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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의 게이화
언제던가 괜찮은 남자는 다 애인이 있고 멋있는 남자는 죄다 게이라던가 하는 광고가 티비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꽤 잘 나가는 시사주간지에서 내게도 동성애자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수다를 큼지막하게 싣기도 했다. 최근엔 연속극의 여제, 김수현의 티비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두고 시끄럽다. 일전 통화했던 어느 언론사 문화부 기자의 표현을 빌자면 “동성애자가 안방극장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집단은 늘 그랬듯이 동성애자를 조장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고 시청거부운동을 펼치는 등 야단법석이다. 그래서 지난 10년동안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동성애자는 누구인가를 묻고 알리는 대중매체의 기사나 프로그램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여기에 잠깐 토를 달자면 거기에서 들먹이는 동성애자란 당신들의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실은 대중문화 안에서 소비되는 동성애 정체성은 이성애자사회가 지어낸 환상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동성애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허위라고 말할 일은 아니다. 그 환상은 또한 동성애자 편에서도 참조하고 또 써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동성애 그리고 동성애자란 것이 무엇인지는 동성애자 스스로가 그 대답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매체에서 흔히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라는 이름으로 경청하는 동성애자 자신의 목소리라고 해서 동성애와 동성애자의 진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에 이끌린다거나 정서적인 친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곧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 속한다거나 혹은 동성애자에 관한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역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많은 동성애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동성애자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라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닐 것이다.
less.. 글로벌 게이?
동성 간의 성애적인 관계나 친밀한 감정을 무엇이라고 불러야할지는 전연 분명하지 않다. 별나게 동성사회적인(homosocial) 한국에서 동성애란 정체성이 다른 사회와 동일하게 인식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만무하다. 이를테면 게이란 정체성을 통해 자신을 동일시하며 동성애자사회란 것을 구축한 한국, 대만, 홍콩 같은 아시아 국가의 동성애자와 오랜 동성애적 하위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일본, 그리고 “히즈라(hijra)”나 “커토이(kathoey)”같은 흔히 제3의 성이라 부르는 성별 체계를 가진 인도, 태국 같은 사회에서, 동성애란 말이 가리키는 것이 다를뿐더러 성별, 성정체성, 성행동 사이에 맺는 관계도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놀랍게도 최근까지 성행동의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성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성원으로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어도 일부 서구 사회를 제외하면 그다지 일반적인 현상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국제 성정치적 관계라 부를만한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며 생겨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서구 사회에서 에이즈위기와 관련하여 폭발적으로 등장한 성정체성에 따른 역학적인 인구분류는 동성애적 성행동을 단순히 성행동의 종류가 아니라 특정한 라이프스타일(잦은 섹스파트너 교체, 사우나를 비롯한 다양한 퍼블릭 섹스 공간의 발달 등)에 따라 살아가는 사회집단이 나타내는 행위 성향으로 보도록 이끌었다. 이는 에이즈와 관련한 의학적 캠페인은 물론 그와 관련한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매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다음으로 동구권의 붕괴 이후 종래의 사회적, 정치적 운동을 대신하게 된 인권운동 역시 동성애 정체성이란 관점을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른바 국제인권운동은 성적인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박해를 적극적으로 인권 이슈로 제기하였다. 당연히 그 효과는 동성애 정체성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는 동성 간의 성행동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을 인종이나 종족과 거의 다르지 않은 특정한 성적인 공동체로 정의하는 특정 서구사회의 정체성 담론을 유포시켰다. 성정체성에 따른 인권침해란 이름으로 우리는 모든 사회를 동일하게 인식하고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미국과 스웨덴 같은 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느 사회에서나 동성애 정체성, 동성애자 사회가 있었던 듯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는 많은 나라에서 반발과 저항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더불어 지금까지 무시되거나 혹은 그를 변별할 어떤 특별한 지식을 갖지 않던 사회에서 갑자기 동성애 정체성이란 이름을 빌어 해당 사회의 동성 간의 성행동을 처벌하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세 번째로 단연 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매체를 통해 순환하는 성정체성에 관한 지식, 의례, 상징, 이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퀴어시네마란 이름으로 소개되는 예술 영화나 “스톤월 항쟁”이니 “게이, 레즈비언 행진”이니 하는 미국 주류 게이운동의 유사 정치적인 담론에서부터 <섹스 앤 시티>나 <퀴어 애즈 포크>, <퀴어 아이>같은 티비 시리즈는 물론 마돈나 같은 게이 청중들이 특별하게 숭배하는 스타들을 둘러싼 팬덤이나 문화적 이벤트(클럽 파티 등), 그리고 전지구적인 게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발달된 관광지 등, 다양한 것들이 포함된다. 따라서 지구화의 과정에서 운반되는 것은 자본과 상품,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정체성과 관련한 것들이기도 하다. 게이 정체성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같은 현상은 많은 사회에서 형성되었던 성과 관련한 다양한 사회적 분류와 위계, 이질적인 정체성의 담론들을 동성애, 동성애자 정체성 속으로 끌어 모은다.
동성애자, 좋은 게이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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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를 탈성애화함으로써 건전한 시민 주체로 길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금으로 대표되는 청소년에 대한 성적 규제의 강화, 매매춘의 불법화, 성폭력이나 아동성폭력에 대한 집단적인 패닉 등은 중산층 이성애자 가족이 우리 시대의 성정치의 모델이 되었음을 역력히 보여준다. 따라서 기존의 동성애자들의 주된 삶의 세계였던 동성애적 하위문화는 “음지” 혹은 “불행했던 과거”로 망각되거나 거부되고, 세련된 클럽이나 바같은 상업적인 유흥 공간, 아니면 스포츠나 다른 취미를 통해 매개된 사교적인 모임이 건전한 동성애자들을 위한 삶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감정적 헌신에 터한 장기적인 친밀한 관계가 정상적이면서 규범적인 관계가 되고 물론 이는 티비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함께 여행을 다니는 유족한 삶을 사는 고학력 중산층 동성애자 남성을 특권화한다.
물론 이는 정서적인 교류와 헌신에 기반한 관계로 부부관계를 그려내는 보수적인 중산층 이성애자 부부의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 이 때 이성애적 규범에 동화될 수 없는 동성애자들은 더욱 주변화되고 동성애자로서 자신의 삶에 관해 발언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정작 우리 사회에서 성적인 위계로 볼 때 가장 열등한 성적 소수자는 중년 노동자계급 이성애자 남성처럼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닐 것이다. 사회적 재생산을 가족화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가족 경제 내에서 노동자계급 이성애자 남성 가장은 생계부양자라기보다는 가정의 재무적인 활동의 책임자라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그러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가장 취약한 생존 조건에 놓인 것이 이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정서적인 교감과 만족이 가장 큰 역할을 해야하는 새로운 친밀성의 세계로 가족생활에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은 권위적인 남편과 가장의 역할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딸방”으로, “키스방”으로 전전한다. 그들은 좋게 보아 ‘재수없는 꼰대’이고 보다 나쁘게는 ‘잠재적인 치한’이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성적 소수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것이겠는가. 다양한 취향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예의”와 “미덕”으로 간주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에서 게이는 어쩌면 이미 좋은 친구이자 시민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데 말이다.
- 르 몽드 디플라마티크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