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라, 웃어라, 부디 승리하라

조현택, 아지트, 디지털프린트, 2008, "Boys Be Ambitious" 전시 중에서


살아라, 웃어라, 부디 승리하라: 치유하는 문학의 자장(磁場)


‘문학-풍경’

우리 시대에 문학을 둘러싼 이런저런 담론들, 이를테면 문학의 위기, 문학의 진부화 같은 것을 듣고 있노라면 무언가 맥 빠진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것은 문학적 저작 혹은 텍스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문학적인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한정하고 보존하려는 몸짓처럼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그것은 마치 문학 수비대를 자처하는 이들이 온전히 문학에 속한 것을 선별하고 그를 통해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른 문학의 처지를 은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런 주장들이 강박처럼 거부하는 것은 문학의 죽음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 덕택에 문학의 죽음을 통지하는 부고장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강박적인 집착이 실상 문학의 죽음이 아니라 문학의 또 다른 형태로의 번성을 부인하는 딴 짓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제품사용설명서와 시를 문학 텍스트로 함께 놓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일이다. 광고전단지와 소설책을 문학 텍스트로 읽는 것 역시 아무래도 낯선 일이다. 그렇지만 근대에서 자율화된 문학이 했던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다는 점을 자각한다면 이는 전연 어색하고 낯선 일이 아니다.

문학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자크 랑시에르가 현대의 예술적 현상을 서술하기 위해 ‘미학적 체제’란 개념을 제안할 때, 그는 그것의 특성을 바로 감성적인 것의 세계가 보편화되었다는 것, 노래하고 읊어지고 그릴 수 있는 것의 세계를 거의 모든 것에 확대함으로써 등가화 했다는 것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일상생활의 사물은 이제 미적인 대상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러시아 아방가르드나 바우하우스 같은 것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를 플로베르의 소설에서, 말라르메의 시에서, 혹은 현대 발레 같은 모든 곳에서 발견한다. 랑시에르는 마치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처럼 미적인 것의 혹은 감성적인 것의 체제의 고고학을 시도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에서 감성적인 것의 분배를 조직하는 권력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목도하는 문학의 빈사는 다른 시좌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문학적인 것이 위기에 직면하기는커녕 외려 문학이 다른 방식으로 전유되며 생산되는 의외의 풍경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문학 평론이나 이론은 좋게 말해 너무나 고전적이고 나쁘게 말해 너무나 복고반동적이다. 플롯이든 서사이든 문학에 관한 이론은 언제나 고전적인 문학의 장르와 구획 속에 머문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 문학이 만들어 놓은 문학에 관한 어떤 이상적인 텍스트를 마주하고 있고 그를 위해 맞춤된 비평적 지식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문학 평론이나 이론은 너무나 철학화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서의 비교문학이란 이름 아래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문학 이론은 최신의 철학적 담론을 소개하고 병합하는데 분주하다. 문학이 철학화 된다는 것을 굳이 좋거나 나쁜 일로 따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학의 철학화는 이를테면 ‘지식인으로서의 문학가’같은 근대 문학의 현상으로부터의 퇴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식인으로서의 문학가’는 문학이 어떻게 지성적인 역량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을 통한 지식인으로서의 행위 혹은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을 동시에 매개할 수 있는 문학의 능력에 관한 물음은 다시 문학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이는 글로 쓰인 것과 감성적인 것 그리고 지성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다시금 묻게 한다. 문학의 철학화는 이런 물음에 직면하려는 노력을 회피하려는 것 아닐까.

다문화주의라는 사유의 궁핍



Leonard Cohen, The Partisan


- 이 아름다운 노래에 등장하는 빨치산이 불현듯 탈레반이라면, 알카에다의 전사라면 어떨까? 이것이 참기 어려운 불쾌감을 준다면, 다문화주의란 얼마나 허위일까. 하물며 불어가 아닌 아랍어로 이 노래의 후렴구를 부른다면?

다문화주의라는 사유의 궁핍
- 다양한 것과 보편적인 것 사이의 조우를 위하여


차이라는 것,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적대적이라는 것


미국 아이비리그에 속한 어느 유명한 대학교에는 사회학과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그냥 사회학과이고 다른 하나는 발전사회학과이다. 그런데 어쩌다 두 개의 사회학과 있게 된 것일까. 사회학과는 그냥 사회학 일반을 가르치고 발전사회학과는 사회학의 특별한 분야인 발전사회학을 가르치는 학과라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사회학과 발전사회학은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냥 우파 사회학과 좌파 사회학의 차이를 미국의 대학 제도 안에 기워 넣는 도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방식을 보여줄 따름이다. 이런 식의 시차(視差)는 다른 것에서도 숱하게 등장한다. 이를테면 자유민주주의는 따로 표시해야 필요가 있는 특수한 신념이 아니라 그냥 인간 본연의 지향이라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언제나 특수한 종류의 사람들이 갖는 예외적이고 선병질적인 태도인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이에는 자연적인 태도와 주입된 이념이라는 시차가 항상 따라다니는 셈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를 어떤 특수한 태도로 고정시키고 그것을 구성하거나 이끄는 원리나 신념을 제시하려 할 때마다 우리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흔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의 멍에를 씌우는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야말로 가장 탁월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