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익에게


Nick Cave and P. J. Harvey, Henry Lee


- 사람들 사이의 사이가 이제 거의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징후는 무엇일까. 그것을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속 시원히 답해줄 수 있을까. 하물며 그 답을 얻는다한들 그렇다고 헤어질 수 있는 것일까.

- 마누엘 푸익의 소설을 읽었다. 미친 풍차처럼 돌아가는 일들 사이로 달아나고 싶어, 수정할 원고를 들고 찾은 어느 찻집에서, 나는 책을 한 권 써보자고 독촉하는 출판사 편집자와 이야기를 하고 얻은 몇 권의 책 중에서, 그의 소설을 꺼냈다. 내가 스페인어를 배웠다면, 아르헨티나에서 몇 달을 살았다면, 멜로드라마를 자주 보았다면, 사랑에 출렁이는 여자들을 뻔질나게 훔쳐보았다면, 나는 그의 소설을 백배쯤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아도 그의 소설은 능히 재미있다. 푸익은 자신의 짐작대로 타인을 떠올리고 자신의 욕심대로 타인을 사랑하며 자신의 기대대로 타인을 대하는 사랑의 악랄한 환상에, 완전히 도통한 사람일 것이다.

- 나는 체질적으로 멀티태스킹에 약한다. 문어발이 없다는 것은 多幸症 없이는 살 수 없는 이 요망한 시절에는 커다란 장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장애를 극복할 길이 없다. 손바닥에 놓일 만한 수첩을 장만하고 해야할 일들을 빼곡이 메모하지만 나는 언제나 한가지만 생각하고 한가지도 끝내지 못한 채 새벽녘에 안절부절한다. 지금이 딱 그런 때이다. 그런데도 내일, 해야 할 일들이 자꾸 떠오르지 않는다.

- 왕정주의라 해야 할지, 룸펜적 인민주의라 해야 할지 모를 투쟁이 태국에서 한참이다. 그곳을 자신의 두 번째 나라라고 생각할 만큼 애착이 강한 나로서는 끄라비와 푸껫의 공항을 점거한 시위대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방콕포스트와 네이션같은 태국의 영자신문 웹사이트의 기사를 읽고 그에 달리 분명히 벽안의 중년들이 썼을 것이 분명한 댓글들을 읽으면서, 내내 “빌어먹을”이라고 되뇌였다. 방콕의 타마삿 대학 근처에 있는 민주주의 기념탑을 지날 때면 늘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 그것이 분명히 발생했던 역사적인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전연 상관없이 표류하는 사건으로 떠돈다는 나의 빙충맞은 억측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콕의 벗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런던으로 맛사지사가 되어 떠난 라삐똥은 가끔 내 생각을 할까. 유니코 그랑데 실롬 호텔의 접수계에서 일하는, 늘 나를 보면 낯을 붉히던 그 아가씨는, 언제나 제 시간에 출근을 할까. 언제나 불만스런 얼굴로 커피를 나르던 커피쏘사이어티 카페의 여장남자 웨이터는 아직도 3층 테라스에서 몰래 담배를 피고 있을까.

- 추석이나 설은 왜 내겐 시한폭탄 같을까. 고아 같은 기분으로 살았던 이들은 다들 그런 기분일까.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정치적 주체화란 무엇인가


Leonard Cohen-The Partisan


촛불집회와 세 개의 정치

촛불평론을 위하여
촛불집회가 흔들리고 있다.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하는 참가자들의 서글픈 다짐과 달리 촛불은 점차 힘을 잃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불씨를 되살리고 이를 유효한 혹은 결정적인 정치적 행위로 반전시킨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촛불이 꺼지더라도 계속 살아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면 나는 그것을 정치적 삶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촛불집회를 둘러싼 이야기가 넘쳐났고 기실 멀미를 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덧붙일 이야기들이 더 있다면 정치적 삶의 형식에 관한 것 역시 그 가운데 하나에 깔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식자가 경멸조로 말했듯이 이 또한 또 하나의 ‘촛불평론’일지도 모른다. 그는 촛불집회에 대해서가 아니라 촛불집회의 바깥에 있는 이들을 향해 말을 건네는 일이 더 긴요하다고 역설하며 촛불집회가 무엇이었나를 둘러싼 토론을 간단히 논공행상으로 치부한다. 촛불집회를 살리고 끌어가는데 필요한 실제적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않고 촛불집회가 뭐냐고 묻는 것은, 그의 비유처럼 촛불집회가 열리자 몰려든 ‘오뎅장사’보다 못한 일일까. 그러나 ‘촛불평론’이 뜬금없다는 주장이야말로 위험한 발상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