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새로운 미디어가 출생할 때마다 그에 관한 한 편의 이야기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불과 반년도 차지 않은 세월 동안 우리는 “아이패드(Ipad)”가 세상에 나온 이후, “트위터(twitter)”가 등장한 이후 따위의 이야기를 줄기차게 되뇌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는 마치 미디어에 관해 우리가 말을 건넬작시면 으레 따라야 마땅한 이야기방식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는 매체의 역사를 탐구하는 고명한 학자들이 나서서 하던 이야기가 이젠 우리 입에서 술술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문자 이후, 라디오 이후, 영화 이후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체험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내세우는 따위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떤 미디어가 탄생한 시점을 전후 하여 우리 삶이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이야기하는 서사적 관습 가운데 하나로 정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누구이고 세상이 어떤지를 헤아리는 것이 유치한 기술결정론에서 비롯된 발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외려 사정은 딴 판이다. 적어도 지난 수십 년간 기술을 미디어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 대세가 되어버린 이후, 즉 학자들이 “매체비판”적 관점이라 일컫는 것이 득세한 이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기술을 의식적 사고를 현실화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생각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less.. 사실 매체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매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한 켠을 차지하는 기술적인 도구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지각하고 의식하며 체험하는 방식을 밝혀줄 수 있는 “보편적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한다. 익히 우리가 이름을 들어 알만한 철학자들, 흔히 구조주의자나 포스트구조주의자란 사람들이 실은 바로 인식과 체험이 어떻게 매개되는가를 탐색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코드”, “에피스테메”, “담론”, “장치”, “리좀”, “시뮬라크르” 그리고 저 악명 높은 “차연”이란 개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개념은 실은 얼핏 생각해 보자면 “매체”란 것을 말하기 위하여 출현한 개념들처럼 보일 수도 있다. 따라서 “매체 개념이 존재와 가상, 원본과 사본, 진리와 거짓, 혹은 주체와 객체 같은 전통적이 핵심 구분의 효력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독립된 실체나 현실로 되돌아가는 것을 모두 거부하는 하나의 범주로서 기능한다”는 어떤 매체이론가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모든 지각, 인식, 체험 모두가 매체를 통해 구성되고 작동한다는 것을 기꺼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디지털 강국”임을 자처하는 한국 사회에서 디지털 미디어와 관련한 모색과 비평은 기이하리마치 희박하다. 비판적 지식인이라 하는 이들이나 진보적 사회운동가라 하는 이들조차 매체비판적인 반성보다는 새로운 미디어를 서둘러 채택하여 이를 활용하는데 급급하다. 온갖 휴대용 전화기를 들고 다니며 “트위터”니 “블로그”니 하는 것으로 시민들과 소통하는 것이 대단한 일 인양 여겨지는 게 흔한 일이다. 그를 생각하자면 끈질기게 디지털 매체 이후의 미학적, 정치적 현실을 반성하여 온 이광석의 근작 사이방가르드-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는 그런 생각의 가뭄을 해소하는데 좋은 물줄기일 수 있다. 저자가 만들어낸 새로운 조어인 사이방가르드란 낱말은, 금방 짐작할 수 있듯이 “사이버”와 “아방가르드”를 이어붙여 만들어낸 말이다. 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아방가르드적 실천을 생각해보자는 정도의 뜻일 테데, 저자는 이를 “새롭게 재매개된(remediated) 미디어와 정치예술의 연합을 꾀하면서도 점점 일상 속에 편재화돼 가는 디지털 권력에 대한 다수 대중들의 문화정치적 개입과 저항 표현들을 다양한 미디어 수단을 통해 담아내고 공유하는 행위와 운동”이라고 풀이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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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디지털 미디어가 매개하는 새로운 심미적 실천을 반성하기 위하여 제출하는 몇 개의 개념을 통해 행간 속에서 어떤 사고를 견지하는지 검출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1부에서 저자는 디지털 문화를 표상하는 “키워드”로 구실하여온 몇 가지 개념, “0과 1의 비트적 구성, 사이버공간, 하이퍼텍스트, 가상현실, 사이보그, 인터페이스, 유비쿼터스” 개념을 되짚어본다. 그리고 사이방가르드의 개념을 소개하는 2부를 덧붙인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애피타이저”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를 간단히 정찬을 맛보기 위한 입가심으로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는 현실과 미적 체험을 사고하는데 요구되는 이론적이면서도 정치적인 프로그램을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저자와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볼 수 있게 된다.
먼저 저자가 꼽는 디지털 문화의 주요 키워드들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수긍하면서도 또 불만을 제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꼽는 개념들, 이를테면 하이퍼텍스트, 인터페이스, 사이버공간, 유비쿼터스 등의 개념은 디지털 문화를 언급하자면 항용 등장하는 거의 상식적인 용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용어들은 모든 개념이 그렇듯이 어떤 미학적, 정치적 지향 속에서 출현하고 동원되며 또 작용하는 것들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 개념들은 포스트모던 테크노 유토피아를 상상하는 자들의 상투어구에 속하는 것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자아낼 수도 있다. 실은 그 모든 개념들은 다시 정의되고 다시 규정되며 다른 개념들과의 연쇄 속에 자리 잡으며 나아가 다른 개념으로 대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디지털은 무엇을 꿈꾸는가” 같은, 아마 저자가 디지털 문화에 기대하는 혹은 확인하는 문화정치적 가치를 서술하는 부분에서 적잖이 불편함을 느낀다. 이를테면 디지털의 여러 특징을 꼽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디지털은 새로운 희망이다”에서의 이런 서술은 어쩐지 머쓱하다.
“기계혁명이 단지 공장굴뚝 시대에 국한된 힘이었다면, 디지털은 새로운 시대에 완전히 새로이 쓰인 문법이다. 이제까지 혁명이라 말한 것들은 인간 삶의 일부만을 변화시켰을 뿐이다. 디지털은 이 모든 것들의 혁명이다. 살의 결 하나하나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것, 그것이 디지털이 만들어내는 거대 혁명이다. 과거 체제 모순의 반항이 사회주의혁명이었다면, 궁극적으로 인간 삶의 모순의 대안 기획은 디지털 사회 혁명이다. 이는 미래 우리 삶의 새로운 희망이다.”
이는 어쩌면 빌 게이츠의 마찰 없는 자본주의에서 읽었던 듯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디지털이 단순히 기술적 수단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혁명을 가능케 하는 주된 동인이라는 선언은 우리 시대의 주된 희망의 복음으로 회자되어 왔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는 거의 정신 나간 사고처럼 보이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공리를 들이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당연 양과 질의 변증법을 조야하게 응용한, 다시 말해 생산력이 증대하고 어떤 임계점에 이르렀을 때 기존의 생산관계가 이를 더 이상 지지하지 못하고 거꾸로 그것을 제약하는 힘이 되어버림으로써 다음 단계의 사회로 넘어간다는 그런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이는 저자가 “0과 1의 변증법”이라고 말한 그것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0은 디지털의 가능성을 담고 있으며 1은 0을 규정하는 현실적 권력”이라고 말할 때, 이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을 풀이하는 또 다른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생산력은 마치 디지털 미디어의 기술적 현실처럼 0에 가깝다. 그것을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하고 배치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현실적 권력’을 떠나 그것은 실존할 수 없다. 따라서 “0과 1의 변증법”을 식별하려는 노력은 결국 0의 부정적 비규정성에 현혹되는 것이 아니라 1의 편에 서는 것, 방금 말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을 빌어 말하자면 생산관계의 우위라는 관점에 서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산관계란 것이 흔히 말하는 “디지털 디바이드”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면직기나 증기기관이나 전화기를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희극적인 농담일 것이다. 외려 그것이 기술과 그에 관여된 인간들을 어떻게 조직하고 재생산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산력이라면 그것은 그를 가능케 하는 생산관계 없이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0과 1의 변증법은 실은 1의 자기부정적 운동을 위해 고안된 타자일 뿐이다. 즉 0은, 당연한 말이겠지만, 1의 현전을 그리고 그것의 증감의 운동을 표상하기 위하여 고안된 대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결국 1의 자리가 무엇인지를 헤아리는 노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지젝같은 이가 레닌 시대의 사회주의 공식이 “전력화+소비에트 권력”이었다면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는 “인터넷 무료접속+소비에트 권력”이라고 농담처럼 말할 때, 주목해야 할 것도 그것일 터이다. 여기에서 단연 중요한 것은 “소비에트 권력”이다. 물론 그 자리에는 “마찰 없는 자본주의” 혹은 역사의 종말로서의 “디지털 자본주의”가 자리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이방가르드를 말하려면 바로 그 1이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조준하는 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캐나다의 매체학자 맥루언이 구텐베르그 은하계를 내놓은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알파벳 문자가 성립되고 인쇄술이 발명되며 등장한 ‘구텐베르그 은하계’의 풍경은 이제 뉘엿뉘엿 지평선 끝에서 사라지고 있는지 모른다. 1844년 전신을 만들어낸 마르코니 이래 우리는 이미 마르코니 성좌의 세계를 지났고 이제는 ‘튜링 은하계’, 즉 1936년이 고안했던 인공지능기계인 튜링기계가 가정했던 그 세계, 디지털화되고 컴퓨터화된 삶의 세계에 깊이 잠긴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많은 이들이 문자와 책가 매개하는 구텐베르그 은하계 속의 삶의 원리들이 효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계몽적 이성, 기계 복제, 고요히 묵독하는 독자로 상징되는 개인주의, 인쇄자본주의, 선형적인 시간의 서사, 시장 경제, 민족국가 등이 아마 그렇게 꼽히는 원리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튜링 은하계에 진입한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의 세계를 기약하고 창조해야 할까. 물론 그것에 대한 답변은 우리에게 곧장 전송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미적인 상상력을 경유하며 뜸을 들이고 발효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상력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이광석은 바로 그 여정을 위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튜링 은하계를 답사하려는 이들을 위한 훌륭한 27개의 여행지를, 그는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글을 읽는 이들은 이 여정을 참고삼아 다른 샛길로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 황해문화에 기고한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