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철반완이란 이름의 철밥통 세대가 있었단다. 공동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평등하고 유족한 꿈을 열망하던 대약진세대의 노동의 꿈. 그리고 1990년대 청춘반이란 이름의 청춘의 밥그릇이란 세대가 생겼단다. 시장경제가 들어서며 반짝 잘나가는 직업을 꿰차고 실컷 먹고 쓰는 삶을 꿈꾸는 천안문이후 세대. 그런데 지금 주장강삼각지대의 공단에서 쟁의를 일으킨 이 젊은 노동자들은 무슨 밥그릇을 들고 있다고 불러야 좋을까. 미디어의 인심은 그렇게 깜깜하다. 역시 싸우는 자들만 세계에 보인다.
less..
- 일전 낸 책이 2010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며 3쇄를 찍을 것이란 전화가 걸려왔다. 잘 된 일이지만 촘촘하게 짜인 우울증은 그 감회마저 걸러낸다. 炎天 아래에서 눈물마저 버썩 말라버렸다고 말한다면 죽은 자들의 영혼은 비웃을 것이다. 일전 한겨레에 실린 윤구병 선생의 비전향장기수에 관한 애도의 글은 졸렬했지만 철렁했다. 절대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을 것이지만 사상의 자유를 용납하지 않고 일생을 초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안겨준 체제에 대한 증오를 뇌이는 추도사는 무언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단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한 삶을 애도하는 것은 그의 윤리적 의지를 추도하는 것 아닐까. 양심의 자유를 핍박받은 인물로 그를 추모하는 것은 과연 온당한 일일까. 그를 부자유한 체제의 희생자로 추모한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투쟁한 자, 공산주의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자로 추모하는 것은 왜 금지될까. 아마 그 답은 참여연대 건물을 에워싸고 있다는 그 거머리 같은 편집증 惡黨들에게 있을 것이다. 마치 기념우표첩에서 쓸쓸하게 색이 바래가는 낡은 우표 같이 생을 허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더 우울해졌다. 우울은 산송장이 느끼는 기분일 것이다.
- 헤르타 뮐러의 시정은 황홀하다. 아마 고등학교 시절 그녀의 소설아닌 소설을 읽었다면 나는 뜬 눈으로 밤을 샜을 것이다. 산문은 세계이고 운문은 초월이라면, 그녀의 산문은 초월적인 세계를 묘사한다. 산문이 세계를 묘파하면서 그 세계의 질서를 저주한다면 운문은 그 세계를 사는 자들의 느낌을 봉쇄한다 그리고 다른 느낌을 쐬어준다. 헤르타 뮐러는 그럼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동구권의 세계가 온전하게 보전하고 있는 진짜 초현실적인 느낌을 위해, 놀이공원 말고는 변변한 세상 밖으로 나서는 느낌이 없는 이 세계를 위해, 시대착오적으로 호출되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혐의를 품는다. 오스톨기의 절정이 헤르타 뮐러라면 그녀가 손수건이란 메타포로 마치 실타래를 풀듯이 전개한 그녀의 수동적인 저항의 세계는 얼마나 무참한가. 김수영의 忌日이 사나흘 전이었고 오늘은 김현의 忌日이라는데, 나는 갑자기 문학이 낯설고 생뚱맞아 보인다. 잠자리 곁에 새로 장만한 테이블 그 위에 꽂아둔 몇 권의 소설과 시집은 그저 수면촉진을 위한 우유 한잔이다. 잠을 달아나기 위해 시를 읽던 시절, 그게 얼마 전이더라?
- 기말 채점을 서두르고, 밀린 원고에 진저리치고, 뺨 위에 가득 돋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갑자기 냉랭해진 연구실을 나섰다. 뙤약볕에 창밖의 모락산 끝자락의 숲은 모두 손을 떨군 채 빈사상태이다. 연변 출신의 찬모가 서빙을 하는 남원 출신 주인장의 밥집에서 어영부영 묵은지 어쩌구 하는 것에 밥을 쏟아 붓고 한 두어 시간을 허비한 뒤였다. 북한과 포르투갈의 매치가 있다는 걸 문득 깨달은 건 택시를 타려 머뭇거린 어느 술집 앞에서 였다. 플라스틱 의자를 꿰찬 사내들이 한 곳을 응시하는 곳에 덩달아 눈길을 주었더니 축구를 한다. 에미넴에 열광하며 제 나라라고 볼수도 없는 나라가 큰 자리에 나왔다고 울먹이는 인민 루니 정대세가 기특하지만, 실은 아리송하기도 하다. 도대체 그 심정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