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공식적인 활동인 셈이다. 내가 가르치는 학교는 디자인과 미술에 관련한 학교이다. 그와 인연이 먼 공부를 한 전력에 비추어 보면 조금 엉뚱한 곳에서 살아가는 셈인데, 나는 내게 이곳이 꽤 괜찮은 서식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미술이나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배우게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사물과 이미지의 세계에 에워싸여 살고 있으면서도 이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물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조직하고 상품을 만들어내며 어떻게 사물 자체를 탄생시키는지 생각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나는 관념의 세계 못지않게 물질적 삶의 세계에 관심을 두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몇 해 전부터 틈틈이 이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다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일을 빼면 당연히 글을 쓰는 것이 주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체질적으로나 기벽으로서나 학술적인 지식인이지 못해 주로 사회비평적인 저널이나 매체에 자주 글을 싣는 편이다. 그리고 뜻이 맞는 이들과 한 주에 한 번씩 글을 읽고 입씨름을 벌이는 작은 공부모임을 하고 있다. 지금 준비하는 공부는 “일상생활의 금융화”란 것이고, 아직은 생각의 밑그림만 그리고 있다.
less.. 2.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알튀세르에 관심을 갖게된 계기, 또는 알튀세르를 처음 공부할 당시의 느낌 같은 것들을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아마 내 세대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그렇겠듯이 나 역시 서구마르크스주의, 네오마르크스주의란 이름을 경유하여 알튀세르를 접했다. 아도르노와 벤야민, 그람시, 알튀세르, 풀란차스, 르페브르 같은 이들은 모두 어쩐지 낯설고 또 기름져 보였다. 어쨌거나 마르크스-레닌주의자이고자 했던 어린 대학생에게 그 모든 지식은 아류이거나 기껏해야 진짜 혁명적 사고에 접근하기 위해 마지못해 경유해야 했던 위장된 언어였다. 그렇지만 알다시피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알튀세르주의자이지 않기는 어려웠던 혹은 그만한 경우가 아니었다면 알튀세르적 영향과의 긴장 밖에서 사고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그가 굳이 마르크스주의자이가 아닐지라도 그는 알튀세르의 흔적으로 가득찬 지역적인 마르크스주의와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한국 사회 마르크스주의적 지식인 운동 안에서 에서 가장 중요한사건 가운데 하나일 사회구성체 논쟁이 미친 영향 때문이었다. 모든 비판적인 연구자나 운동가들은 그 논쟁에 입회하여야 했고 그 엄밀한 뜻에서 입장을 가져야 했다. 이론 안에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이미 알튀세르와 해후한 셈이었다. 그것은 알튀세르의 주요한 개념과 그의 이론적, 정치적 영감을 선택했다는 뜻에서 이기도 했지만 또한 어렴풋하게나마 “이론적 실천”이란 것을 행하고 있다고 자각했다는 뜻에서도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87년과 89년이 찾아왔다. 공산주의가 죽은 개 취급을 당하고 마르크스주의가 파면되어야 할 지식이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은 또한 알튀세르에게 돌아가고자 했다. 그 정치적, 사회적 정세가 이미 알튀세르가 선제적으로 대면하고 또 돌파하고자 했던 그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위기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였고 관료적 당이 없는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에 관한 것이기도 하였으며, 20세기 절반 기간 동안 스탈린주의라는 미증유의 동면 속에 자신의 한계와 난점을 사고할 수 없었던 마르크스주의를 소생시키는 기획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적어도 내게는 하나의 낯을 한 알튀세르가 없다. 물론 우리에겐 이제 공산주의 철학자이자 당 활동가였던 알튀세르보다 그 사유의 힘을 모두 거세하고 모든 독성을 제거한 뒤의 알튀세르에 더 익숙해 있다. 이를테면 스튜어트 홀같은 이를 통해 정착된 자본주의적 삶의 기호학적 코드 즉 이데올로기를 분별하고 비판한 이론가로서의 알튀세르의 초상에 더 친숙하다. 또한 후기구조주의를 통해 청산되거나 극복되어 버린 사고의 계기로서, 즉 사유의 시제(時制)로는 언제나 그 효력이 다한 “어제”의 사고가 되어버린, 묘비명 속의 알튀세르를 마주한다. 이런 정세에서 여전히 알튀세르와 함께 한다는 것은 실은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일일 것이다.
3. 지금 한국에서 알튀세르 심포지엄을 연다거나, 알튀세르를 재조명하는 것의 의미, 알튀세르 사유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론가로서의 알튀세르를 먼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를 경유하지 않은 채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를 사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알튀세르의 렌즈를 통해 마르크스를 읽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알튀세르를 재조명한다는 것은 실은 마르크스의 사유를 재조명한다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자이든 아니든 모두에게 공통적이란 점이다.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면 당연 알튀세르를 경유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채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 발언한다는 것은 능청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스탈린주의를 통해 황폐하고 빈사상태에 이른 마르크스주의적 사고를 다시 가동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그가 던진 모든 물음은 여전히 가치 있고 유효하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역사적인 정세에서 또다른 알튀세르의 모습이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알튀세르에 관한 심포지엄을 연다는 것, 그를 읽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 그에게로 되돌아가자고 하는 것, 그 모두가 추문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만 그의 제자들이었던 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가 한자리에 회합하고 그들에 관한 학술행사를 조직한다면 사태는 다를 것이다. 또는 그 행사의 제목이 최근 바디우가 내놓은 책 제목처럼 “공산주의적 가설”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면 이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마르크스주의를 소비하는 “스타일”에 아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수업을 하다보면 우리는 자신의 이론적 스타를 가진 팬들을 만나게 된다. 그는 지젝일 수도 있고 바디우일 수도 있고 혹은 아감벤이나 주디스 버틀러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알튀세르의 팬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어쩌면 넌센스처럼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였고 공산당의 지식인이었던 알튀세르에게 운동과 정치를 자신의 타자로 가지지 않은 급진적인 지식이란 불가능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인 지식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은 한국의 자유주의적인 야당지(?!)들이 중계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으레 그렇듯이 “씽크탱크”에 속한 전문연구자가 되어 현안 혹은 의제에 대하여 중언부언 발언하거나 아니면 “키보드 워리어”가 되어 대중매체가 만들어내는 이슈에 대하여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종류의 활동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시사토크쇼는 시사토크쇼일 뿐이다. 그것은 개념을 생산하는 대신 유행어를 만들어내고, 조직을 만들어내는 대신 숭배와 악담의 댓글을 만들어낼 뿐이다. 독일의 유명한 공산주의자 리프크네히트의 “학습하라, 선전하라, 조직하라”란 유명한 슬로건처럼, 혹은 마오쩌뚱의 “조사 없이 발언권 없다”는 단언은 그저 멋들어진 선동적인 구호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알튀세르가 늘 강조했듯이 이론에서의 정치를 묻는 것일 터이다. 나는 그런 이론 속에서의 정치를 생각함에 있어 알튀세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4. 다룰 주제가 '알튀세르와 푸코'이다. 현대 프랑스 철학, 그 중에서도 푸코와 알튀세르가 어떤 관련 속에 있는지 말씀해 달라. 얼핏보기에는 평생을 '맑스'에 천착했던 알튀세르와 맑스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직접적인 언급은 매우 적었던 푸코 사이에는 꽤 큰 거리가 있는 듯 보인다. 이데올로기의 문제, 국가장치와 주체의 문제 등 주요 논점들에서 두 사람이 어떤 차이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는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의 큰 얼개이자 물음을 이룬다. 나는 푸코와 알튀세르 사이의 무언의 이론적 대화를 중계하려는 시도를 생각하고 있다. 둘은 전혀 서로를 참조하지 않으면서 혹은 서로에 대한 무지 속에서 대화하는 이론가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 부재하는 대화를 중재하기 위해 우리는 대화를 가능케 하는 화제 혹은 두 학자 모두 좋아했던 용어를 빌자면 토픽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를 자유주의적 국가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 모두 근대 국가의 정체성을 밝히는데 집요하리만치 천착했다. 무엇보다 자유주의적인 주권적 법 담론이 표상하는 국가와 대결하고자 분투했다는 점에서 둘은 일치한다. 근대 국가의 계보학을 탐색하기 위한 시도였던 악명 높은 푸코의 “통치성”과 관련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란 역시 오해와 추문에 시달려야 했던 알튀세르의 글 모두 실은 자유주의적 국가를 상대한다. 푸코에게서는 주권적인 권력 개념을 넘어 생권력을 조직하고 운용하는 장치로서의 국가가 문제였다면 알튀세르에게 있어서는 법 이데올로기의 환상을 넘어 개인을 주체화하는 국가 장치가 문제였다.
그렇지만 둘의 기획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다. 푸코는 마르크스보다 더 유물론적이고자 했다. 그 어떤 초월적인 심급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집요한 실증성의 이론가인 푸코에게 국가 비판은 권력의 사회물리학, 거칠게 말하자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어떻게든 정초하지 못하게 하는 관점에 이른다.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동일한 외연을 가진다는 푸코의 잘 알려진 내재성의 사유는 결국 정치를 사회적 삶의 통치라는 것으로 닫아 버린다. 그렇다면 자유와 평등이라는 정치적 규범 혹은 이상은 더 많은 행복과 안녕, 건강을 위한 수사에 불과하며, “사회 문제”와 “사회정책”을 제외한다면 정치적 행위를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사유가 가진 특징을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기이한 세 낱말의 조합인 이데올로기-국가-장치와 관련한 것이다. 장치의 이론가란 점에서 알튀세르와 푸코는 일치한다. 지식과 기술, 윤리를 통합한 주체화의 작용을 분석하는 통치성, 즉 행실의 통솔(conduct of conduct)로서의 통치성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관한 정의와 거의 유사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둘을 어긋나게 하는 지점은 흥미롭게도 국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데올로기-국가-장치에서 장치에만 주목하거나(이데올로기의 외재성, 객관성을 강조하는 경향) 아니면 이데올로기만을 극력 강조하는(문화연구로 대표되는 문화적 코드로서의 이데올로기를 특권화하는 경향) 논의에서 결여되어 있는 국가에 관한 알튀세르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거의 모든 현실을 사회 속에 담는 푸코와는 정확히 반대의 방향에서 그를 모두 국가에 담는 알튀세르의 몸짓 사이에 극적인 대조가 있기 때문이다.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회적 제도를 국가 장치라고 부를 때의 알튀세르와 국가 장치를 비롯한 모든 것을 사회적인 것의 십급이라고 부르는 푸코 사이에는 기이하리만치 극명한 대조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이론가의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선택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국가를 사회에 외재적인 자율적인 심급으로 가정하기를 극구 거부하며 사회적인 것의 자기반영성 속에 혹은 사회의 유물론 속에 집어놓고자 했던 푸코와 달리 알튀세르는 푸코식의 내재적 유물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 속에서 외려 사회에 관한 보다 유물론적인 분석을 도입하려 했다고 생각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그는 국가의 허구적인 보편성을 전제하면서 혹은 국가의 이상성을 사유함으로써 혁명이라는 계기의 가능성을 사유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유물론 속에서의 관념론자였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상성/보편성의 계기에 대한 사유를 배제하지 않을 때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이 혁명적인 유물론으로 가능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우울증적인 혹은 그것의 맞짝이라 할 쾌락주의적인 자아의 윤리학으로 나아가는 푸코에게서보다 알튀세르의 미완의 이데올로기론에서 우리가 더 많은 정치적 사유의 씨앗을 찾아볼 수 있다고 본다.
- 그린비출판사의 알튀세르 심포지엄 블로그를 위한 인터뷰의 답변지_