간을 자신의 환상의 무대 안의 간단한 장치로 소비하려 했을 뿐이다. 따라서 위안부 누드의 평범하고 순진한 의도가 격렬한 거부에 좌절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강간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견지되어야만 하는 “망각의 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성적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없이 우리는 상대의 욕망을 무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욕망의 무대가 되는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현실을 가능한 모른 척해야 한다. 그래야 그 환상은 달콤하고 뜨거워진다. 그러나 위안부 누드는 시퍼렇게 살아있는, 결코 그것을 무덤까지 비밀로 지킨 채 가지고 가지 않겠다는 강간당한 여성의 분노와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안부 누드가 실패한 것도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자신의 체험을 진술하고 증언하는 여성 앞에서 남성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지만 위안부 여성은 결코 자신의 체험을 역사화하지 못했다. 역사를 기억하는 주체가 민족인 한 그것이 기억하는 여성은 어머니나 누이 뿐이다. 민족-역사의 환상과 강간 환상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다. 물론 그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온당한 방식일 수 없고 또한 위안부 여성을 기억하는 올바른 방식일 수 없음은 물론이다. 위안부 누드를 비난하는 것은 그것을 은밀히 즐기는 자들의 허울좋은 농담일 뿐이다.

직업의 직업, 노동의 노동

포브스 지난 호를 줏어 읽다가 직업의 변천사 비슷한 글에 눈이 걸렸다. 그저 그렇고 그런 미래의 유망 직업 류의 글이었지만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노동의 노동, 일에 관한 일, 그러니까 일의 관리와 통제 혹은 경영에 관련된 일들이 요즘 잘나가는 직업군에 속해있다. 이런 메타-직업이라 부를 만한 것의 부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인간경영시대’맞아 영역 확대

인사 컨설턴트는 기업 내 인적자원 관리 ·조직정비 ·직원교육등 인사 전반을 다루는 일을 한다. 현재 국내 기업들은 상시 구조조정 체제 아래 직원들의 근무 의욕이 떨어져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노사갈등에 대한 고민도 크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인사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선 이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게 마련이다. 연봉제 확산으로 성과 중심의 인사문화가 자리잡고 있어 이를 체크할 인사 컨설턴트에 대한 수요가 더욱 늘 것으로 보인다.

인사 컨설턴트는 사람을 관리하고 육성하는 데 책임감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인간경영 노하우가 요구되는 직업이다. 인사 컨설팅 영역에는 조직에 요구되는 인적자원의 특성을 분석, 적합한 인재를 선발 ·분류 ·배치평가하는 업무와 보상관리 ·직원교육 등이 포함된다. 최근에는 퇴직자 관리 등도 업무 영역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인사 컨설팅 전문회사 타워스 페린(Towers Perrin)의 박광서 한국사장은 “인사 컨설턴트는 흔히 의사에 비유된다”며 “의사가 수술을 잘못하면 한 사람이 생명을 잃지만, 잘못된 인사 컨설팅은 수천 명의 인력을 해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현재 활동 중인 인사 컨설턴트는 세계적으로 2만여 명에 달한다.
한국에는 아직 10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인력 관리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그 수가 계속 늘 것으로 보인다. 박 사장은 “머지않아 국내에서도 인사 컨설턴트가 미국 등 외국에서처럼 주목받는 직업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확신했다. 현재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계 인사전문 컨설팅사는 타워스 페린을 비롯해 머서(Mercer)그룹 ·휘트(Hwite) ·왓슨와이어트(Watson Wyatt)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업체도 여러 곳 있다.
미국에서는 와튼스쿨 ·예일 ·하버드 ·코넬등의 MBA과정이 인사 컨설팅으로 유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에서는 인사관리(HR ·Human Resource) 전문기관인 SHRM에서 HR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인사담당자 ·교육자 ·컨설턴트 ·연구원 대상으로 PHR ·PHR란 자격시험을 통해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산업(조직)심리 ·산업교육 ·상담심리 관련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이 인사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사례가 많다.
인사 컨설팅에서는 경영학적 지식이나 자격도 중요하지만, 가장 필수적인 자격요건은 풍부한 경험이다. 실제로 인사 컨설턴트로 활동하는 많은 사람들이 해당 분야에서의 오랜 경험을 축적한 경우가 많다. 인사 컨설턴트의 급여 수준은 활동영역이나 분야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력을 보유하면 5,000만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사외 컨설팅을 제공하는 경우에는 그 능력이나 경험에 따라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대형 프로젝트를 여러 차례 맡은 경험이 있는 경우, 수억원대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도 많다. 외국의 유력 인사 컨설턴트는 수십억원대의 연봉을 받기도 한다.
시대별 인기직업 변천사
고영상/ 신한은행 상품개발실 과장
직업은 시대의 사회 ·경제적 상황을 비추는 거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내 직업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950년대 물장수 ·전차 운전사에서 70년대 건설 노동자를 거쳐 90년대 펀드 매니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들이 유망직종으로 인기를 모았다. 1,000년 후에는 인공두뇌 기술자같은 기상천외한 직업들도 나올지 모른다.
1950년대 : 물장수 ·얼음장수 ·전차 운전사 ·전화교환원 ·라디오 조립원
60년대 : 은행원 ·공무원 ·회사원 ·타이피스트 ·스튜어디스
70년대 : 대기업 직원 ·금융계 종사자 ·공작기계 엔지니어 ·전당포 업자 ·건설 노동자
80년대 : 백댄서 ·연예인 ·광고기획자 ·카피라이터 ·통역사 ·운동선수
90년대 : 외환 딜러 ·펀드매니저 ·프로그래머 ·네트워크 전문가 ·인터넷 전문가 ·바이오 산업 전문가
3000년대 : 공상과학 소설가들이 점찍은 3000년대의 유망직업은 돼지 사육사 ·애완동물 ·디자이너 ·인공두뇌 기술자 등이다. 돼지 사육사는 인간 세포 배양용 돼지를 사육하는 전문가. 애완동물 디자이너는 토끼 병아리 ·돼지 ·뱀 ·악어 ·개처럼 동물의 유전자를 합성해 새로운 애완동물을 디자인하는 직업이다. 인공두뇌 기술자는 인공두뇌의 용량을 늘리고 버그를 잡는 기술자다.
※미국(현재)
노인복지사 정보검색사 유전자감식사 전염병 전문의 고용전문변호사 무선통신 전문가
국제회계사 인사전문가 그래픽디자이너 소프트웨어 기술자

게이 결혼의 ‘권리’라는 미망

영국의 경제주간지 에서 커버스토리로 미국 대선의 게이 결혼에 관련된 이슈를 다뤘다. 선거에 임박하면서 민주당의 대선주자를 둘러싼 뜨거운 소란만큼이나 보수당의 표챙기기를 위한 데마고기도 역시 파상처럼 벌어진다. 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인 분할이 게이 결혼이란 이슈를 통해 제기되고 또한 실현될까. 게이의 결혼 권리를 둘러싸고 마치 그것이 중요한 이슈인양 게이정치학이 개입하는 것은 왜 잘못일까. 게이 결혼을 허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쟁점이 아니다. 그것은 친밀성을 탈이성애화시키려는 게이 정치학의 급진적인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씨빌유니언과 포괄적인 사회적 권리로서의 결혼 그리고 가정적 동반자관계(domestic partnership) 사이의 관계를 둘러싸고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것을 한국에 빗대어본다면? 게이 호주권? 세대주로서의 권리? ….
The case for gay marriage
Feb 26th 2004
It rests on equality, liberty and even society

SO AT last it is official: George Bush is in favour of unequal rights, big-government intrusiveness and federal power rather than devolution to the states. That is the implication of his announcement this week that he will support efforts to pass a constitutional amendment in America banning gay marriage. Some have sought to explain this action away simply as cynical politics, an effort to motivate his core conservative supporters to turn out to vote for him in November or to put his likely “Massachusetts liberal” opponent, John Kerry, in an awkward spot. Yet to call for a constitutional amendment is such a difficult, drastic and draconian move that cynicism is too weak an explanation. No, it must be worse than that: Mr Bush must actually believe in what he is doing.
Mr Bush says that he is acting to protect “the most fundamental institution of civilisation” from what he sees as “activist judges” who in Massachusetts early this month confirmed an earlier ruling that banning gay marriage is contrary to their state constitution. The city of San Francisco, gay capital of America, has been issuing thousands of marriage licences to homosexual couples, in apparent contradiction to state and even federal laws. It can only be a matter of time before this issue arrives at the federal Supreme Court. And those “activist judges”, who, by the way, gave Mr Bush his job in 2000, might well take the same view of the federal constitution as their Massachusetts equivalents did of their state code: that the constitution demands equality of treatment. Last June, in Lawrence v Texas, they ruled that state anti-sodomy laws violated the constitutional right of adults to choose how to conduct their private lives with regard to sex, saying further that “the Court’s obligation is to define the liberty of all, not to mandate its own moral code”. That obligation could well lead the justices to uphold the right of gays to marry.

Let them wed
That idea remains shocking to many people. So far, only two countries—Belgium and the Netherlands—have given full legal status to same-sex unions, though Canada has backed the idea in principle and others have conferred almost-equal rights on such partnerships. The sight of homosexual men and women having wedding days just like those enjoyed for thousands of years by heterosexuals is unsettling, just as, for some people, is the sight of them holding hands or kissing. When The Economist first argued in favour of legalising gay marriage eight years ago (“Let them wed”, January 6th 1996) it shocked many of our readers, though fewer than it would have shocked eight years earlier and more than it will shock today. That is why we argued that such a radical change should not be pushed along precipitously. But nor should it be blocked precipitously.
The case for allowing gays to marry begins with equality, pure and simple. Why should one set of loving, consenting adults be denied a right that other such adults have and which, if exercised, will do no damage to anyone else? Not just because they have always lacked that right in the past, for sure: until the late 1960s, in some American states it was illegal for black adults to marry white ones, but precious few would defend that ban now on grounds that it was “traditional”. Another argument is rooted in semantics: marriage is the union of a man and a woman, and so cannot be extended to same-sex couples. They may live together and love one another, but cannot, on this argument, be “married”. But that is to dodge the real question—why not?—and to obscure the real nature of marriage, which is a binding commitment, at once legal, social and personal, between two people to take on special obligations to one another. If homosexuals want to make such marital commitments to one another, and to society, then why should they be prevented from doing so while other adults, equivalent in all other ways, are allowed to do so?

Civil unions are not enough
The reason, according to Mr Bush, is that this would damage an important social institution. Yet the reverse is surely true. Gays want to marry precisely because they see marriage as important: they want the symbolism that marriage brings, the extra sense of obligation and commitment, as well as the social recognition. Allowing gays to marry would, if anything, add to social stability, for it would increase the number of couples that take on real, rather than simply passing, commitments. The weakening of marriage has been heterosexuals’ doing, not gays’, for it is their infidelity, divorce rates and single-parent families that have wrought social damage.
But marriage is about children, say some: to which the answer is, it often is, but not always, and permitting gay marriage would not alter that. Or it is a religious act, say others: to which the answer is, yes, you may believe that, but if so it is no business of the state to impose a religious choice. Indeed, in America the constitution expressly bans the involvement of the state in religious matters, so it would be especially outrageous if the constitution were now to be used for religious ends.
The importance of marriage for society’s general health and stability also explains why the commonly mooted alternative to gay marriage—a so-called civil union—is not enough. Vermont has created this notion, of a legally registered contract between a couple that cannot, however, be called a “marriage”. Some European countries, by legislating for equal legal rights for gay partnerships, have moved in the same direction (Britain is contemplating just such a move, and even the opposition Conservative leader, Michael Howard, says he would support it). Some gays think it would be better to limit their ambitions to that, rather than seeking full social equality, for fear of provoking a backlash—of the sort perhaps epitomised by Mr Bush this week.
Yet that would be both wrong in principle and damaging for society. Marriage, as it is commonly viewed in society, is more than just a legal contract. Moreover, to establish something short of real marriage for some adults would tend to undermine the notion for all. Why shouldn’t everyone, in time, downgrade to civil unions? Now that really would threaten a fundamental institution of civilis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