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문학을 둘러싼 이런저런 담론들, 이를테면 문학의 위기, 문학의 진부화 같은 것을 듣고 있노라면 무언가 맥 빠진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것은 문학적 저작 혹은 텍스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문학적인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한정하고 보존하려는 몸짓처럼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그것은 마치 문학 수비대를 자처하는 이들이 온전히 문학에 속한 것을 선별하고 그를 통해 거의 빈사 상태에 이른 문학의 처지를 은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런 주장들이 강박처럼 거부하는 것은 문학의 죽음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 덕택에 문학의 죽음을 통지하는 부고장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강박적인 집착이 실상 문학의 죽음이 아니라 문학의 또 다른 형태로의 번성을 부인하는 딴 짓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제품사용설명서와 시를 문학 텍스트로 함께 놓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일이다. 광고전단지와 소설책을 문학 텍스트로 읽는 것 역시 아무래도 낯선 일이다. 그렇지만 근대에서 자율화된 문학이 했던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다는 점을 자각한다면 이는 전연 어색하고 낯선 일이 아니다.
문학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자크 랑시에르가 현대의 예술적 현상을 서술하기 위해 ‘미학적 체제’란 개념을 제안할 때, 그는 그것의 특성을 바로 감성적인 것의 세계가 보편화되었다는 것, 노래하고 읊어지고 그릴 수 있는 것의 세계를 거의 모든 것에 확대함으로써 등가화 했다는 것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일상생활의 사물은 이제 미적인 대상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러시아 아방가르드나 바우하우스 같은 것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를 플로베르의 소설에서, 말라르메의 시에서, 혹은 현대 발레 같은 모든 곳에서 발견한다. 랑시에르는 마치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처럼 미적인 것의 혹은 감성적인 것의 체제의 고고학을 시도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그의 작업에서 감성적인 것의 분배를 조직하는 권력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가 목도하는 문학의 빈사는 다른 시좌를 통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문학적인 것이 위기에 직면하기는커녕 외려 문학이 다른 방식으로 전유되며 생산되는 의외의 풍경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문학 평론이나 이론은 좋게 말해 너무나 고전적이고 나쁘게 말해 너무나 복고반동적이다. 플롯이든 서사이든 문학에 관한 이론은 언제나 고전적인 문학의 장르와 구획 속에 머문다. 그래서 우리는 근대 문학이 만들어 놓은 문학에 관한 어떤 이상적인 텍스트를 마주하고 있고 그를 위해 맞춤된 비평적 지식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상상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문학 평론이나 이론은 너무나 철학화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서의 비교문학이란 이름 아래에서 이뤄지는 것처럼 문학 이론은 최신의 철학적 담론을 소개하고 병합하는데 분주하다. 문학이 철학화 된다는 것을 굳이 좋거나 나쁜 일로 따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학의 철학화는 이를테면 ‘지식인으로서의 문학가’같은 근대 문학의 현상으로부터의 퇴행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지식인으로서의 문학가’는 문학이 어떻게 지성적인 역량을 발휘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담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을 통한 지식인으로서의 행위 혹은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을 동시에 매개할 수 있는 문학의 능력에 관한 물음은 다시 문학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리고 이는 글로 쓰인 것과 감성적인 것 그리고 지성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다시금 묻게 한다. 문학의 철학화는 이런 물음에 직면하려는 노력을 회피하려는 것 아닐까.
less.. 이야기를 바꿔 서점에서 흔히 보는 ‘비소설’이란 분류에 관해 생각해 보자. 사실 ‘비소설’이란 소설 아닌 것은 사실 소설의 장르에서 제외된 것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인증을 받지 못한 잉여적인 텍스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물론 거기에는 온갖 잡다한 텍스트들이 망라될 것이다. 다시 소설과 비소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자기계발”이란 텍스트를 고려해 보자. 실은 이 텍스트들의 위치는 지극히 애매하다. 그것은 심리학적 지식을 응용하는 텍스트처럼 보이기도 하고(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따위) 때로는 경영학적인 지식을 일상생활에 응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길잡이 책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시크릿 따위), 또 어떤 경우에는 마치 유사(類似) 문학작품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따위). 그것은 사실 문학의 자리에 속하지 않은 채 맴도는 정체불명의 유사 문학적 현상이 아닐까. 그러나 시선을 바꿔 그것을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문학적 현상으로 본다면 어떨까. 그러나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를 지우자”는 식의 문학적 권위에의 조롱을 선동하는 생각으로부터가 아니라 양자를 잇는 혹은 내통(內通)하게 하는 자장을 발견함으로써 말이다. 그것은 랑시에르 같은 이가 일갈했던 모든 문자들의 등가화로서의 근대 문학이란 발상을 취한다면 사실 이는 문학적인 것이란 것에 속하는 것들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모두 털어 보기엔 우리는 아직 여간한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 같은 문학적 현상을 충분히 섭렵한다는 것도 엄청난 일이려니와 그것에 대한 조사와 분석을 위한 변변한 도구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것은, 아파두라이가 지구화의 효과를 분석하기 위해 불균등한 논리와 궤적을 통해 신축하는 다양한 풍경(scape)을 제시했던 것으로부터 힌트를 얻어, ‘문학-풍경’이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정도이다. 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두는 문학-풍경이란 본격 문학적 텍스트에서부터 비문학적 텍스트로 간주된 다양한 글쓰기들이 어떻게 문화적 등가를 만들어내면서 펼쳐지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문학적 텍스트가 문학적 텍스트를 모방하거나 응용한다거나 아니면 문학적 텍스트가 비문학적 텍스트에서 나오는 담론적 양태를 전유하거나 차용한다는 식의 생각을 피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외려 우리는 다양한 글쓰기들을 등가화시킴으로써 그것을 끊임없는 연속적인 문학적 공간이 만들어내는 논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우리가 잠정적으로 ‘문학-풍경’이라고 칭하는 그런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문학-풍경’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지극히 어설픈 예비적인 가설을 생각해보고 그로부터 근년의 문학적 현상을 조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나는 먼저 문학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는 문학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라는 두 개의 자율적 실체 사이의 관계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나는 문학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의 개별적 실체의 정체성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심성, 혹은 자본주의적 삶의 주체성이라 할 만한 것을 통해 양자가 어떻게 서로 넘나들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문학에서의 글쓰기를 지배하는 규칙을 변용하거나 전환시킬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삶 안팎에서 그를 표상하는 담론 역시 변화시킬 것이다. 이 안에서 글쓰기 혹은 텍스트를 조직하는 방식은 물론 문학을 전유하는 매개적인 담론과 실천-예를 들어 책읽기의 방식과 문학적 텍스트를 소비하는 일상적 관행 등 - 역시 변화될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이 글에서 단지 “치유로서의 문학”이라는 담론을 다루는 데 머물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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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하는 글쓰기, 치유하는 주체
치유로서의 글쓰기 혹은 치료로서의 문학이란 담론은 앞에서 살펴본 새로운 자본주의정신 혹은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체화의 윤리라고 할 만한 것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있다. 조금 장황하지만 다음의 어느 신문 기사를 인용해보자. 이 기사는 치유하는 글쓰기란 책을 낸 어느 여성 필자의 글에 관한 서평 기사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치유로서의 글쓰기라는 문학적 현상을 이루는 주된 특성을 일목요연하게 식별할 수 있다.
“‘충분히 사랑한 것은 떠나갑니다. 모질게 쳐내고 잘라낼 필요는 없어요. 내 안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봐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면, 그것들은 어느 순간 길 떠날 채비를 합니다.’ 상실의 시대이고, 더불어 치유의 시대다. 가슴 한편이 소금밭인 사람의 숫자만큼 다양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페미니스트 잡지 이프의 편집장 출신인 박미라(44)씨는 치유의 수단으로 글쓰기를 제안한다. 글쓰기를 통한 소통과 자기구원의 이야기가 에세이집 <치유하는 글쓰기>(한겨레출판 발행)로 묶여 나왔다.
‘잠 자다가 무서운 소리를 들으면, 뭘까 궁금해 미치면서도 막상 가서 확인할 용기가 안 나잖아요.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상처, 혹은 내면의 공포도 마찬가지예요. 직면할 마음을 먹기 쉽지 않지만, 꺼내 놓고 보면 늘 별 게 아니죠.’
박씨는 치유로서의 글쓰기가 ‘덜어내기’와 ‘거리 두기’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상담자를 찾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 말로는 미처 하지 못할 상처를 간직한 사람에게도 효과 있는 자기 치유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글쓰기는 참으로 탁월한 도구예요. 복잡한 심정을 종이 위에 적는 것만으로 머리가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어요. 일단 덜어내고 나면 자연스레 거리가 생기죠. 그렇게 ‘내면의 아이’를 바라보고 얘기를 나누고 나면, 행복하게 떠나보낼 수 있어요’
‘밖으로 향한 시선을 안으로 거두고, 내 속에서 웅숭거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커버렸기 때문에 누군가의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지도 몰라요. 자신만이 자신을 돌볼 수 있어요. 다들 그럴 나이가 된 거죠.’”
여기에서 “내안의 어두운 부분, 용기, 상처, 내면의 공포, 직면할 마음, 내 안의 아이, 자신 만이 자신을 돌봄”같은 일련의 어휘는 치유로서의 글쓰기라는 행위를 제시하기 위해 등장하는 말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넓은 배경, 앞에서 보았던 새로운 자본주의정신 혹은 새로운 자기의 윤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재현하는 담론적 세계로부터 출현하는 말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조금 비약을 하여 이를 우리 시대의 정신질환에 관한 이야기로 건너가면 어떨까. 예컨대 이런 정신적 부조와 그를 극복하는 노력을 묘사하는 언어들을 신경증의 시대로부터 우울증의 시대로의 전환이라는 현상으로부터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알랭 에렌베르가 말하듯이 신경증이 기율과 죄책감이 신경증에 대응하고 그것이 주되게 개인의 무의식적인 갈등(conflict)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면 우울증은 이른바 자율적인 자아, 자기주도적이고 자신을 돌보는 책임을 짊어진 자기(自己)를 조준한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듯이 19세기 후반을 전후하여 이른바 정신질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던 신경증은 1960년대 이후에 우울증에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지만 그것은 자기주도성 혹은 자기책임성같은 것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고 지배하지 못하는 개인들을 병리화하는 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것은 광범위한 정신적인 현상을 우울증이라는 질병 속에 모아내고 이를 치료제의 투여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약품을 소개하는 다국적 제약자본의 전략과 활동 역시 중요하다. 어떤 이가 역설하듯이 실제로 제약자본은 우울증 치료제를 개발하는 최초의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서적과 보고서, 학술대회, 언론 보도, 티비 프로그램을 조직하거나 후원하면서 우울증을 질병으로 구성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경악스러운 점은 불과 수십 건에 불과한 지극히 주변적이고 희소한 정신질환이었던 우울증이 수백만 명이 넘는 사례로 그것도 해를 거듭할수록 폭증하게 된 것이라거나 세계보건기구가 인류가 직면한 공중보건 상의 두 번째로 심각한 문제로 진단하는 문제가 되었다는 점(첫 번째는 심장 질환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장 많이 팔리는 의약품이 바로 항우울제인 ‘프로작(Prozac)’이라는 사실(가장 많이 팔리는 의약품은 위궤양 치료제인 “잔탁”이다)은 의학 담론 안에서의 변화를 통해 설명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겪는 정신적 과정을 가시화하는 방식 자체의 변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거칠게 말해 우울증은 심리적 현실 안에서 새롭게 발견된 증상이라거나 제약자본이 자신의 이윤을 추구하기 위한 전략에서 극대화된 심리적 이상(異常)이 아니라, 심리적 현실을 인식하고 재현하는 방식에서의 변화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우울증은 그것과 인접한 혹은 연속적으로 매개되어 있는 다양한 유사 담론들과 함께 영향을 주고받으며 등장하고 또 변화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병렬적인 혹은 선택적인 친화성을 맺는 담론들을 매개하는 것은 앞서 보았던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 예상하는 주체성 혹은 자아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다양한 행위의 장 안에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를테면 기든스같은 이들이 요란하게 분석한 바 있는 친밀성의 영역 안에서라면 그가 순수한 관계라고 불렀던 더 이상 전통이나 책임에 따르지 않은 채 연루된 개인들의 감성적인 만족과 확신을 추구하는 것, 혹은 여행을 둘러싼 담론의 변화에서 식별할 수 있는 것처럼 더 이상 일에서 비롯된 스트레스나 피로로부터 원기를 회복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시험하는 일종의 모험이나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 일상적인 소비 같은 것에서는 ‘필수 아이템’같은 유행어에서 보이듯이 마치 심미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조형하는 일처럼 여겨지는 것 등, 거의 모든 삶의 차원에서 이런 새로운 자아의 윤리를 식별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다니엘 벨같은 사회학자가 수십 년 전에 말했던 저 유명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더 이상 아니다. 경제적 삶의 세계 안에서의 금욕주의적 자아의 윤리와 전위적인 모더니즘 문학예술이 내세우는 쾌락주의적인 자아 사이의 모순은 이제 완벽하게 지양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것은 외려 경제적 삶 속에 놓인 주체의 자기실현의 윤리와 문화적 삶의 세계에 놓인 주체의 자기발견과 실험의 윤리가 전연 어긋나지 않은 채 화해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는 치유로서의 글쓰기라는 앞에서 인용했던 것을 설명하게 하여 준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주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마음으로 자신을 돌보고 배려하는 윤리는 글쓰기 혹은 문학을 재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알다시피 글을 읽고 쓰는 주체는 “내면의 풍경”을 읽는 주체이고, 또한 그런 내관(內觀)을 통해 자신을 에워싸고 세계를 바로 그런 내면의 전개로서 재현하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를테면 외적 강제를 내적으로 승화한다는 발상 없이 낭만주의 문학의 등장을 분석하기 어렵듯이 우리는 어떤 자아의 윤리적 변형과 문학의 정체성의 변화를 떼어놓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치유로서의 글쓰기 혹은 문학 치료같은 담론이라 할 것이다. 최근의 심리학이나 정신의학 담론 같은 것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문학치료같은 담론이 어떻게 거기에서 비롯된 지식과 테크닉을 사용하는지 손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이런 변화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아마 오프라 윈프리 쇼가 아닐까. 알다시피 오프라 윈프리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베스트셀러 제조기이다. 그녀는 미국을 넘어 전지구적으로 ‘책 읽어주는 여자’로 군림한다. 우리는 심심찮게 오프라 윈프리가 추천한 책이란 광고를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글 읽기 혹은 문학의 소비를 매개하는 오프라 윈프리 쇼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리얼리티 쇼나 유사한 도전 운운의 싸구려 티비 프로그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에서 겨냥하는 것은 쇼의 호스트인 그녀 자신의 삶을 서사화하는 방식 그대로 흑인 미혼모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이끌고 돌보았느냐는 것처럼 모든 문학적 텍스트를 저자와 독자 사이의 자기의 관리와 배려라는 윤리적 지향 안에서 반향하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아마 우리 시대의 독서의 풍경일 것이다. 물론 그 풍경을 일컫는 이름은 자신을 치유하는 행위로서의 글 읽기일 것이다.
최근 출간된 어느 소설가의 치유로서의 글쓰기에 관한 책의 제목은 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이다. 아마 이는 자기 실현하는 자아를 제조하는 공작소로서의 문학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 관한 책소개 글은 이렇게 전한다. “단순히 등단이나 책으로 출간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내 삶을 돌이켜보고, 현재와는 다른 삶을 살기 위한 글쓰기. 그런 글쓰기는 우리의 삶을 바꿀 것이며, 삶이 바뀌는 만큼 우리의 글도 좋아질 것임을 저자는 확신한다.” 짜증이 나거나 우울하고 화가 치밀 때 필요한 것은 술이나 수다, 노래방이 아니라 바로 글쓰기라고 역설하며 그 책의 저자는 “나를 바꾸고 삶을 바꾸는 진짜 글쓰기”에 도전하라고 고무한다. 이는 앞서 인용하였던 치유로서의 글쓰기의 저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주도성과 자기책임이란 새로운 자아의 윤리, 혹은 내가 어느 글에서 자기계발(self-empowering)의 윤리라고 불렀던 주체성의 규범은 여러 종류의 글쓰기를 등가화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다시피 자기계발 텍스트들이 가장 중요하게 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글쓰기이다. 그것은 스티븐 코비같은 세계적인 자기계발 분야의 구루(guru)가 전파시킨 “다이어리” 쓰기 같은 조잡한 방식에서부터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아름다운 여정 혹은 익숙한 자아와의 결별이라는 것으로 서사화하면서 “사명문 쓰기”나 “묘비명 쓰기”같은 것을 제안하는 구본형 식의 글쓰기 처방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자기계발 텍스트는 글쓰기의 효험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는 문학치료 담론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것이 전문적인 치료 담론의 형태를 취하든 아니면 알기 쉽게 일반 독자들에게 자신의 사소한 체험과 감정적 반응을 서사화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형태를 취하든 그것은 동일한 주체화의 테크놀로지로 묶일 수 있다.
치유로서의 글쓰기를 서술하는 제법 모양을 갖춘 본격 문학이론서이든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나 카프카를 자기 단련과 강화를 읽는 지침서로 읽는 치유하는 책읽기 서적이든, 아니면 문학 텍스트의 감상이든 아니면 ‘독서 컨설팅’이든 ‘문학 치료’이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모자이크처럼 만들어내는 문학-풍경을 앞두고 어색하고 난감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조형하는 윤리적 규범과 테크닉을 통해 매개되고 또한 복제된 현상들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외려 정작 우리가 난감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문학-풍경 속에서 문학 자체에게 떠넘겨졌던 오랜 역할이 소실점 속에서 사리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이를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신경증의 시대를 살았던 문학가의 모습은 전형적인 신경증 환자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우울증의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가들은 과연 우울증 환자의 모습일까. 우리가 보든 문학가의 모습은 오히려 거꾸로 선 자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자신의 고통과 불안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욕망과 능력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배려하는, 즉 자본주의가 서로 다른 삶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는 주체성의 형태를 매개하는 그 윤리를 위해 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에 가깝다. 그러나 신경증을 앓는 환자로서의 문학가는 또한 앞에서 말한 지식인으로서의 문학가라 모습을 낳았다. 그것은 신경증을 병리적인 체험이 아니라 글쓰기를 구성하는 원리로 채택하고 이를 통해 그것이 내면이든 아니면 외적 삶의 세계이든 그를 재현하는 언어를 했던 문학가의 초상을 빚어낸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광기와 고통 속에서 발광하는 문학가를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학이라는 현상이 새로운 주체성을 형성하는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공간으로 기능했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그리고 문학이 계속 그런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강변할 생각 역시 추호도 없다. 그러나 문학적 텍스트를 생산하는 공간이 반자본주의적 근대적 텍스트를 생산하는 공간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전환은 우리에게 글쓰기와 읽기의 정체성에 관하여, 더 이상 미학적인 이념 속에서 문학을 생각하지 않는 문학적 현상에 관한 새로운 분석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어쨌거나 글을 쓰일 것이고 읽혀질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주체성을 형성하는 무대로서 언제나 분쟁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계간 <자음과 모음> 2009년 여름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