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가 흔들리고 있다.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하는 참가자들의 서글픈 다짐과 달리 촛불은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불씨를 되살리고 이를 유효한 혹은 결정적인 정치적 행위로 반전시킨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촛불이 꺼지더라도 계속 살아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나는 그것을 정치적 삶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촛불집회를 둘러싼 이야기가 넘쳐났고 기실 멀미를 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덧붙일 이야기들이 더 있다면 정치적 삶의 형식에 관한 것 역시 그 가운데 하나에 깔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식자가 경멸조로 말했듯이 이 또한 또 하나의 ‘촛불평론’일지도 모른다. 그는 촛불집회에 대해서가 아니라 촛불집회의 바깥에 있는 이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일이 더 긴요하다고 역설하며 촛불집회가 무엇이었나를 둘러싼 토론을 간단히 논공행상으로 치부한다. 촛불집회를 살리고 끌어가는데 필요한 실제적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않고 촛불집회가 뭐냐고 묻는 것은, 그의 비유처럼 촛불집회가 열리자 몰려든 ‘오뎅장사’보다 못한 일일까. 그러나 ‘촛불평론’이 뜬금없다는 주장이야말로 위험한 발상 아닐까.
less.. 지식인들이 “수많은 쟁점들을 각자의 전공과 공부를 살려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고 논리를 개발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조언할 때 그의 고민은 십분 이해할 일이다. 그러나 촛불집회에 참여한 이들을 짓누르는 가장 큰 고민이 광우병 협상을 둘러싼 논쟁에서 이길 수 있는 든든한 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과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라는 윤리-정치적 진실이라면 어떨까. 촛불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이 물음이야말로 관건적이지 않을까. 촛불집회를 이끌었던 아고라 폐인들이 필요로 한 것이 전문적 지식이었을 것이라 짐작하기는 어렵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외려 ‘무엇을 할 것인가’란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 할 수 있다. 사실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어깨너머로 듣거나 곁눈질할 때 그것은 근본적인 요구를 던지는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더하려는, 즉 수행적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일 뿐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정의를 요구할 때 과학적 진실의 권위는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에 힘을 보탠다. 내가 맞게 알고 있으므로 옳다고 하는 언어적 행위 속에는 언제나 어떤 틈새가 끼어있다. 그것은 앎과 믿음 사이의 거리이다. 이 둘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겉보기와 달리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믿음과 지식을 매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 또한 정치적 삶의 형식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과 같다. 나는 그 물음을 떠올리면서 촛불집회에 대한 또 하나의 평론을 추가하고 싶다.
정치적 삶의 형식
여기에서 내가 말하는 정치적 삶의 형식이란 국민, 시민, 민중 등의 개념을 가리킨다. 촛불집회는 그런 개념들을 골고루 불러내면서 혹은 그 가운데 어떤 한 개념에 매달리거나 아니면 다른 개념들과 짝을 이루면서 정치에 관한 우리의 반성을 모두 흔들어놓았다. 먼저 미국산 수입쇠고기를 개방함으로써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위협받았다고 느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의 주민으로서의 국민이 무대에 등장한다. 그 무대에는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생명을 가진 구체적 신체들의 결집체로서의 사회가 있다. 그리고 국가 혹은 복잡한 통치 기구들은 그 사회의 성원인 국민, 다시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건강과 안전, 삶의 안녕을 보장하고 향상시킬 책임이 있다. 이런 가정에 설 때 국민이란 달리 말하자면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사회적 생명으로서의 삶이다. 그런 점에서 촛불집회에 등장하는 첫 번째 정치적 삶은 집합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생명체로서의 주민-개인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헌법1조가”를 부르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을 마주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그 노래는 촛불집회의 송가(頌歌)였다. 촛불집회가 무언지 묻는 숱한 이야기들 가운데 크게 성공을 거둔 것은 직접민주주의로서의 촛불집회란 것이었다. 그리고 촛불집회에 참여한 이들을 주권자로 호명하는 것이었다. 촛불집회는 대의민주주의가 아닌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를 가리킨다는 주장이 등장하여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냐 직접민주주의냐는 조금은 엉뚱한 논쟁이 뒤를 이었다. ‘아래로부터, 자발적인, 직접적인, 지도받지 않은, 조직화되지 않은’ 등의 수많은 규정들이 촛불집회가 보여주는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 나타났다. 이런 말들은 촛불집회의 숨겨진 에토스를 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보는 정치적 삶은 시민으로서의 삶이다. 그것은 정당정치에 매개되지 않은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적 행위로 예찬 받든 아니면 더욱 나아간 일부의 주장처럼 그것이 ‘인민주권’을 행사하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발현되는 것이었든, 그런 주장들 사이에 놓인 ‘양적인’ 차이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외려 문제는 주권적인 삶으로서의 정치적 삶이 우리에게 다시금 제기되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춧불집회에서 기이하게도 혹은 요술처럼 사라져버린 민중이란 주체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 사회정치운동의 역사를 서술할 때, 6-70년대의 시민민주주의 운동이 80년대의 민중민주주의 운동으로 변화했다고 말하곤 한다. 한국 사회정치 운동이 변모했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적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를 뒤잇는 것은 이른바 90년대 후반부터 약진한 시민사회운동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정치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시민사회운동 안에서 말하는 시민적 주체와 촛불집회에서 모습을 드러낸 시민적 주체 사이에는 분명 어떤 분명한 간극이 있다. 이를 식별해내기 위해 ‘새로운 대중’이나 ‘제4의 결사체’, ‘다중’같은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은 시사적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이 평범한 사회학적 서술에 그치지 않으려면 그것이 정치와 어떻게 만나는지 밝혀져야 할 것이다. 뒤에서 좀 더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정치란 무엇인가 묻는 것은 곧 정치는 어떻게 주체화되는 가란 물음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주체가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생산하는 행위이지 않을 수 없다..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시민이란 정치적 주체는 시민사회운동에서 말하는 시민과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쟁점, 사안, 정책과 목표에 따라 즐비하게 도열한 시민사회운동에서 시민이란 사실 탈정치화된 주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운동에서 말하는 시민이란 국가와 시민사회란 이분법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말하는 시민이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시민이다. 다양한 사회적 이해를 어떤 목표로 총체화하거나 다원적인 정체성의 세계를 부인하고 보편적인 역사의 주체, 예컨대 노동자계급을 특권화하는 것에 맞서 많은 이들은 시민사회를 내세웠다. 따라서 시민사회라는 담론 속에 등록된 시민이란 근대 민주주의 혁명이 만들어낸 시민, 즉 인권과 시민권의 주체로서의 시민, 시민사회 담론에서 배격하는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과 다른 시민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촛불집회를 통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세력이 시민사회운동일지도 모른다. 촛불집회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시민은 다양한 사회적 이해와 욕구로 짜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시민사회의 그 시민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요즘 유행하고 있는 표현을 빌자면 촛불집회를 주동하는 ‘주권자’로서의 시민은 시민사회운동이 재현하는 시민과는 다른 자리에 있다. 그래서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시민, 국민 주권을 요구하는 시민이, 건강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가려는 시민사회의 시민의 겉모습일 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촛불집회가 벌어지는 기간 동안 무려 1천여 개가 넘는 시민사회운동단체를 망라한 광우병대책회의가 ‘마이클럽’, ‘소울드레서’, ‘빨리쿡닷컴’, ‘아고라’ 같은 인터넷 카페 혹은 모임과 경합을 벌여야 했던 현상 역시 이와 상관시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사실 인터넷 카페나 모임을 통해 참여한 시민들은 시민사회운동이 말하는 시민과는 다른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민사회라기보다는 한국이라는 추상적인 정치적 공동체에 속한 시민으로서 자신을 내세운다. 그 때의 시민을 시민사회가 내건 시민의 모습으로 자리바꿈하려는 것은 1700여개의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이 모인 대책회의와 인터넷 모임들 사이에 놓인 불편하고 어색한 거리를 설명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시민에서 민중으로 그리고 다시 거꾸로 시민으로 돌아가는 이 돌연한 움직임은, 적어도 표면적으로 볼 때엔 퇴행처럼 보인다. 시민 그리고 민중 그 다음에는? 거기에 우리는 극복하여야 할 것으로 여겼던 시민이란 개념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의 시민과 나중에 다시 출현하는 시민이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시민은 냉전적인 반공 시대의 산물 아닌가. 그 시대에 허용될 수 있었던 유일한 정치적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었던 정치적 삶의 모습은 시민뿐이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은 인권, 시민권이니 하는 개념에 의탁하여 유신독재와 맞서 싸워야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부마항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무엇보다 80년대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있었다. 그들은 인권과 민주주의란 정치적 목표가, 그것이 관련을 맺는 사회적 세계이자 삶의 구체적인 실질, 다시 말해 착취와 지배로 구성된 현실을 비판하는 데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실제적인 사회적 삶의 주체를 찾아냈다. 그들이 민중이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등장하는 시민은 이를테면 변증법적인 부정의 부정이 아닐까. 형식적인 정치적 민주주의적 주체였던 시민은 이제 특수한 자본주의적인 사회체제에서 살아가는 사회적 삶의 주체로서의 민중을 통해 부정되었다. 그리고 다시 부정의 부정을 거쳐 도착한 시민이 있다. 형식적인 법적, 주권적인 주체로서의 정체성에 갇혀있던 시민이란 정치적 주체는 생산과 분배라는 구체적인 사회적 삶의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민중이란 주체를 통해 부정된다. 그리고 다시 그 민중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시민이 나온다. 그것은 의고적인 표현을 빌자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권리와 추상적인 법적 주체로부터 벗어난 그렇지만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세계로부터 요구를 던지는 욕구의 주체로서의 민중에서도 동시에 벗어난 성숙한 모습으로서의 시민이라는 것.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런 매끈한 변증법적인 전개로 시민의 정체성을 규정하기에는 석연찮은 부분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것이 어딘지 들어맞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시민에서 민중으로 다시 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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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임금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 더 쾌적하고 안전한 근로환경을 요구할 때, 이때의 노동자들은 사회적 주체이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현존하는 사회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요구로 전환될 때, 이들은 일약 정치적 주체가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조국근대화의 역군이자 번영과 성장의 견인차였음을 부정하고 노예와도 같은 착취에 시달리는 자로서 자신을 내세울 때, 그것은 단순히 자신의 현실을 오해하도록 했던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지금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그 주장은 노동자라는 특수한 사회집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충격을 준다. 따라서 그러한 각성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동일시로부터 벗어나는 일에 머물지 않고 누구나 떠맡을 수 있고 떠맡아야하는 몸짓으로 나아가게 한다. 물론 여기에서 노동자는 특정한 사회경제적 계층으로서의 노동자로부터 보편적 몸짓을 던지는 노동자로 분열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노동자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동자는 객관적이고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의 일부 집단을 가리키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될 수 있는 논리적 지위이다. 그리고 앞의 노동자가 (사회적) 주체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에 속하면서도 또한 속하지 않은, 국민 주체의 이름으로 사회에 소속되지만 평등한 시민의 이름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주체이다.
따라서 앞의 이론가들의 말을 빌어, 사회 질서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행위로서의 통치나 행정 혹은 폴리스를 정치와 분별할 수 있다면, 정치의 핵심적인 특성은 바로 지금 여기 우리가 체험하고 인식하는 사회가 유일하고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임을 판단하고 선언하는 행위라는 데 있다. 결국 이들의 주장에 따를 때, 정치란 사회의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의 조건을 규정하는 행위이고, 정치적 주체화란 바로 사회를 존재의 질서로서 수용하고 인정하길 거부하고 그것의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보편성을 폭로하고 중지시키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이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라고 굳이 불려야하는 이유는 사회적 주체란 특정한 집단의 속성이나 자질, 성향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인 반면 정치적 주체란 그런 경험적 사실들로부터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디우같은 이가 즐겨 쓰는 랭보의 표현처럼 “논리적 반란(logical revolt)”이다. 그것이 논리적인 이유는 목적론적인 주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숨겨진 역사적 논리의 필연적인 자기전개로서 정치적 변화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실체화될 수 없고, 어떤 특정한 주체의 자리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형식적인 지위를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친 전태일의 목소리는 정치적 주체의 목소리이다. 노동자로서, 한없는 착취와 지옥 같은 공장에 얽매여있는 노동자로서, 자신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에 호소하며 그것을 실행하도록 외치는 목소리는 사회적 주체의 목소리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또한 자신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하는 행위 그 자체를 반향한다. 어느 대학생 출신의 지식인으로 하여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쓰도록 이끌고, 이후 수많은 이들의 귓전에 영원히 메아리치게 했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 우리가 그의 영웅적 행위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특징을 영원한 목소리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바로 그 목소리는 정치적 주체의 목소리/음성이다. 여기에서 음성과 말을 다른 것으로 이야기하는 정신분석학의 이야기를 끌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의미를 전달하는 말을 항상 초과하는 것으로서의 목소리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 안에서 중립적으로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는 말로 모두 환원할 수 없는 차원을 식별하고 이를 음성이라 부른다. 따라서 어떤 목소리에 대한 저항이나 비판은 항상 반론과 이견의 형태를 취한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에 음성의 차원이 담기게 될 때, 그 목소리는 대화나 토론에 연루된 당사자들에 머물지 않고 그를 에워싼 모든 이들의 귓전으로 울려 퍼진다.
그런데 전태일의 목소리는 사회적 요구를 던지는 말이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의 귓전을 맴돈 음성이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타는 목마름으로”란 시에서 김지하가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민주주의여”라고 했을 때, 그 민주주의란 말/음성이 가진 차원과 같다. 그것은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박정희 정권의 궁정철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이 만들어낸 민주주의, 흔하디흔한 정치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규칙과 제도, 절차들의 체계로서의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술어가 아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을 가리키는 시늉을 하면서 말로서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데 머물지만, 김지하의 시에 등장하는 민주주의란 낱말은 우리를 소름 돋게 하였다. 그 소름 돋는 체험 속에서 듣는 것은 음성이다. 그것은 어쩌면 정치적 주체가 발언할 때 그것을 규정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적절한 개념일 것이다. 이런 것에 대응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랑시에르는 ‘불화(mésentente)를, 바디우는 진리사건을, 라클라우와 무페는 헤게모니적 접합이란 개념 같은 것을 내놓는다. 물론 이런 개념들은 음성이란 말에서 강조되는 주체의 정서적인 충격을 가리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얼마간 일맥상통한다. 말과 음성이 객관적으로 동일한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전연 다른 차원을 갖는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어떤 말이 음성의 차원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 그것이 기존의 언어적 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서 체험되는 것이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외침은 근로조건에 관한 규정을 담은 법령에 속한 말들을 지켜라 요구하는 또 다른 말이 아니라 기실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에 대한 앎과 믿음을 일순간에 정지시키는 음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듣기 싫어도 귓전을 맴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북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끈질긴 관성을 만들어내면서 모두의 귓전을 파고든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딱히 어떤 의도했던 수신인을 가지지 않은 채 모두에게 반향 된다. 그것은 처참한 삶을 살고 있던 한 노동자의 목소리였지만 불평등이라는 근본적으로 부정의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 전체의 목소리, 즉 지금의 사회가 유일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목소리이며 모두에게 선택을 하도록 요구하는 목소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우리를 정치적으로 주체화하도록 강요한다. 특수한 사회집단의 말이 이렇게 그 사회의 일부를 대표하는 말로서가 아니라 전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로 전환하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정치적 주체화라고 부를 수 있다.
세 가지의 정치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가 촛불집회를 반성하는 데 어떤 쓸모가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자면 촛불집회를 둘러싼 토론 안에 교차하는 정치적 입장들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각각의 입장들은 촛불집회 자체에 대한 생각을 넘어, 엄격한 뜻에서 정치에 관한 우리의 반성을 지배하는 관점들을 전제하거나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촛불집회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들의 입장은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광우병 수입 쇠고기 문제? 그래 그것은 좋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실용적인 조건 하에서 우리는 노력할 것이다. 한미 FTA 협상이라는 큰 목표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한미 통상에 관련된 규정과 조건이란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하여 재협상에 준하는 새로운 결과를 얻어낼 것이다. 그러나 단 이것은 미국산 수입 쇠고기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좌익세력이 이를 빌미로 정권퇴진투쟁을 일으키는 것을 용납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재협상에 준하는 검역 조건이라고 자처하는 새로운 검역 조건을 만들어냈고 복잡한 여러 단서들 속에서 미국산 쇠고기가 수입되기 시작하였다. 보수주의자들의 입장 속에서 정치의 자리는 당연히 지금 존재하는 질서 그 자체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행위이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쟁점은 오직 ‘사회문제’로 그쳐야 한다. 그것은 의회에서 협상되고, 정부기관을 통해 관리되어야 할 사안들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행위들을 일러 정치라 할 수 없다. 그것은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를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로 승인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아있는 정치의 영역은 그 사회질서를 승인하는 한에서 그것이 전제하는 합리성에 따라 사회를 관리하는 일일 뿐이다. 만약 그 질서를 부인하는 행위가 있다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반사회적인 행위로 규탄받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를 굳이 정치라 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가리키는 행정이나 관리여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들이 전제하는 정치란 것 안에서 사실 정치는 부재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진보적인 자유주의자들이 바라보는 촛불집회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중략).....
여기에서 우리는 곧 이런 생각과 어울리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주장을 상대하게 된다. 그것은 ‘이명박은 물러나라’, ‘이명박 Out’이라는 슬로건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이 수수께끼 같은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비약을 상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촛불집회를 둘러싼 세 번째의 정치를 찾아보게 된다. 우리는 이를 잠정적으로 급진적 민주주의자의 주장이라 부르기로 하자. 이 주장은 사회적 삶의 세계에 속한 구체적인 주체, 객관적인 경제적 사회적 삶의 세계에 속한 주체를 그것으로 절대 환원시킬 수 없는 또 다른 주체를 내세운다. 여기에서 우리는 촛불집회를 통해 유명해진 표현을 빌자면 ‘주권자’로서의 시민의 모습을 보게 된다. 촛불집회를 ‘시민혁명’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새로운 주권자가 광장에서 탄생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결론으로부터 시민인권선언에 육박하는 촛불선언을 제정하고 선포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명박 정권에게 물러나라는 시민의 요구는 이명박 정권의 구체적인 잘못, 즉 정책의 실패와 지배집단의 부패를 겨냥한 것이 아니다. 이들의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가자면 그런 주장엔 기실 어떤 대상에 대한 참조도 없다. 그것은 나쁜 질서를 좋은 질서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쁘고 좋은 질서 따위란 존재하지 않으며 무조건적인 당위로서 제시된 정의(正義)를 선언하는 것이다. 곧 그것은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객관적 질서 속에서의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사회적 행위자들로서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전연 다른 모습으로 출현하는 주체를 그려낸다. 그것은 주권자의 모습이고 무조건적인 정의를 체현하는 모두로서의 나, 보편적인 주체로서의 인민이다. 그리고 그 주권자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주장은 모든 사회적 잘못, 정치의 과오를 심판하고 반성하는 이상(理想)이 되어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여선 안 된다 혹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촛불집회를 격발하고 또 그에 참여한 이들이 토로하는 수많은 ‘사회문제’들로부터 어떻게 우리는 무조건적인 정의로 비약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해 어떻게 하여 우리는 세계의 질서에 사로잡힌 구조적 행위자로부터 주권자로서 자신을 정치적으로 주체화할 수 있을까. 이는 아마 촛불집회를 둘러싼 정세를 섬세하게 분석하는 어느 진보적 학자의 고민으로부터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백승욱은 촛불집회를 두 가지의 위기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촛불집회가 두 가지의 위기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지금의 촛불집회는 지금 민중 생활을 둘러싼 “안전의 총체적 붕괴”라는 위기와 대중들이 현실 정치에서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정치세력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대중들이 스스로 인민주권을 외치는 “헌정적 위기”가 겹쳐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두 가지 위기로부터 파생된 두 가지의 투쟁, 즉 사회체계를 변화시키려는 변혁(transformation)의 운동과 대중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해방(emancipation)의 운동을 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구조에 얽매인 사회적 행위자로서 비롯된 운동과 정치적 주체화를 위한 운동을 결합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그가 내놓는 답변은 이런 것이다. 조금 길지만 인용하자. “촛불집회는 아직 넘어서야할 수많은 경계들이 있고, 이 경계들을 넘어설 때 비로소 연대의 조건을, 그리고 해방적 주체의 탄생이 가능한 조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대중들이 느끼는 분할선이 ‘안전’ 대 ‘불안전’이라면, 거기에 연대하기 시작하는 고리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가장 ‘불안전한’ 지위에 놓인 사람들이 누구인가. 비정규직, 그리고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한 정도로 이주노동자이다. 그럼 촛불집회의 목표는 그 참석자들이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다’라고 선언할 때, 그리고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이 우리는 ‘노동자-시민이다’라고 선언할 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특수한 요구를 던지는 (사회적) 주체가 자유평등이라는 보편성을 쟁취하고자 하는 (정치적) 주체로 전환하는 논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는 노동자-시민이다”와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모두 이주노동자이다”는 선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조금 지나친 비약을 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먼저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 혹은 이주노동자이라는 선언과 비정규직-이주노동자는 노동자-시민이라는 선언이 비대칭적인 것임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넘어가도록 하자. 보다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이주노동자가 과연 특수한 요구를 던지는 사회적 행위자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주장을 응축할 수 있는 정치적 주체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백승욱은 서둘러 비정규직-이주노동자를 가장 불안전한 지위에 놓인, 즉 고통 가운데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을 누리는 주체로 정의해버린다. 그러나 비정규직-이주노동자가 다른 모든 이들이 보편적인 주체, 정의의 주체로 행위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겪는 고통의 참담함, 그 양에 달려있는 것은 아니다. 비정규직-이주노동자가 보편적인 인간성을 대표하는 인간으로 승격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살아있는 모순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수적인 면에서 많고 적음을 떠나 그리고 그들이 겪는 고통이 크고 작음을 떠나, 그들이 어떤 논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수긍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전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 존엄하다, 평등하다는 규정을 통해 모든 이들을 묶어낼 수 있는 전체란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자백하도록 하는 계기가 아닐까.
앞서 예를 들었던 학자들이 ‘주체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미 주어진 앎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로부터 자신의 지식을 축적하는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주체는 기원이 없는 주체이며 즉 주체화라는 어떤 몸짓을 영원히 망각한 주체이다. 정신분석학적인 표현에서 빌자면 이미 주체의 자리는 객관적인 상징적 지식의 네트워크 안에 마련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이제는 거의 의고적인 표현처럼 들리기까지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주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주체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은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를 가리킨다. 즉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알려진 것일 뿐이라는 악무한적인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내가 알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가 존재함을 단언하는 결정으로부터 ‘객관적 지식’과 ‘주관적 진실’ 사이에 단절을 도입한다. 객관과 주관은 대칭적이지 않다. 외려 둘은 절대적으로 비대칭적이다. 객관적 세계에 얽매인 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객관적 세계와의 동일시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그 세계 자체의 일부이다. 그것은 역설적인 표현이겠지만 객관적 주체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로 지금 좌파적인 정치적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앞의 이론가들이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이었으며 또한 전력을 다하여 알튀세르로부터 벗어나려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알튀세르로부터 탈출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이들이 모두 정치적 주체화의 이론가들이란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알튀세르로부터 자신들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낼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대 과학이라는 대당(對當)을 거부하고 이를 이데올로기 대 정치적 주체화란 대당으로 대신하려 하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반대하여 과학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당을 도입할 때, 그들은 과학과 전위당을 대신하는 무엇을 공들여 발굴하고 제시하려 한다. 그것은 바디우가 말하는 것처럼 진리사건일 수도 있고 랑시에르가 말하는 것처럼 불화일 수도 있으며 발리바르가 말하는 것처럼 자유평등의 요구일 수도 있다. 그것은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축조된 세계가 자신이 불가능한 것임을 폭로하며 주저앉는 어떤 순간을 가리키려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공통적으로 정치적 주체화라 불릴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적 주체화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것은 재화의 공급으로 이뤄지고 각 부분들을 배치하는 이미 주어진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 즉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적 삶의 세계에 얽매인 주체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주체로서의 사회적 주체와 완벽한 분리를 도모함으로써만, ‘기적’이나 ‘은총’ 혹은 ‘현현’처럼 계획될 수도 조직될 수도 없는 사건으로서만 출현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저 발발한 사건들 속에서 그것이 과연 정치적 주체화인지를 식별하고 그것을 혁명이나 혹은 새로운 세계를 생산하는 결정이라고 선언하는 범위 안에서의 행위가 있을 뿐일까. 전위당은 물론이려니와 어떤 형태의 조직적 주체가 설 자리는 없는 것일까. 따라서 정치적 주체화란 앞서 백승욱이 말한 것처럼 ‘가장 아픈’ 주체로서의 비정규직-이주노동자가 보편적 주체로서 스스로를 선언하는 행위를 기대하는 일에 그쳐야 할까.
그렇지만 주권적 주체로서 즉 무조건적인 자유평등의 주체로서 자신을 선언하는 주체로서 자신을 내세우는 일은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주체를 찾아낸 것 아닐까.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를 ‘발견’하면서 자본의 논리 안에서 근본적으로 탈구된 주체로서 노동자를 발견하였듯이 그리고 그로부터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주체화하였듯이, 우리는 사회적 주체로부터 정치적 주체화로 나아갈 수 있는 행위의 논리를 찾아내면 안 될까.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사회적 행위자와 정치적 주체화가 만나는 길은 없다는, 그리고 둘 사이를 이으려는 어떤 시도도 허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위협적인 주장들과 마주칠 뿐이다. 그것은 사회의 (불)가능성을 규정하는 행위는 ‘절대적 부정성’, 즉 사회라는 충만한 세계에 깃들어있는 틈새이자 그것의 ‘결여’를 실정화(positivization)하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죄악시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도 없지만 또한 있어야 하는 그 주체를 상상하면서, 변혁은 불가능하다는 체념을 위안하려는, 그렇지만 그 치욕적인 결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스스로 만들어낸 오직 윤리적인 다짐만이 남은, 서글픈 히스테리적 몸짓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촛불집회에서 묻고 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무엇을 하고 있는 주체를 식별하겠다는, 뒷걸음질 치는 몸짓 앞에 무엇을 할 것인가 묻는 주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_계간 <자음과모음>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