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을 제 아무리 간편하게 지식으로 먹고 뱉기를 다반사하는 남성 지식인 가운데 끼어있다 해서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란 아이러니한 괴물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남성적 욕망을 배반하면서 여성주의적 담론 근처를 배회하는 수컷 지식인들이 있고, 다른 이성애자 남성과 자신을 차별화시키며 남다른 자신의 자신의 상징 자본을 챙기려한다고 고깝게 볼지라도 그들이 페미니즘에 구애하는 일을 막을 길은 없다. 임옥희의 재치 있는 표현을 빌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려는 의지에서 자신을 “거식증”에 걸린 수컷으로 만드는 수척한 남성 지식인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페미니즘의 목소리에 경청하는 이일 것이다. 그런 어정쩡한 위치에 자리 잡고 나 역시 페미니즘과 대면했다 말해야 옳을 것이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대표 선수 가운데 한 명인 임옥희의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대한 글을 써보라는 부탁을 받고, 나는 그저 자신을 대화상대로 불러주었다는 호들갑스런 기분에 선뜻 응낙을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글을 얼추 읽고 난 지금 나는 시쳇말로 대략 난감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왜 빙충맞게 미리 글을 눈여겨보고 부탁에 응하지 않았을까 뒤늦게 책해보지만 그래봤자 이미 때는 늦은 셈이다.
왜 그녀의 글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이 난처한 일인가를 헤아리자면 단연 어떻게 쓰더라도 그것이 밑지는 장사가 될 것이라는 얕은 계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임옥희의 글은 잘 읽힌다. 그녀의 글을 열독한 이들이라면 모두 잘 알겠지만 그녀는 달변이고 능변이며 다변이다. 그만큼 그녀는 세상 정보에 훤하고 그것을 읽어볼 딱 안성맞춤의 페미니즘적 분석 도구를 여물게 자신의 연장통 속에 챙겨둔 것처럼 보인다. 1장을 여는 「자본」에서부터 마지막 장인 14장의 「채식」에 이르는 그녀의 글의 마디들을 훑으면서 우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재봉틀을 밟는 이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언어의 바구니에 담긴 알록달록한 실패들을 골라 재봉틀에 얹고 페달을 밡는 듯 보인다. 사통팔달의 페미니즘적 지식이 있다면 이는 단연 임옥희의 섬세하고 어쩌면 너무나 잘 마감질이 이뤄진 글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주눅이 들지 않겠는가. 그녀와 같은 ‘말빨’의 여전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여간한 내공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더럭 앞서는 건 다른 이였다 해도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less.. 페미니즘적인 주체란 무엇인가
그렇지만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는 독자로서의 쾌락을 숨길 수는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글은 시원하다. 그녀는 페미니즘적인 시좌를 통해 포착된 현실을 족집게처럼 집어내고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혹은 요령부득의 현실을 의식적인 반성의 대상으로 빚어내는 말들을 찾아낸다. 아쉽다면 각장의 끝마다 그녀가 던지는 처방과 조언은 적잖이 겸손하다고 하기엔 소박하고 또 무던하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각 장의 말미를 장식하는 글들은 적잖이 밍밍하다.
“사람은 나무처럼 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지 않는다. 심지어 나무도 여행한다. 이처럼 지구 지역적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떠도는 시대 한 겨레 한 민족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다민족 다문화 가족으로 살아야 하는 시대에 이르러 불청객을 손님으로 환대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제일 것이다.”(91쪽)
“탈식민의 시대라고 하지만 이제는 전지구촌적인 금융자본주의가 세계의 얼굴을 사막화하고 있는 시대다. 그로인해 세계가 파산되었다. 하지만, 파산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면 그 지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기회도 열리게 된다. 어디서든지 간에 시작할 지점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막의 얼굴에서부터 생존의 발걸음을 다시 옮겨놓기 시작할 때다. 주체와 타자가 조우하는 것이 비록 신기루에 불과할지라도 사막 어딘가에 우물은 있을 것이므로.”(230쪽)
등등. 물론 이런 싱거워지고만 맺는 글에 대한 책임을 저자 탓으로 귀착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고 달리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오롯이 어느 출중한 지식인의 사유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닌 탓이다. 사유를 촉발하는 힘은 사유 자체의 섬세함과 완고함이 아니라 그것을 강요하는 힘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사유는 사유 자체로부터 출현하지 않고 사유를 강제하는 어떤 외압으로부터 촉발된다. 더욱이 페미니즘적 사유는 모든 급진적인 사유가 그렇듯이 당연 외부적인 사유라고, 나는 믿는다. 사유를 추동하는 그러한 힘은 집단적인 실천에서 혹은 사회적인 투쟁에서 말미암는다. 그렇다면 페미니스트 지식인이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안할 때 그것은 실은 그것은 그녀의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덮치고 짓누른 힘으로부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적 실천, 여기에서라면 페미니스트 운동으로부터 강요된 것이었을 것이다. 실은 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나에게 가부장제에 대한 부적으로서의 일종의 페티시였다”(342쪽)고 그녀가 말할 때, 그것은 보다 강하게 읽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연물(戀物)로서의 페미니즘, 자신의 물신이 되어버린 페미니즘은 흔한 독법을 거슬러 읽어야 제격일 것이다. 이를테면 여기에서 저자가 말하는 페티시는 자기가 품은 진정한 욕망의 원인을 망각하도록 하고 욕망의 대상을 감춰버리는 데 이바지하는 그런 허깨비로서의 페티시가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의 페티시는 내밀한 의식적 반성의 주체로서의 나를 저지하며 혹은 압도하며 나를 사유케 하는 외부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저자가 자주 참조하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페미니즘적인 사유에 더 적절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페미니즘적인 사유가 한결같이 그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어불성설이다. 저자가 여러 번 거듭하여 말하듯이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의 자리는 크게 바뀌어 왔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페미니즘의 현기증 나는 성공이 어떤 쓸쓸한 결과를 낳았는지 잘 알고 있다. 여성 주류화 프로그램을 통해 효과적인 통치의 지식과 기술이 된 국가페미니즘을 꼽든, 아니면 자아실현의 윤리에 유별나게 휘둘리다 끝내 라이프스타일 페미니즘이란 자조까지 내뱉게 된 영 페미니즘을 돌아보든, 정치로서의 혹은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거의 방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탓에 갑자기 실현가능한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데 골몰하고 가부장적인 이성애자 남성들의 반페미니즘적인 행패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페미니즘이 소소해지고 어쩌면 적잖이 한심스러워지기까지 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사내 녀석’이 나서서 할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으로부터 다르게 생각하기를 한 수 배운 많은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 그런 섬뜩한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에 반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게임 속에 자신을 밀어 넣은 채 그 권력 게임의 언어에 갇히고 만 처량한 처지의 페미니즘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극력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이 있다는 것, 여성이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니까 사회학적인 여성, 세상에 몇 명이나 살고 있고 그들이 살아가는 객관적인 삶의 처지가 어떠하다는 수많은 사실 속에서 분절된 여성, 그런 여성을 우리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고 또 달리 그에 관해 더 깊이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여성의 존재가 그냥 그저 그렇고 그런 세계 속의 사실 속으로 환원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난데없는 목소리로부터 사실성 속에서는 부재하는 여성이 묵직한 현존 속의 여성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미처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눈으로 들어오겐 이미 실존하던 여성, 미발견된 여성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우리 시야 속으로 들어온 여성은 여성의 몰골을 한 유령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저자인 임옥희가 참조하는 데리다의 표현을 빌자면 그 어떤 실정적 규정도 미결정성의 지평으로 회부하고,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을 확정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증언을 찾게 만들며,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내부적인 기원을 찾기보다는 자신을 언제나 자신이도록 밀어붙이는 힘과의 부정적 관계만을 자신의 유일한 (비)정체성으로 갖는 주체 말이다. 그러한 “대리보충”적인 논리 속에서 자신을 되새김질 하는 주체가 여성이라면 여성은 실은 타자 가운데 타자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손색이 없다.
타자, 그것이 여성인가
그러나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갑자기 망설이게 된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를 읽노라면 우리는 이 저작을 가로지르는 윤리-정치적 프로그램이 바로 “타자-환대” 임을 손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실은 이 책에서 저자가 나누는 꼭지는 대개 경험적 현실의 종류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구분하는 세계의 각 부분, 그러니까 “자본”에서 섭생 즉 “채식”까지, 우리는 여성이 중개되는 혹은 여성이 내재하는 현실을 한 땀 두 땀 따라가게 된다. 그렇지만 “타자”와 “환대”라는 꼭지는 바로 그런 경험적인 세계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이 두 가지가 전적으로 행위의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다른 장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 여성의 삶이 기재되어있는 현실이라면 이 두 개의 장은 바로 그것과 상대하는 정치적 주체성을 다룬다. 물론 그 정치적 주체란 당연히 여성일 것이다. 먼저 타자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삶의 호칭이 아니다. 그것이 무슨 대상이든 타자는 저기 저 편에 있는 객체의 이름이 아니라 주체의 편에서 본 대상, 주체가 관련을 맺지 않는 한 어떤 무엇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현실적 객체에 머물지 않고 타자가 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자 역시 이를 세심하게 분석한다. 타자는 나와 상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내가 총체화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을 벗어나는 대상, 심지어 내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나의 부정성을, 저자가 자주 빌어 쓰는 최근의 비판이론에서 선용되고 있는 그 개념대로라면 “비체”, 내가 날 유지하기 위해 게워낸 나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닌 그 배설물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순전히 주체의 편에 서있다. 물론 그런 주체가 자신과의 연관 속에서만 파악되고 매개되는 대상을 위해 취할 정치적 몸짓이라 할 “환대”가, 역시 주체성에 속한다는 점 역시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불만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페미니즘적인 주체는 환대하는 주체일 수 있을까. 그렇다고 선뜻 동의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타자의 환대라는 윤리학이 보편윤리가 되어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의문이다. 알다시피 타자의 환대란 윤리학은 우리 시대에 가장 선호하는 윤리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윤리보다는 덜 특정적이다. 계급이라는 사회적 현실의 주체보다는 타자라는 보편적 호환성에 개방된 주체가 훨씬 융통성 있게 들란다. 정치를 윤리화하는 자선과 연민의 시대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서정적인 정의(正義), “포에틱 저스티스”야 말로 타자의 윤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물며 여성을 특정한 사회적 주체로서 고정하는 순간 우리를 옭아매는 시시콜콜한 트집, 이를테면 당신은 어떤 여성 주체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서구 백인 중간층 이성애자 기혼 여성의 입장에서 말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당신은 당신의 입장을 다른 여성을 재현할 수 있는 입장으로 특권화 하는가, 같은 집요하고 성가신 추궁을 생각하여 보자. 이런 정치적으로 올바른 골치 아픈 물음을 피하는 방법은, 다시 말해 그로부터 자신을 어떤 주체성의 자리에 놓아야 할지 불안하게 곤구하는 여성 주체에게 그 시름을 잊게 하는 길은, “타자”란 효과적인 처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른 여성이 흑인 레즈비언 채식주의자 여성으로 간단히 한정될 수 있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체 하는 여성주체의 아둔함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다. 어떻게? 여성은 무엇보다 타자이므로?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불길한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하필 타자란 주체가 딱히 여성 주체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주체의 이름에는 수많은 주체의 이름이 자리할 수 있다. 마치 정치적 인도주의가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불행한 낯을 한 이들을 죄다 내셔널지오그라픽 풍으로 혹은 CNN 풍으로 밤새도록 나열하듯이 말이다. 타자는 저 악명 높은 근대의 데카르트적 주체로부터 벗어나려는 기획으로부터 출현하였다는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그것을 빼다 박은 몰골을 하고 있다. 어쩌면 근대적인 데카르트적 주체는 손쉽게 그 역사적 출처를 샅샅이 규명할 수 있는데 반해 후기근대적 타자라는 이름을 내건 주체는 그 비특정성 때문에 마치 실종된 심해의 블랙박스처럼 거의 모든 주체를 망라하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타자는 근대의 보편적 주체보다 더 잡식(雜植)적이고 더 전방위적인 주체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렇기에 우리 시대의 가장 압도적인 보편적인 주체의 이름을 꼽자면 타자라는 주체가 청약 1순위인 것처럼 보인다, 해서 누가 토를 달 것일까. 내가 어떻게든 가닿아야 할, 헤아려야 할 주체가 타자라면 그것은 하버마스의 농담같은 의사소통적인 보편성의 주체보다 더 적나라하게 보편적이다.
객관적인 여자
사실 타자적 보편성은 보편윤리적 주체의 보편성과 다른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보편성을 어떤 구체적인 사회적인 내용에 구속시키려는 시도에 반대하기 위하여, 보다 엄밀하게 말하여 보편성이 어떤 특수성 속에 자신을 정박시키면서 보편성입네 허세를 부리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편성에 대한 집요한 감시를 하여 왔다. 그 탓에 또한 우리는 보편성이란 누가 담지하고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언제나 쩔쩔맨다. 그리고 서둘러 그런 질문은 보편성을 실체화한다고, 그것을 다시 실정적인 특수성 속에 감금한다고 역정을 내며 대답 아닌 대답을 하느라 분주히 떠든다. 그런데, 나는 실은 그것은 답변이 아니라 지능적인 알리바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알리바이를 엄격한 뜻에서 인식론적 범주로 간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리바이는 객관성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의 편에 숨으려는 소심한 잔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현실에 눈감은 채 자신의 화행을 통해 객관성의 부재를 선언하려는 몸짓이 알리바이가 아니라면 대관절 알리바이는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환대하는 타자란 객관적인 삶의 세계를 헤아리지 못한다는 무능을 가리키는 표지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란 물음을 강박처럼 던지면서 정작 그 물음을 촉발한 외적인 삶의 세계, 즉 주관성의 물질적인 삶에 대한 반성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잠재우려는 것. 다시 말해 무지한 주체가 그를 부인하려는 물신주의적 거부가 찾아낸 대상이 타자라면. 그럴 때 타자란 객관적인 세계의 보편성을 회피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특수화하는 몸짓에 매달리는 주체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젠더연구가 페미니즘을 편협성과 협소함으로부터 구출하는 출구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런 방향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의 확산은 젠더당파성을 희석시키는 대가를 지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미니즘의 운동성을 일회적으로 소비해버리는 극장, 시장, 군중이라는 우상으로부터 어떻게 정치성을 계속 확보해 낼 수 있을 것인지가 앞으로 페미니즘의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302쪽)
그렇다면 위에서 인용한 “젠더당파성”을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당파성이 경험적 특수성이 아니라 언제나 보편성을 좌절시키는 한계, 어떤 특수한 사회적 주체의 이름으로 발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보편성의 모순을 표지하는 것이라면, 젠더당파성은 보편윤리가 아니라 보편적 객관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극장, 시장, 군중”이라는 우상, 보편성을 특수한 주체들끼리의 힘의 협상으로 상연하는 극장, 모두 각자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처럼 둔갑시키는 시장, 거짓 보편성의 이름으로 자신을 지배하는 위치에 놓은 권력이 착취받는자를 호명하는 이름인 군중. 이 우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구원해야 할 것은 보편적인 객관성이 아닐까. 실은 이런 생각으로 나를 몰아넣은 것도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의 힘일지 모른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최종적인 보편성의 심급이 사유한다는 것이라면, 나는 사유하는 페미니스트를 만났고 그녀와의 대화로부터 이런 생각 한 더기라도 건졌을 것이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