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어느 출판사에서 새로 내는 책의 추천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이미와 재규어>라고, 年 前 베를린영화제를 통해 공개되었고, 퀴어영화 판에서는 제법 이름이 뜨거웠던 영화의 원작이었다. 마감이 급해 오늘 서두른 맘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less.. "나는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을 흔한 레즈비언 연애담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그런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레즈비언의 사랑이란 넌센스이다. 사랑은 정체성을 가진 두 명의 사회적 신분의 주체가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분적 속성을 삭제하고, 일체의 사회적 정체성을 소거하고, 속된 말로 이런저런 계급장을 모두 떼고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 그래야, 우리는 왜 그토록 수많은 로망스 혹은 연애소설에서 신분이 다른 두 명의 인물들이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가 등장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그 모든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이란 식으로 이해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요즘 판치는 논리, 이를테면 <우리의 사랑도 사랑이다>는 식의 주장, 나아가 동성 간의 사랑도 사랑으로서 받아들여달라는 항간의 논리에 굴복하고 만다. <그들의 사랑도 사랑이다>가 아니라, <모든 사랑은 그, 그녀가 누구였는가를 개의치 않는다>가 맞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회적 정체성, 성의 신분끼리의 사랑이므로 허용될 수 있고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사랑에 위배된다.
사랑은 어떤 정체성을 가진 인물들 사이의 만남이 아니다. 그것은 역으로 그 모든 속성을 지우고 자신을 완벽하게 개인화하는 것이다. 즉 당신과 내가 어떤 배경, 신분, 속성을 가졌건 상관없이 당신과 나는 이제 그 모두를 지운 채 순전히 백지상태의 주체로 만난다. 나는 그것을 사회화된 개인과 다른 뜻에서의 개인, 즉 <사랑하는 개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근대 사회에서의 부르주아적 개인주의와 다른 희귀한 개인성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을 희귀하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것은 흔해빠져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얼마나 흔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희귀하다.
우리는 모두 사랑에 빠졌을 때 거의 제 정신이 아니다. 사랑하면서 제 정신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지만 그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우리는 순식간에 벗어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상태에 있는 비규정적인 개인이 감당해야하는 숨 막히는 자유 혹은 무한한 결정의 상태에서 벗어나 곧 안전하고 고요한 상징적인 질서의 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즉 사랑하는 너와 나라는 개인으로부터 탈출하여 누구의 남편과 아내, 누구의 아빠와 엄마가 된다. 그래서 결혼은 감옥이란 말이 맞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또한 아늑하고 달콤하다. 나는 내가 맺는 이 관계를 더 이상 나의 개인적 책임과 판단의 세계로 상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연애는 아빠 노릇, 엄마 역할, 부부의 도의 등의 규칙에 의해 관리될 수 있는 세계로 탈바꿈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를 끝내고 “성숙”한 커플이 되거나 지금 나의 고집대로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거의 모든 인간에게 고루 분배되어있는, 가장 충격적인 윤리적 우주로부터 탈출한다.
나는 그 점에서 게이, 레즈비언들이 주는 (윤리적) 충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바로 그런 상징적으로 위임된 역할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지 못한 채, 여전히 사랑하는 당신과 나라는 개인성의 위치에 머물러 있도록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그런 윤리적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잔꾀가 동성결혼의 합법화, 법률화의 의지 가운데 하나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줄 수 있는 사회경제적 편익과 이득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추진하는 의지 속에는 바로 그런 자유에 대한 저항감이 있을 것이다. 이른바 호모콘(Homocon)이라 불리는 호모 콘서버티브(Homo Conservative)의 주장 속에 콘서버티브한 점이 있다면, 바로 그런 <자유로부터의 도피(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과는 전연 다른 뜻에서의)>에 있지 않을까.
나는 늙은 게이 영감들이 혀끝을 차며, “우리는 안 돼, 자식을 못 낳아서 우리는 안 돼, 발정나면 그것을 말려주는 책임의 세계가 없으니 우리는 언제나 사랑에 울고 웃어야 하는 나비떼야”라고 탄식할 때, 그 말을 반쯤만 옳다고 받아들인다. 욕망을 자제한다는 것, 의리와 유대, 찰나적인 욕망에 굴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인내 등은 아름답고 기특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와 같은, 나의 또 다른 체현이라고 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낯선 타인 앞에서 왜 나는 이렇게 허둥거리고 왜 나는 그간의 나로부터 벗어나는가라고 말하는 나, 즉 나의 분신과 다른 너, 전적으로 나에게 낯선 그/그녀와 해후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사랑의 윤리라면 나는 그 사랑의 윤리를 악착같이 관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점에서 계약 결혼이니 자유연애니 하는 말에 심지어 공산주의적인 붉은 사랑이니 하는 말에 심드렁해 한다. 사랑이 발휘하는 능력에 대한 충격과 공포에서 비롯된 반성이라고 이런 생각들을 헤아려본다면, 그러나 그런 생각과 주장은 위대해진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듣고 보는 것은 손쉽게 연애하고 헤어지는 법에 관한 잡다한 카운슬러의 조언과 이른바 연애를 성사시켜주는 수많은 중개업자들의 장사질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게서 무언가 우리에게 잡히지 않는, 우리가 타인과 관계 맺는 방식 속에 존재하는 사회적 규칙을 상회하는 그 무엇을 찾아야 하고, 사랑을 끝없이 재발명해야 한다는 충동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을 믿어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기형도의 멋진 시제(詩題)처럼 나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같은 말을 뇌일 생각이 없다. 나는 차라리 <사랑을 잃고, 나는 사라졌네>라고 말해야 옳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 없는 나 속에서 다시 무슨 낯을 한지 알지 모를 그 다른 나를 두렵게 기대하여, 사랑을 시도하는 것. 사랑에 실패하였으므로 쓰러지지 않고, 또 다시 그 어떤 낯선 타인을 만남으로써 전에 없던 나와 대면하는 그 기적, 또 한 번의 사랑이 당도하기를 기대하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다시 시작하는 사랑이든 아니면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이든, 그것을 집요하게 갈구하는 것. 그것은 탐욕일까, 호기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